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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낮에 뜨는 별 Daystar Nov 01. 2020

벌거벗은 조종사

자존감도 보상이 되나요

오늘 비행은 총 ‘세 레그(Leg)’로 계획되어 있다. 한번 이륙해서 한번 착륙하는 비행. 즉, 출발지 공항에서 이륙해서 목적지 공항(때로는 목적지 교체 공항)에 착륙하는 한 번의 비행을 ‘한 레그’라고 표현한다. 그런데 굳이 오늘 비행은 ‘세 레그다’가 아닌 ‘세 레그로 계획되어 있다’라고 표현하는 이유는 그 ‘비행 계획’이라는 것이 때로는 ‘날씨, 항공기 상태, NOTAM(NOtice To AirMan : 항공 고시보) 그 외 기타 등등’의 이유에 따라 바뀔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비행 계획’이 바뀌게 되면 세 레그가 두 레그가 되기도 하고, 한 레그가 되기도 하고, 어떤 경우에는 아예 취소가 되기도 한다. 취소가 되는 경우에는 일을 안 하게 되는 것이니.. 좋은 거 아닌가? 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오늘 취소된 비행으로 인해 회사에서는 운항 스케줄을 새롭게 계획하고, 그럼 당연히 승무원 개인의 스케줄도 영향을 받는다. 친구의 결혼식에 못 가게 되고, 병원 진료 예약 등을 미뤄야 한다. 회사는 직원의 편의를 봐주지 않는다.





주기장에 도착하고 엔진을 끈다. 오늘 계획된 비행 세 레그 중 두 레그를 마쳤다. 이제 마지막 한 레그만 더 하면 오늘 임무는 끝이다. 기분 좋게 마지막 레그를 준비하며 ‘목적지 공항의 기상’을 확인하는데 생소한 단어가 보인다.

‘SS’

‘Sand Storm : 모래 폭풍’이다. 아무리 땅덩이가 넓은 대륙이라지만 ‘모래 폭풍’은 처음이다. 거기에다 ‘VRB15G19’ : Variable 15m/s Gust 19m/s’. 방향을 특정할 수 없는 바람이 초당 19미터(38kts/hour)로 불고 있다. 예보에 없던 상황이라 잠시 당황 중인데 핸드폰 벨이 울린다. 회사의 운항관리사로부터 전화가 왔다.

“Hello(여보세요)?”

“Hello Captain. This is a Dispatcher. The weather for the destination is too bad. The departure time is delayed for 2hours. So, we’ve prepared a VIP lounge for you. You can go there and take a rest(기장. 나 운항관리사야. 목적지 공항 기상상태가 너무 나빠서 출발을 일단 2시간 딜레이 시켰어. VIP 라운지 예약해놨으니까 거기 가서 쉬도록 해.).”

“Ok, Thank you. But, I’d like to stay in the airplane. We’ll spend a lot of time for moving there and coming back. It’d be better staying here. Thank you.(그래? 고마워. 그런데 난 그냥 항공기에서 쉬고 싶어. 라운지 왔다 갔다 시간을 너무 많이 허비할 것 같아. 어쨌든 고마워.)”

이렇게 전하고 전화를 끊으려는데 한 객실 승무원이 다가와 간절한 눈빛으로 이야기한다. 라운지에 가고 싶다고.. 승무원들은 오늘 12시간째 근무 중이다. 앞으로 6시간을 더 일해야 한다. ‘맙소사...’

“Oh, hang on. We will go to the lounge. Please prepare a ramp bus. Thank you.(어라? 잠시만. 우리 그냥 라운지로 갈게. 버스 준비시켜줘. 알았지? 고마워.)”





라운지에 도착했다. 한적한 구석 모퉁이에 자리를 잡고 앉으려는데 사복을 입은 한 남자가 다가와 나에게 인사를 한다.

“Hello. Captain?(기장 안녕?)”

‘누구지? 헉...’

회사의 중책을 맡고 있는 기장이다. 실력은 있지만 성격이 불같아서 모두가 꺼려하는 사람이다. 휴가를 마치고 베이스로 복귀하는 길인데, 내 비행기를 타게 되었다고 한다.

‘쉬려고 왔는데 이게 무슨 일이야... 불편한 상황이 됐네...’

나와 임원 기장, 선임 부기장, 막내 부기장 이렇게 네 명이 한 테이블에 둘러앉았다. 난 그냥 없는 사람 셈 치고 쉬려고 하는데, 셋이서 중국어로 대화를 하는 와중에 선임 부기장의 표정이 심각하다. 임원 기장은 회사로부터 온 듯한 전화를 받기도 하고 뭔가 분주해 보인다. 대화 도중에 내 이름이 나오는 듯하여 신경이 쓰이지만 무시하기로 하고 계속해서 휴식을 취하려 노력한다. 필요하면 말을 걸겠지...






2시간이 지나고, 다시 비행기로 돌아왔다. 여전히 목적지 공항의 기상은 좋지 않다. 다행히 모래 폭풍은 지나간 듯 하지만 바람은 여전히 세다. 승무원들에게 날씨 상황을 전달하고, ‘Cockpit Setup(조종석 비행 준비)’을 하고, 승객들을 태우고 목적지를 향해 이륙한다.


