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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낮에 뜨는 별 Daystar Apr 18. 2021

슬기로운 라인생활

부기장의 미덕(feat. 풍자와 해학)

열심히 노력해’’ 안 되는 이가 있는 반면, 열심히 노력해’’ 안 되는 이도 있다. 오늘 이야기는 후자에 해당하는 이야기다. 얼마나 억울했으면 6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 기억이 생생한지 이곳에 한번 그 억울함을 풀어 놓기로 한다.






2016년 어느 날. 청주 공항.


“정비사님. 객실 창문 쪽에 불이 안 들어와요. 한번 봐주세요.”


비행 준비를 하던 한 객실승무원이 결함을 발견했다. 보통은 크루들이 비행기에 도착하기 전에 정비사들이 먼저 비행기 상태를 점검한다. 하지만 이 날은 정비사가 놓친 결함을 승무원이 먼저 발견했다. 순서가 맞지 않지만 종종 일어나는 일이다. 인력이 부족한 게 고질적인 원인이기도 하고, 사람이 하는 일이니 실수가 동반되기도 한다.


“접촉 불량인지 천장 쪽에 불이 안 들어오네요. 지금 고치기엔 시간이 부족하고... ‘MEL(Minimum Equipment List : 이륙에 필요한 최소 장비 목록)’ 한번 볼게요.”






얼마의 시간이 지났고, 이제 ‘보딩(Boarding : 승객 탑승)’을 시작해야 되는데, 어찌 된 일인지 정비사가 아직 ‘로그북(Flight and Maintenance Log Book : 비행, 정비 기록 책자)’을 가져오지 않는다. 정비사가 확인한 로그북에 기장이 싸인을 해야 비행을 시작할 수 있다. 조종석에서 기다리던 기장님이 객실로 나가신다.






또 얼마의 시간이 흘렀다. 이번엔 조종석을 나갔던 기장님도 돌아오지 않는다. 이제는 진짜 보딩을 시작해야 된다. 지금 지연되면 오늘 비행들은 줄줄이 지연이다. 간단히 해결될 줄 알았던 일이 이렇게까지 길어지니, 답답한 마음에 직접 ‘MEL’을 꺼내본다.


‘이건 이렇게 되고, 지금은 이런 상황이니.. 이걸 이렇게 적용해서.... 주저리주저리... 이렇게 하면 되겠네? 아니 되는 건가...? 음... 어쨌든 되긴 하는 것 같네.’


아휴... 우리 회사 매뉴얼은 너무 복잡하다. 현장에서 촉각을 다투며 일을 하는 우리에겐 복잡한 생각 없이 결론을 내릴 수 있도록 명확한 매뉴얼이 필요한데, 우리 회사 매뉴얼은 너무 난잡하다. 항공기 제작사인 ‘보잉’에서 발행한 매뉴얼을 그대로 차용해서 사용하다 보니, 현장에선 이런 문제가 발생한다. 원인을 따지자면, 이런 문제 또한 결국 인력 부족에서 발생하는 거다. 시간과 비용을 투자해서 우리 회사 실정에 맞게 매뉴얼을 재발행해야 되는데 회사는... 의지가 없다...


푸념을 늘어놓으며 이번엔 나도 조종석을 떠나 객실로 나간다.  






“기장님. 이거 이렇게 MEL 적용하면 가능하겠는데요?”


기장님이 날 힐끗 한번 보시더니 대답이 없다. 정비사들은 다급하게 회사와 통화를 하고 있고, 승무원들은 입술을 깨물며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다. 지연으로 인한 승객 컴플레인(Complainment)도 걱정이 될 것이고, 결함을 발견한 승무원은 여린 마음에 괜히 말했나 싶기도 했을 거다. 어색한 적막만이 흐르는 묘한 분위기다.


“기장님. 지금 이거요. 여기 MEL 보고 이렇게 하면...”


“휴... 알았으니깐 자네는 그냥 칵핏에 가 있어.”


‘어라? 이게 아닌데?’


알 수 없는 분위기에 어이없는 면박만 당하고 조종석으로 돌아왔다. 다시 한번 MEL을 살피고 있는데 기장님이 들어왔다.






기장님 표정이 심상치 않다. 잔뜩 화가 난 표정인데, 그 화를 꾹꾹 눌러 참는 모습이 표정에 역력하다.


“자네. 자네가 다 책임지려고 그래? 만약에 이거 잘못돼서 우리가 다 덤탱이 쓰면 어떡하려고 그래? 자네가 책임질 수 있어? 지연이 되든 말든 지금 정비사들이 다 알아서 하고 있는데 왜 괜히 나서서 쓸데없는 소리를 하느냔 말이야!”


‘하아... 할 말이 없다. 매뉴얼이 해석하기가 어려워서 그렇지, 어쨌든 간단히 ‘Defer(정비 이월 : 당장 비행에는 문제가 없으나 일정 기간 내에 반드시 고쳐야 함)’ 하면 될 일 아닌가. 왜 여기서 책임 소재를 따지는 건가. 정비사가 해답을 못 찾으면 비행 안 할 건가? 옳고 그름은 상관이 없다는 말인가? 행여 문제가 되더라도(그럴 일도 없다) 처벌받을 일도 아닌데, 회사한테서 쓴소리를 듣느니 차라리 무능한 기장이 되겠다는 건가? 승객들은 한 시간 두 시간 기다려도 상관도 안 하고?’


그냥 입을 닫기로 했다. 기장님은 지금 화가 났다. 조종사가 감정의 영역으로 빠지면 헤어 나올 수 없다. 지금은 내가 어떤 말을 해도 기장님에겐 말대꾸로 들릴 것이다. 어서 기장님을 이성의 영역으로 구출해야 한다. 안전을 위해선 그게 최선이다. 다행히 이런 상황을 대비해 연마해 온 나만의 무기가 있다. 실력을 거침없이 발휘할 때다.






“죄송합니다.”


마법의 한 마디. 조종사라면 안전 비행을 위해 무엇이든 희생해야 한다. 이번엔 나의 자존심이 희생했다. 이내 기장님의 상기된 표정이 눈 녹듯이 사라진다. 온화하기 그지없는 인자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씀을 이어나간다.


“그래 이기장. 자네 말이 맞을 수도 있어. 아니 맞다고 치자고. 그런데 혹시라도 일이 잘못돼서 우리한테 화살이 날아오면 안 되잖아. 자네 이제 기장도 돼야 하는데, 몸 사려야지. 안 그런가?”


“네. 제가 거기까진 생각을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완벽한 두 번의 필살기. 이 다섯 음절 ‘죄송합니다’ 하나만 장착하면 부기장에게 라인생활(에어라인 생활)은 만사형통이다. 숱한 공격에도 이 필살기 하나만 잘 갈고닦으면, 악마 같은 기장도 나를 지켜주는 선한 목자가 된다. 아무리 혈기 왕성하고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부기장이라 하더라도 반드시 이 필살기를 익혀야만 기장이 된다. 나는 비교적 늦게 장착한 편이다. 그래서 괴로움이 많았다.






사회생활 어디라고 다르겠는가. 우리는 다 미생이고, 세상엔 오과장보다 마부장이 더 많은 법이다. 굴욕과 좌절, 풍자와 해학 그 웃어넘김의 차이는 내 마음먹기에 달려있다. 사회를 바꾸는 것보다 나를 바꾸는 게 더 쉽다. 글을 쓰는 지금도 웃음이 나온다. 이것 또한 풍자이며 해학이다.



부기장의 덕목 세 가지 : 기어 올리고, 플랩 올리고, 입은 닥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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