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불 님, 오랜만에 연락드리네요. 잘 지내셨어요?"
설거지를 하다가 후다닥 급하게 받은 전화였다. 발신인은 옛 직장동료 K. 10년 전 같은 부서에서 일하면서 알게 된 후로 '특별한 일'이 있을 때만 연락을 해오는 인물이다.
"아... 네네, 잘 지내시죠?"
"저야 늘 그렇죠 뭐. 잘 지내시는지 궁금해서 연락드렸어요."
그래, 서론은 그만하면 됐으니 본론을 말하렴.
"파란불 님, 퇴사하셨다면서요? 저는 이제야 알았지 뭐예요."
그렇다. K는 '이직' 이슈가 있을 때만 연락을 한다. 그게 내 이직이든 본인의 이직이든. 재밌는 건, 그 외에는 1년이 가도 문자 하나, 전화 한 번 없다는 것. 도대체 내 소식은 어디에서 듣는 걸까.
"네, 그렇게 됐어요. 좀 쉬려고요."
"그 회사가 좀 빡세긴 하죠, 다들 실력도 좋고 업무 퀄리티도 높고... 솔직히 그 회사로 옮기셨다는 거 듣고 좀 놀랐거든요. 역시 이직운이 좋으시다고 느꼈어요."
"아, 정말요? 그랬음 진작 얘기 좀 해주시지. 가보니까 제가 일할 깜냥이 안 되더라고요 진짜."
"그래도 금방 다른 곳 가실 수 있을 거예요. 참, 저도 얼마 전에 이직했어요."
"아, 그러셨구나."
내 퇴사 소식에 연락한 줄 알았는데, 본론이 두 개였네?
"아시겠지만, 저희 남편이 페이퍼 진짜 잘 쓰잖아요. 자기소개서랑 직무계획서는 남편이 봐줬고요, 면접은... 아시죠? 저 면접은 백전무패인 거."
"그럼요. 알죠 알죠."
"이번에도 저희 부부 콤비 플레이가 먹힌 것 같아요. 직급을 올려서 오긴 했는데 연봉은 별로 안 올라서 속상하네요."
"그러셨구나. 암튼 축하드려요, 정말."
"고마워요. 왠지 파란불 님한테는 알려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그 뒤로는 늘 그래왔듯이 시답잖은 이야기를 영혼 없이 몇 마디 나누고 통화가 끝났다. 전화를 끊고 나서 통화목록을 보니 바로 전 연락했던 게 2022년. K가 전 직장으로 이직했던 때였다. 그는 왜 잊을만하면 연락을 하는 걸까.
처음엔 자신의 소속을 업데이트해주십사 주변인들에게 돌리는 통상적인 연락이라고 생각했다. 서로 업무 영역이 달라서 도움을 주고받을 일은 없겠지만, 연락처에 있으니 나에게도 전화를 하는 그런 거라고.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K를 알고 있는 지인들에게 물어보니 연락을 받는 건 나뿐. 왜지? 같이 일하는 동안 많이 가까웠던 것도 아닌데, 도대체 왜.
아마도 K는 내가 정말 '착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K와 같이 일하던 시기에 나는 사회생활의 가면을 진짜 내 얼굴인양 쓰고 다녔으니까. 특히나 동료들에게는 '푸념 잘 들어주고 응원해 주는 언니'로 완벽하게 이미지를 만들어놓았었는데, 다들 치열한 경쟁 속에 서로 눈치보기 바빴던 터라 그런 내 캐릭터가 특별하게 느껴졌을 수도 있다. 툭툭 잽을 날려도 맞받아치지 않고, 어디서 맞고 와서 징징거려도 토닥여주는 좋은 사람. 직설적인 탓에 당시에도 적이 많은 편이었던 K는 나를 그런 사람으로 줄곧 생각하고 있는 게 아닐까. 그렇다면 곤란한데.
저기... K님, 혹시 제가 아직도 착한 사람으로 보이시나요? 그렇다면 정말 미안한데, 다른 분 알아보시겠어요? 저도 때리면 아프고, 긁으면 긁혀요. 남 잘되면 배 아프고, 못되면 꼬숩다 싶고 그래요. 10년간 계속 복통을 강요하고 계시는데요, 이젠 복통보다 두통이 먼저 올 것 같아서 더는 안 될 것 같아요. 어디에서 얼마 받으며 어떻게 일하시는지 안 궁금해요. 제 일도 궁금해하지 않아 주셔도 돼요. 조용히 수신차단 드립니다. 잘 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