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여명 Dec 18. 2020

넥카라 유목민의 모험

열흘이 10년처럼 느껴지는 기적

여명이는 아직 크게 아파본 적은 없다. 다만, 여명이가 집고양이로 살아가기 위해 가장 중요한 과업이라고 할 수 있을 중성화 수술은 6개월쯤 겪었다. 초보 보호자였던 나는 수술이 끝나면 끝인 줄 알았다. 그게 큰 오해라는 건 수술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자마자 깨달았다. 10분 남짓이었을 중성화 수술은 수술 그 자체보다 전과 후가 훨씬 고된 과정이라는 걸 체감할 수 있었다. 아무래도 원치 않았던 수술로 불편을 겪었을 여명이가 제일 고통스러웠겠지만, 집사에게도 쉽지만은 않은 일이었다. 수술 후 실밥을 풀 때까지의 10일 동안이 단언컨대 우리 둘에게 가장 빡센 시간이었다.

지금보다 더 아기 시절에 털이 푸석푸석하던 여명이가 윤기 좔좔 흐르는 털을 가지게 된 것에 내 역할도 적잖게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모든 건 여명이가 그루밍을 잘했기 때문이었다. 고양이가 있는 집인데도 냄새가 별로 안나는 것도 내가 환기를 잘하고 여명이 화장실을 잘 치웠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여명이가 모래로 변을 잘 묻었고, 그루밍을 잘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여명이한테 굉장히 많은 시간을 쏟으며 지켜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절대 아니었다. 그동안 여명이는 진짜 혼자서 잘 알아서 하는 고양이였다. 이걸 여명이에게 넥카라를 씌운 뒤에 알았다.

우리를 가장 고통스럽게 만들었던 건 화장실이었다. 넥카라 때문에 바로 앞이 안 보이게 된 여명이는 화장실에서 평소처럼 변을 묻을 수가 없었다. 화장실 밖으로 나와서 보면 하나도 안 묻혀있는 자기 변을 보고 놀라서 다시 들어가서 다시 엄한 데 모래를 쌓아 올리는 과정을 하루에도 수 차례 반복했다. 얼마나 힘차게 모래를 차는지 화장실 밖으로 모래가 다 넘어왔다. 여명이가 화장실만 한 번 갔다 하면 내 작은 방이 와이키키 해변 같아졌다. 넥카라로 스트레스받는 애한테 청소기 스트레스까지 더하고 싶지는 않아서 청소기 돌리는 횟수도 하루에 두 번으로 제한했더니, 나는 하루 종일 빗자루를 손에서 놓을 수가 없었다. 청소는 차라리 쉬웠다. 화장실 다녀오면 환부 소독을 해주는 게 좋다는 선생님 말씀을 듣고 나서, 여명이가 화장실에서 나올 때마다 나는 소독약을 들고 대기했다.

지금 생각하니 여명이는 넥카라 때문에도 스트레스를 받았겠지만 유별난 임보 누나 때문에 더 스트레스였을 것 같다. 닷새쯤 지나고 나서는 내가 바로 지척에 있을 때는 넥카라를 아주 잠시 풀어주기도 했다. 앞발이나 목 주변이라도 그루밍을 잠깐씩 할 수 있도록 풀어줬다가, 뒷다리 쪽으로 시선만 줘도 다시 넥카라를 씌웠다. 여명이도 그랬겠지만 나에게도 수술 후 회복하는 그 열흘이 10년처럼 길었다. 이러나저러나 불편하기는 마찬가지였겠지만, 나는 여명이가 조금이라도 덜 불편하게 느낄 넥카라를 찾아주려고 노력했다. 여명이는 수술 후 회복 기간 동안 세 종류의 넥카라를 착용했었다.


1. 플라스틱 넥카라

장점: 절대 그루밍을 할 수 없고, 벗을 수도 없다.

단점: 가장 불편하다.

장점이 굉장히 확고한 넥카라지만 단점이 너무나 치명적이었다. 수술을 끝내고 돌아온 첫날 여기저기 부딪히는 모습을 보고 마음이 안 좋아서 이건 거의 사용하지 않았었다.


2. 행주 넥카라

장점: 비교적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고, 가볍다. 가격이 아주 저렴하다.

단점: 화장실에 다녀오면 쉽게 더러워지고, 목주변이 잘 늘어난다. 자주 갈아줘야 한다.

여명이가 활동하기에 가장 편안하게 느끼는 것 같았던 넥카라는 바로 행주 넥카라였다. 저걸 씌워준 순간부터 여명이는 치타처럼 날아다니기 시작했다. 플라스틱 넥카라를 끼고는 잠투정도 심했는데, 행주를 쓰고 나서부터는 잠도 아주 잘 잤다. 다만, 화장실에서 자칫 뭔가(!)를 묻혀서 나올 수도 있고, 물 먹을 때 쉽게 젖었다. 그리고 목 주변이 생각보다 잘 늘어나는데, 많이 늘어나면 쉽게 벗을 수 있어서 자주 새 걸로 갈아줘야 했다. 그리고 행주 부분을 그루밍할 때마다 여명이가 먼지를 먹는 느낌이었다.


3. 도넛 넥카라

장점: 도넛 부분을 베고 잘 정도로 편안하다. 목 주변에 맞게 크기 조절을 할 수 있다.

단점: (개인적으로) 목에 맞게 줄을 조이기가 어렵다. 벗을 수도 있다. 가격이 비교적 비싸다.

사실 행주 넥카라를 하기 전에 도넛 넥카라를 했으면 여명이가 더 쉽게 적응했을지도 모르겠는데, 이미 행주의 맛을 알아버려서 여명이는 도넛에 쉽게 적응을 못했다. 씌워 놓으면 그걸 베고 잘 정도로 편안해하는가 싶다가도, 갑자기 깨닫기라도 한 것처럼 몸을 흔들면서 벗기도 했다. 그래서 도넛은 내가 깨어있을 때만 가끔 착용했다. 한밤 중에 도넛 넥카라를 벗고 나를 내려다보던 여명이 눈빛 잊지모대... 정말로 식겁했다. 그 밤중에 벌떡 일어나서 수술 부위 확인하고, 행주를 급히 잘라서 넥카라를 만들어주고 나서 다시 잤었다.


세 가지 넥카라를 모두 사용해본 결과, 행주 넥카라 만족도가 가장 높았다. 여명이가 활동하는 모습을 봐도 행주가 가장 편해 보였다. 도넛 넥카라도 처음부터 사용해서 적응을 했으면 또 어땠을지 모르겠지만, 이미 행주에 적응을 한 뒤라서 여명이가 좀 불편해하는 느낌이었다. 싸지도 않은데 괜히 샀다고 후회했을 정도로 여명이는 행주 넥카라 의존도가 높았다. 도넛 넥카라를 사용할 거였으면 수술하기 전에 미리 주문을 해놓을 걸 그랬다고 후회했다. 그때는 하루하루 지옥훈련 같더니 다 지나고 나니 기억이 미화되는지, 다양한 색깔의 행주를 찰떡같이 소화해내던 톤 파괴자 여명이의 귀여움만 떠오른다. 수술도 씩씩하게 잘 받고, 건강하게 잘 회복해줘서 빈땅콩으로 우당탕탕 잘 지내주는 그저 여명이한테 고맙다.



 

이전 10화 집사 누나 24시간 관찰일기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