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 아씨시에서 함께한 시간

by 브레첼리나

독일에서 유학 중이었을 때, 엄마가 갑자기 여행을 오시겠다고 했다. 언젠가 한 번은 오실 거라 생각했지만, 생각보다 빠르게 이루어졌다. 나는 서둘러 3주간의 여행 계획을 짰다. 유럽이 처음인 엄마였기에, 독일만 보여드리긴 아쉬워 이탈리아와 스위스를 여정에 넣었다. 당시엔 남자친구였던 지금의 남편도 함께했다. 여러 도시를 거쳤지만, 그중에서도 아씨시에서의 시간이 가장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웃지 못할 해프닝도 있었고, 엄마와 손을 잡고 걸었던 그 길은 지금도 생생하다.


나와 남자친구는 이탈리아에 여러 번 다녀온 적이 있었다. 남자친구의 절친이 로마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여름휴가 때마다 자연스레 이탈리아로 향하곤 했다. 그래서 엄마와 여행을 계획할 때도 부담 없이 이탈리아를 선택했다. 엄마가 로마의 콜로세움을 보고 싶어 하신 것도 이유였지만, 우리가 이미 길을 잘 알고 있어서 더 편하게 안내해 드릴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로마에서 며칠 머문 후, 우리는 기차를 타고 아씨시로 향했다. 그런데 그 기차에서 작은 사건이 벌어졌다. 표는 미리 예매했고, 열차 출발보다 일찍 도착해 자리에 앉아 엄마와 수다를 떨고 있었다. 기차는 연착 없이 제시간에 출발했다. 그런데 출발 후 몇 분 지나 검표원이 나타났고, 우리는 자신 있게 티켓을 내밀었다. 하지만 검표원은 티켓을 앞뒤로 살펴보더니 유효하지 않다고 말했다. 이유는 우리가 기차를 타기 전에 티켓을 작은 기계에 넣어 시간 도장을 찍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순간 아차 싶었다. 이탈리아에서는 기차를 타기 전, 반드시 노란색 검표기에 티켓을 넣어야만 유효한 것으로 인정된다. 그 기계를 잊고 지나친 것이다. 우리는 티켓에 문제가 없다고 항의했지만 소용없었고, 결국 티켓값을 다시 지불해야 했다. 엄마는 당황하신 눈치였고, 나와 남자친구는 죄송한 마음뿐이었다. 이탈리아를 여러 번 왔던 우리가 이런 실수를 하다니… 엄마에게 좋은 기억만 남겨드리고 싶었는데 아쉬움이 컸다.


그래도 우린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다시 웃으며 아씨시로 향했다. 도착하자마자, 모든 불편이 잊힐 만큼 아씨시는 아름다웠다. 중세의 숨결이 남아 있는 고요한 도시, 성 프란치스코와 클라라 수녀의 숨결이 깃든 그곳. 엄마도 이 도시를 무척 마음에 들어 하셨다. 조용한 골목, 웃고 있는 사람들, 성당에서 울려 퍼지는 종소리… 어느 하나 마음을 어지럽히는 것이 없었다. 우리는 독일 수녀원이 운영하는 숙소에 머물렀다. 한국인이 운영하는 숙소도 있었지만, 당시 우리가 독일에 살고 있었기에 독일 수녀원을 선택했다. 수녀님들은 우리가 독일어를 한다는 것에 반가워하시며 따뜻하게 맞아주셨다. 세 개의 1인용 침대가 놓인 방, 창문을 열면 펼쳐지는 아씨시의 전경. 자연과 돌담, 새소리까지… 시간여행을 온 듯한 기분이었다. 엄마가 좋아하셔서, 우리도 괜히 더 기뻤다.


다음날 아침, 우리는 1층 식당에서 독일식 아침을 먹었다. 다른 독일 관광객들도 있었고, 다 함께 기다란 식탁에 둘러앉아 식사했다. 독일 사람들은 우리를 아주 신기하게 생각하며, 어떻게 독일 수녀원까지 오게 됐는지, 왜 독일어를 할 줄 아는지 많은 질문이 쏟아졌고, 우리는 하나하나 답했다. 독일 사람들과 수녀님들은 그제야 궁금증이 풀린 듯 맛있게 아침식사를 하고 좋은 여행이 되라고 말해주었다. 엄마는 우리가 독일어로 자연스럽게 대화하는 모습을 신기해하며 독일 사람들에게 몇 번이나 고개를 숙여 인사하셨다. 한국에서 매일 밥을 드시던 엄마에게는 빵과 햄, 치즈, 요거트로 구성된 아침 식사도 낯설고 재미있는 경험이었다. 나중에 엄마는 산책 중 “수녀님이 팔이 떨리시면서 무거운 주전자로 커피를 따라주실 때 너무 미안했다”라고 하셨다. 그 장면이 인상 깊게 남으신 모양이다. 엄마는 비록 가톨릭 신자는 아니지만, 믿음이 깊은 개신교 신자다. 여행 내내 성경책을 가방에 넣고 다니셨고, 시차 적응이 안 된 새벽이면 남몰래 침대에 무릎 꿇고 조용히 말씀을 읽으셨다. 나중에 남자친구가 그 모습을 보고 감동했다고 이야기해 줬다. 그 장면은 아직도 그의 기억에 깊이 남아 있는 듯하다.


