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살던 동네는 아직 아스팔트 도로가 깔리지 않아 차들이 지나다니면 흙먼지가 풀풀 날렸다.
요즘은 초등학교가 대부분 집 근거리에 배정되도록 되어있어서 아이들이 길어도 10분 거리에서 통학이 가능한 경우가 많다.
하지만 내가 학교를 입학할 무렵은 동네 일대가 면적으로는 엄청 넓었지만 인구가 밀집되지 않아 학교가 딱 하나뿐이었기 때문에 통학하려면 먼 길을 가야 했다.
지금으로 따지면 5~6코스 정도 되는 거리인 듯하다.
그나마 원래 살던 집에서 학교 통학을 위해서 조금 가까이 이사를 한 것이 저 정도 거리였다.
난 그 먼 거리를 어떻게 혼자 오가면서 통학을 한 것일까?
당시 국민학교 2학년이던 나는 엄마에게 왕복 차비로 100원을 얻어서 버스로 씩씩하게 등하교를 했다.
그렇지만 학교를 다니면 준비물도 필요하고, 아이들과 친해지면 하굣길에 마주쳤던 이런저런 군것질거리에도 눈길이 가게 마련.
어린 나는 핫도그 리어카 앞에서 수도 없이 생각하고 갈등하다, 결국 친구들 먹는 모습에 주머니에 있던 50원을 꺼내어 핫도그와 바꾸고 만다.
새끼손가락 크기밖에 안되던 붉은 소시지까지 도달하려면 두툼한 2중 밀가루 반죽 빵을 다 뜯어먹어야만 하는, 사실은 밀가루 튀김이었던 핫도그였지만 버스를 포기할 만큼 나에게는 큰 유혹이었다.
개선장군처럼 한 손에는 제 팔뚝만 한 핫도그를 쥐고, 한 손에는 신발주머니를 흔들며 미나리밭 고랑 사이를 지나치고, 흙먼지가 연신 날아오르는 차도 옆을 아슬아슬하게 걸어서 집으로 향하고는 했다.
조그마한 몸집에 젠 걸음으로 총총 잘도 걸어 다녔다.
그 무렵은 이사간지 얼마 되지 않아 동네가 낯설었다.
아는 사람도 없고, 그냥 마을 어귀에 붙어있는 작은 점빵에서 이런저런 물건들을 구경하는 것으로 나의 허기진 욕망이 채워지곤 했었다.
그렇게 나는 학교를 다니고, 엄마는 동네 이웃들과 조금씩 얼굴을 알아갈 때쯤 동네에 또래 친구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교성이 있거나, 활달한 성격도 아닌데 아는 사람이 없다는 건 싫었나 보다.
무슨 용기인지 무작정 한 친구 집으로 찾아가서는 통성명을 하고, 나와 같은 학교, 같은 학년이었던 그 아이와 그렇게 친구가 되었다.
한참 학교를 다니던 3학년 어느 날, 나이 많은 할머니 담임 선생님이 시킨 화이트 심부름으로 이 반, 저 반을 돌아다니며 선생님들께 화이트 부탁을 드렸고, 뿌듯한 마음으로 받아간 화이트는 안타깝게도 담임 선생님이 원한 결과물이 아니었다.
그 화이트는 흰색 분필을 말하는 것임을 갖다 드리고 나서 알게 되었고, 내가 잘못한 일이 아님에도 왜 이걸 가져왔느냐는 꾸지람에 긴장으로 어떤 말도 못 했었다.
부모님께도 당연히 말하지 못하고, 혼자 울고 삭혔지만, 결국 그 말 못 함이 나의 성적표에 고집이 세다는 결과로 적혀 돌아온 일이 학교에서 첫 번째로 상처 받은 일이 되었다.
4학년 때는 담임 선생님이 우리 반에서 조금 유복한 아이 한 명만 편애하고, 나머지는 대놓고 무시했던 일.
촌지가 횡횡했던 때라 학교에서 몰래 찔러준 돈을 받던 선생님들 때문에 뭐라도 줘야 하는 눈치에 우리 집에서는 비싸서 쓰지도 못하던 갑 티슈를 하나 사서 교무실로 갖다 드렸던 사라졌으면 하는 기억들.
그런 상처들은 한 번씩 버스비를 포기하면서, 어떤 날은 핫도그로 주린 배를 잔뜩 채우기도 하고, 어떤 날은 쪽자(뽑기 혹은 달고나로도 명칭)에 매달려 토끼, 별, 하트 등을 안 부수고 해내려고 집중하느라 시간 가는 줄을 모르고, 추운 날 등장한 어묵과 어묵 국물에 몸을 녹이고는 친구와 나란히 걸어서 집으로 돌아오는 것으로 작은 가슴에 난 상처를 다독였다.
그렇게 작은 즐거움과 위안들이 나를 하루하루 성장시키고 있었다.
다행인 것은 한동네 함께 살았던, 나처럼 혹은 나만큼 부모님의 삶이 고단했던 아이들이 많이 살았던 곳이라 생채기를 좀 덜 입고 자랐다.
만약 같이 핫도그를 먹고 나만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가는 일이 반복됐다면, 동네에 왁자하게 같이 어울려 진돌과 숨바꼭질을 해줄 친구들이 없었더라면, 뒷산에 모두 함께 산딸기를 따고 놀며 뱀을 만날까 두려워했던 우리들이 없었더라면, 나는 마음이 아픈 사람으로 자랐을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