목적지 공항에 도달했다. 여전히 바람이 세다. 랜딩 직전까지 바람 데이터를 유심히 관찰하여 제한치를 초과하면 과감히 ‘Go around(복행, 착륙 단념)’를 하는 것으로 부기장과 이야기를 하고 접근을 시작한다. 모래 폭풍은 지나갔지만 여전히 바람이 세고, 공기 중에 남아있던 차가운 수증기가 응결하여 시정이 나빠졌다. 할 수 없이 ‘Engine Anti Ice(엔진의 동결을 막는 장치)’를 켜고 접근을 한다. 이 기능을 켜면 운용할 수 있는 항공기 속도의 범위가 좁아져 조종하는 데 매우 까다롭다. 최대한 정신을 가다듬어 조종에 집중한다. 이렇게 바람이 심하게 부는 날에는 ‘Auto Landing(자동 착륙)’이 불가능하다. 조종사가 온전히 수동으로 항공기를 조작하여 착륙을 해야 하는데, 이때 조종사가 받는 순간 스트레스는 인간이 일상에서 겪는 스트레스 중에 가장(?) 높다고 한다.

‘왜 하필이면 이런 거지 같은 날에.. 어?!~ 파워!!! 어라? 바람이 항공기를 위로 치네.. Aiming Point(목측) 잡고.. 바람 방향 바뀐다!! 속력 줄어든다. N1이 적네? 파워 좀 더 넣고.. 500ft.. Check! 자세 살짝 내리고... Down Trim 살짝... Center Line... 집중... 아이씨.... 옆으로 밀린다..’

나도 모르게 이런 말들을 중얼거린다. 목이 뻐근해지고, 어깨가 무거워지고, 눈에도 힘이 들어가고, 낮고 빠르게 욕도 내뱉는다.

‘50. 40. 30. 20.. 10... 5..... 쿵’

착륙했다. 활주로 ‘Touch down zone(착륙 안전 지대)’ 중간 지점에 안전하게 잘 내렸다. ‘Engine Reverser(엔진 역추진 장치)’도 부드럽게 전개하고, 활주로가 젖어 있으니 ‘Auto Brake(자동 브레이크)’도 최대한 활용하고...






게이트에 항공기를 정박하고 엔진을 끈다.

“Shut down Check-list”

휴... 이렇게 오늘 비행은 종료다. 남은 연료를 확인하고, 헤드셋을 정리하는데 부기장이 무척이나 기쁜 표정으로 나의 랜딩을 칭찬한다. 랜딩 직전에 속도가 줄어들 것 같았는데 줄지 않고 유지가 됐다느니, 강하율이 일정했다느니, 플레어가 적당한 시기에 시작됐다느니, 파워 조절이 좋았다느니... 어떻게 이런 날씨에 자신 있게 랜딩을 할 수 있냐는 질문까지. 마치 자기가 랜딩을 한 것처럼 좋아한다.

“Umm... I think.. it just comes from experience.(글쎄... 그냥 이것저것 경험하다 보니 되는 것 같은데?)”

난 교관도 아니고, 회사의 중책도 아니고 그저 나에게 주어진 비행을 안전하게 마치는 임무를 가진 일개 기장일 뿐이다. 사실 이렇게 얼버무리는 가장 큰 이유는, 나 스스로 부기장에게 이것저것 가르칠 실력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엔 느낌이 좀 이상하다. 부기장이 너무 오버하며 좋아한다.

“Anyway, why are you so happy like that? Any reason with you?(근데 말이야... 너 왜 이렇게 좋아해? 무슨 일 있어?)”

“Oh... Captain.. Umm... The truth is...... Back then.. when we were at the lounge... Blah Blah.......(오... 기장.. 음... 사실은... 우리 아까 라운지에 있을 때 말이야... 주저리주저리.......)”

음... 자존심이 상한다. 이런 처우를 받으며 이 회사에 계속 다녀야 하나.. 자괴감이 든다. 부기장이 말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기장.. 사실은 아까 우리 라운지에 있었을 때 말이야. 회사에서 전화가 왔어. 목적지 공항 날씨가 안 좋으니 기장을 바꾸는 게 어떻겠냐고... 마침 휴가 복귀하는 임원 기장이 승객으로 타게 되어 있으니 그 기장한테 비행을 하라는 거지.. 그런데 그 임원 기장이 거절했어. 우리는 우리 회사의 기장을 믿어야 한다면서.. 대신 나한테 이번 비행에 대해 철저히 Monitor(감시)를 하고, 착륙 후 보고를 하라고 하더라고. 그래서 마음이 불편했는데 이렇게 아무 문제없이 비행을 마쳐서 정말 다행이야.”





이곳에서 나는 철저히 이방인이다. 몰랐던 것은 아니지만, 그동안 수많은 체크와 검열을 받으며 나름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들은 가끔 선을 넘는다. 임무 직전까지 회사는 나를 믿지 못했고, 찝찝한 상태로 비행기를 띄웠다. 비행 내내 이상하리만큼 불안한 태도를 보였던 부기장.. 그의 눈치를 보며 가시방석에 앉은 채로 불편한 비행을 했던 나..

내 자신이 처량하다. 불쌍하고, 안타깝다. 에어라인 기장이란 게 이런 것인가.. 자존감이 바닥을 친다. 이러다가 나조차도 나 자신을 믿지 못하게 되면 어떻게 될까. 기장으로서 건전한 판단을 할 수 있을까...

생각이 많아지는 밤이다.





PS. ‘야이 씨! 이것도 바람이야? 우리는 하루에도 몇 번씩 제주를 왔다 갔다 했던 사람들이야! 이 정도 바람은 바람도 아니라고! 한국 기장 무시하지 말란 말이야!! 알았어?!!!’


B737NG의 조종석. 조종사의 고민 만큼이나 스위치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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