아씨시에서 우리는 특별한 무언가를 하진 않았다. 성당에 가고, 미사를 드리고, 조용한 골목길을 산책했다. 엄마와 손을 잡고 올리브 나무가 우거진 돌길을 걸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당시 엄마는 개인적으로 힘든 일이 있었다. 그 일을 잠시 잊고 싶어 나를 찾아오셨다고 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엄마가 그 시기에 얼마나 힘들었을까. 늘 단단하고 흔들림 없던 엄마였기에, 그런 이야기를 내게 꺼낸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을지… 이제는 나도 조금 나이가 들어, 그때 엄마의 마음을 아주 조금은 이해하게 된 것 같다.


아씨시에서 로마로 돌아가 독일로 향하는 비행기를 타야 하는 날이었다. 나는 여유롭게 씻고 있었고, 기차는 오전 10시 51분 출발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런데 티켓을 다시 자세히 보니, 출발 시간이 10시 15분이었다. 순간 당황한 나는 큰 소리로 엄마와 남자친구를 불렀고, “지금 당장 나가야 해!”라고 소리쳤다. 그 기차를 놓치면 로마에 늦게 도착하게 되고, 비행기를 놓치게 되며, 독일로 돌아갈 수 없게 되는 상황이었다. 우리는 허겁지겁 짐을 챙기고, 수녀님들께 급하게 인사만 드린 채 기차역으로 뛰었다. 엄마는 평소 다리가 아프셔서 잘 뛰지 못하셨는데, 그날은 어디서 그런 힘이 났는지 정말 열심히 뛰셨다. 속으로는 얼마나 미안했는지 모른다. 그런데도 엄마는 짜증 한 번 내지 않으셨다. 기차역에 도착한 후, 엄마는 “정말 오랜만에 이렇게 뛰어봤네” 하며 웃으셨다. 다행히 기차는 조금 연착되어 우리는 무사히 탈 수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기차가 중간에 갑자기 멈추더니 한참을 움직이지 않는 것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불안감이 밀려왔다. 결국 기차가 고장 났다며 전 승객에게 하차하라는 안내가 나왔다. 우리는 다음 기차로 옮겨 탔지만, 기차 안은 발 디딜 틈 없이 사람들로 가득 찼다. 복도를 지나가기도 어려웠지만, 제시간에 도착만 한다면 아무 상관없었다. 그러나 이 기차도 지연되고, 각 정거장에서의 정차 시간도 이상하게 길었다. 나와 남자친구는 속이 타들어 갔다. 결국 우리는 도중에 내려서 택시를 타기로 했다. 비록 비용이 많이 들더라도, 이대로 가다간 정말 비행기를 놓칠 것 같았다. 우리는 택시 기사에게 반드시 정해진 시간 안에 공항에 도착해야 한다고 간절히 부탁했고, 기사님은 정말 전속력으로 우리를 데려다주셨다.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우리는 감사하다는 인사도 채 마치지 못한 채, 게이트까지 또 한 번 전력 질주했다. 다행히 비행기도 약간 지연되어 겨우 탑승할 수 있었다.


비행기에 올라타자, 엄마와 남자친구는 이제 정말 됐다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그때, 나에게 문제가 생겼다. 나는 원래 비행기 공포증이 있었고, 폐쇄된 공간에 있을 때 가끔씩 공황 증상이 나타나곤 했다. 그리고 마침 그 순간, 공황이 찾아왔다. 숨이 막히고 가슴이 답답해지면서 눈물이 났다. 엄마에게 “엄마, 나 이 비행기에서 내리면 안 돼? 아직 출발 안 했잖아” 하며 울먹였다. 엄마는 내 손을 꼭 잡으며 “괜찮아, 아무 일도 없을 거야” 하고 조용히 다독여주셨다. 엄마의 따뜻한 손길에 마음이 조금씩 진정되기 시작했고, 그제야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나는 엄마 손을 잡고, 처음 공황이 왔을 때의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1시간 반 남짓한 비행시간 내내, 나는 엄마 손을 꼭 잡은 채로 울며 이야기를 했다. 남자친구는 그 사이 아무것도 모른 채 옆에서 푹 잠들어 있었다. 착륙 직전에서야 잠에서 깬 그는, 내가 울고 있는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리고 곧 내 이야기를 엄마와 함께 조용히 들어주었다. 지금의 남편은 그때 일을 아직도 기억하며 “눈물의 비행기 사건”이라고 부르곤 한다.


엄마와 함께한 아씨시에서의 시간들, 그리고 여행 중 벌어진 여러 사건들은 지금까지도 내게 따뜻한 추억으로 남아 있다. 엄마와 함께 아씨시를 걸을 수 있어서, 엄마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서, 내 마음을 엄마에게 털어놓을 수 있어서, 정말 행복한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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