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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낮에 뜨는 별 Daystar Aug 16. 2020

조종사란 꿈

기억을 거슬러...

오랜만에 꿀잠을 잤다. 에어컨을 밤새 틀었다. 에어컨 없이 잠을 자기가 날이 갈수록 어려워진다. 올해는 유독 덥다. 매체에선 100년 만에 최고로 덥다는 뉴스가 연일 보도된다. 이제는 ‘100년 만에’라는 말도 무색할 만큼 매년 갱신이다. 커튼을 열고 하늘을 본다. 파란 하늘에 하얀 뭉게구름이 띄엄띄엄 솟아있다. 파란색과 하얀색.. 참 잘 어울리는 조합이다. 동심을 자극한다. 문득 하늘을 보며 꿈을 키웠던 학창 시절이 생각난다.






‘장래 희망 조종사’

새 학년이 시작될 때마다 ‘장래 희망’을 적었다. 나의 장래 희망은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줄곧 ‘조종사’였다. ‘조종사’라는 직업을 알기 전까진 구체적인 꿈이 없었는데, ‘과학자’, ‘의사’, ‘경찰’, ‘선생님’ 심지어 ‘대통령’까지, 매년 아니 매 학기 바뀌었던 것 같다. 그러던 어느 날, MBC에서 ‘파일럿’이라는 드라마를 방송하기 시작했다. 세상에 이렇게 멋있는 직업이 없었다. 매주 드라마를 보면서 ‘나도 조종사가 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계속했던 것 같다. 공부도 잘해야 할 것 같고, 신체도 건강해야 할 것 같고, 체력도 좋아야 할 것 같고, 외모도 잘 생겨야 하는 것 같았다. 부모님께 조종사가 되고 싶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참았다. 괜히 드라마 보고 겉멋 들었다는 타박을 듣기 싫었다. 정보가 필요했다. 정보를 구해서 나를 따져보고 확신을 갖고 싶었다. 요즘 시대라면 바로 인터넷을 켜고 조종사에 대한 정보를 찾아볼 테지만 그 당시 90년대 초에는 정보를 구할 방법이 없었다. 더구나 나는 지방에 살았기에 주변에는 조종사는커녕 항공사에 근무하는 사람들도 없었고, 심지어 비행기를 타 본 사람도 거의 없었다. 그만큼 나에게 조종사라는 직업은 딴 세상 이야기 같았다.






고등학교 3학년이 되었다. 1학기가 끝나갈 무렵, 야간 자율 학습을 하고 있었는데 선생님이 날 교실 밖으로 부르셨다.


“졸업한 선배가 찾아왔으니 만나 보거라.”


1층으로 내려가 보니, 짧은 머리에 감색 정복을 입은 건장한 남자 한 명이 서 있었다. 공군 사관학교에 재학 중인 졸업생 선배였다. 후배들에게 공군 사관학교에 대한 정보를 주기 위해 방문한 것이었다. 선배는 공군 사관학교 입학 방법부터 사관학교 생활에 대한 이야기, 졸업 후 진로에 대한 이야기까지 많은 정보를 제공해주었다. 그중에서 나에게 가장 중요했던 정보는 공군 사관학교에 입학하는 방법이었고, 그것의 핵심은 크게 학업, 신체, 체력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었다. 자신감이 생겼다. 남은 한 학기만 잘 보내면 공군 사관학교에 무난히 입학할 수 있을 것 같았고, 조종사가 되는 것은 시간문제라 생각했다. 며칠 뒤, 공군 사관학교에 지원서를 제출했고, 1차 학생부 평가를 통과했다. 그리고 신체검사와 체력 측정을 위해 청주에 있는 공군 사관학교에 방문하라는 통보를 받았다.






신체검사가 아침 일찍부터 시작되는 일정이기에 부모님과 나는 신체검사 전날 청주에 도착했다. 저녁을 먹고, 숙소를 잡아 한 방에서 잠을 잤다. 부모님과 한 방에서 잠을 자는 게 무척 오랜만이었다. 어색했다. 잠에 들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는데, 이런저런 생각하며 뒤척이다가 한 시간쯤 지나서야 잠이 들었던 것 같다.






신체검사 병원은 무지 컸다. 깨끗하고, 크고, 복잡했다. 지원자들은 각자 번호를 부여받고, 앞사람을 따라 순서대로 진료과를 돌며 검사를 받았다. 다들 낯설어했고, 초조해했다. 그 모습들이 이상했다. 각자 치명적인 신체적 결함(?) 하나씩을 숨기고 있는 것 같았고, 혹시라도 그것을 의사에게 들킬까 봐 조마조마해하는 듯했다. 시력 측정 전에는 입으로 중얼중얼 시력판을 외우는 지원자도 있었다. 적응이 안됐다. 지원자들의 당당하지 못한 모습이 사관생도의 모습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나의 간절함이 그들보다 부족했던 것일까… 갑자기 이 길에 대한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신체검사를 마친 지원자들이 모두 강당에 집결했다. 강당 앞에는 열 명 가량의 군의관들이 모여 있었고, 그들은 지원자들에게 단체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신체검사에서 발견할 수 없었던 질환이나 알레르기 등을 파악하는 것이었다. 그저 형식적인 절차인 것처럼 보였고, 몇 가지 질문들이 지나갔다. 그러던 중 어느 군의관이 질문했다.


“아토피 피부 손 들어보세요.”


난 주저 없이 손을 들었다. 내가 손을 들자 눈치를 보던 지원자들 몇 명도 손을 들었다. 피부과 전공으로 보이는 한 군의관이 내게 다가와서 팔꿈치를 쓱 보더니 종이에 뭔가를 적었다. 예감이 안 좋았다. 하지만 개의치 않았다. 난 아토피가 심하진 않았지만 어쨌든 있었다. 그래서 손을 들었다. 그뿐이다.






신체검사 결과가 나오는 데 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불합격이었다. 아토피 피부가 있는 사람은 장교가 될 수 없다고 했다. 충격을 받았을 법도 한데, 이상하게도 덤덤했다. 오늘 신체검사에서 불합격했기 때문에 내일 체력 검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강당에서 나와 부모님이 기다리고 계신 주차장으로 걸어가는데 기분이 이상했다. 그토록 바라왔던 시험에서 떨어진 것이지만 슬프지 않았다. 오히려 나는 슬프지 않은데 내가 상처 받을까 봐 가슴 졸이실 부모님이 걱정됐다. 차 밖에서 부모님이 기다리고 계셨다.


“신체검사 떨어졌어요. 집에 가도 될 것 같아요.”


신체검사에서 떨어진 이유에 대해 간단히 말씀드리고 집으로 향했다. 창 밖에는 어느덧 해가 지고 있었다. 갑자기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소리없는 눈물. 왜 였을까... 난 아직도 그 눈물의 의미를 모르겠다.


1993년 방영된 MBC 드라마 ‘파일럿’. 드라마는 물론 주제가도 큰 인기를 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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