나만의 비밀 공간, 도서관

by 브레첼리나

독일에서 어학 공부를 했을 때, 심심한 시간이 많았다. 오전에 학원을 다녀오고 밥을 먹고 나면 오후 1시 정도가 되었다. 1시부터 자기 전까지는, 간단한 학원 숙제를 제외하면 딱히 할 일이 없었다. 슈퍼마켓에 장을 보러 가거나, 라인강을 따라 산책을 해도 시간이 남았다. 독일어 실력을 빨리 늘려야 한다는 압박감은 있었지만, 책상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 실력이 느는 건 아니었다. 물론 단어를 외우고 문법 공부도 필요했지만, 독일을 경험하고 독일어로 한 번이라도 더 말해보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했다. 독일 친구는 없고, 시간은 많고, 어학원 친구들과 노는 것도 한두 번이다 보니, 나는 내 삶의 루틴을 만들고 싶었다. 그때 내가 찾은 방법은 대학교 도서관에 가는 것이었다. 독일의 대학교 도서관은 모두에게 열려 있어 별도의 절차 없이 출입이 가능했다. 무엇보다도 도서관은 너무 아름다웠다. 유리로 된 통창 너머로 라인강이 한눈에 들어오니, 이보다 더 공부하기 좋은 곳이 있을까 싶었다. 물론 도서관에서도 책상에 앉아 독일어 공부를 했지만, 혼자 방에서 공부할 때와는 달랐다. 독일 대학생들이 어떻게 공부하는지, 쉬는 시간에는 뭘 하는지, 친구들끼리 어떤 방식으로 대화를 나누는지 관찰하는 것이 나에게는 하나의 ‘경험’이었다. 도서관에 들어설 때 입구에 있는 독일인 직원에게 “Hallo”라고 인사하는 것만으로도 뿌듯했다. 가벼운 미소를 주고받는 그 인사는, 내가 독일 사회의 일원이 된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그렇게 나는 시간이 날 때마다 도서관에 가서 공부했고, 동시에 독일에 조금씩 적응했다.


대학교에 입학하고 나서는, 오히려 더 심심한 하루가 이어졌다. 나는 예술을 전공했기 때문에 일반 인문대가 아닌 쿤스트 아카데미(Kunstakademie)에 입학했다. 거기서는 일주일에 한 번 만나 자신이 작업한 결과물을 보여주고 피드백을 받는 것이 수업의 전부였다. 물론 철학이나 미학 같은 이론 수업, 판화나 실크스크린 같은 실기 수업도 있었지만, 필수 과목은 아니었다. 점수도 없었다. 자유롭게 수업에 참여할 수도 있었고, 그저 자신의 작업에만 집중할 수도 있었다. 이 독특한 시스템이 처음에는 너무 낯설었다. 그래서 적응하기 위해 여러 수업에 참여했다. 독일어를 다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미술사 수업도 듣고, 사진 스튜디오 수업에도 참여하면서 스스로 바쁘게 지내려 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수업을 들어야 할 이유를 점점 잃게 되었다. 아무리 열심히 참여해도 독일어는 늘지 않는 것 같았고, 나만 겉도는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독일에 있고, 독일 친구들과 같은 수업을 듣고 있음에도, 나만 다른 공간에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침에 학교에 갔다가 오후에 집에 돌아오곤 했다. 여러 수업을 듣고, 나름대로 내 작업도 열심히 했지만 하루가 만족스럽지 않았다. 내가 어디에 있어야 할지 몰라 학교 안에서 방황하던 날들이 이어졌다. 그러던 중 내가 발견한 곳이 학교 꼭대기층에 있는 도서관이었다. 예술 관련 책들만 모아놓은 작은 공간이었지만, 책들이 빽빽하게 꽂혀 있었고, 중간 공간에는 커다란 책상들이 있어 커다란 예술 책을 펼치기에 좋았다. 큰 창문으로 햇빛이 들어오고, 그 공간은 나에게 무척이나 편안하게 느껴졌다. 마치 내가 지낼 자리를 찾은 기분이었다. 그 후로 나는 거의 매일 도서관에 갔다. 유명한 예술가들의 작품을 책으로 감상했고, 작업의 영감을 받기 위해 시대별 예술 작품이 수록된 책들도 열심히 찾아보았다. 학교에 적응하지 못한 내가 숨을 수 있었던 곳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위로를 받고 창작의 자극을 받는 곳이기도 했다. 그렇게 내 유학 생활은 도서관과 함께 흘러갔다.


졸업 후, 남편이 있는 독일의 다른 도시로 이사했다. 작은 대학 도시였고, 남편은 논문을 쓰기 위해 매일 대학교 도서관에 갔다. 나는 취업 전까지 할 일이 없어 남편을 따라 매일 도서관에 다녔다. 노트북과 노트를 들고 책상에 앉아 구직 사이트를 살펴보기도 하고, 포트폴리오를 만들며 독일어 공부도 계속했다. 무료할 뻔했던 졸업 후의 시간 속에서, 도서관은 다시 한번 나에게 활력을 주는 공간이 되어 주었다. 도서관 창문 너머로는 작은 공원이 보였는데, 학생들이 도시락을 먹거나, 누군가는 누워서 자고, 또 누군가는 친구들과 수다를 떠는 모습이 보였다. 그런 풍경을 멍하니 바라보며 잠시 쉬기도 했다.


지금 한국에서 직장 생활을 하고 있는 나는, 점심시간이 되면 회사 근처 주민센터에 있는 도서관에 간다. 주로 책을 빌리지만, 사실은 나 혼자만의 공간을 찾기 위해 그곳에 간다. 30분 정도 책을 훑어보거나, 마음에 드는 책이 있으면 잠깐 앉아서 읽기도 한다. 때로는 빌려오기도 한다. 이 짧은 시간이 나의 지루한 회사 생활 속에서 큰 행복을 안겨준다.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도서관이지만, 그 공간은 나만의 비밀 공간이다. 할 일이 없어 심심할 때, 나 자신이 부끄러워 어디론가 숨고 싶을 때, 삶의 영감을 받고 싶을 때, 집중해야 할 일이 있을 때, 작은 휴식이 필요할 때 나는 늘 도서관에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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