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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ayworker Mar 12. 2024

왕초보라 불러줘요

추운 겨울 몇 번의 허탕을 친 나는 테니스를 계속해야 하나 고민했다.

마음은 굴뚝같지만 아무도 함께 해주지 않으니 방법도 없었다. 

당시에는 인근에 사설 레슨장도  하나 없었기에 마땅히 시도할 다른 대안도 없었다.


라켓 한번 휘두르지 못한 채 세 번째 허탕을 치고 코트를 나오던 날. 

기분이 잔뜩 상한 나를 보고 누군가 반갑게 인사했다

자세히 보니 초등학생인 아들 녀석의 친구 아빠였다. 동네에서 몇 번 마주쳐 인사를 나눈 적이 있었다.

"OO아빠, 안녕하세요. 테니스 시작하셨나 봐요?"

난 인사를 나눈 뒤 지난 두 달간의 수난기를 그에게 하소연했다.


"아직 초보라 거기서 운동하시기 힘들 거예요. 제가 따로 만든 모임이 있는데 게스트로 초대해 드릴 테니 시간 맞으면 가끔 나와서 함께하시죠"

그들 또한 비슷한 사연을 가진이들이 모여 고민 끝에 별도의 모임을 만들었다고 했다. 다만 참석인원이 많지 않고 코트 확보도 쉽지 않아 이곳저곳을 떠돌며 운동을 한다 했다.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닌 나는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이후 그들 모임에 몇 번을 참석해 함께 운동을 했다. 

즐거웠고 초보인 나를 배려해 줘 감사했지만 약간의 문제가 있었다. 

코트가 충분히 확보되지 않은 탓에 시간을 정확히 맞춰 나가야 했고 때로는 차로 20~30분가량 이동하는 것이 부담스러울 때도 있었다. 모임날짜가 나와 맞지 않는 날도 많았다. 

사람이 부족해 게스트로 초대는 했지만 나의 부족한 실력 때문이었을까? 

그들도 정식 회원가입을 권하지 않았다.


그로부터 한 달쯤 지나 새해가 밝았고 카톡에 알람이 울렸다.


오늘 저녁 강타회 신년모임이 있습니다. 모임장소는 OO삼겹살집입니다.
8시까지 오세요


도대체 어떤 놈들일까? 

코트에 몇 번 나갔었지만 매번 벤치에 앉아있다 돌아온 덕분에 난 이 모임의 전체회원이 몇 명이고 면면히 어찌 생겼는지 알지 못했던 나는 코트밖에서의 그들 모습이 궁금했다.


퇴근하여 동네에 도착할 때쯤 시계는 10시를 가리켰다. 

어쩌면 모임이 끝났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며 약속장소에 들렸다. 다행히 그들은 자리를 지키고 있었고 한동안 얼굴을 보지 못했던 콧수염도 나와 있었다. 

7~8명쯤 모여 앉은 그들은 이미 얼큰하게 취해있었다. 술에 취해서였을까? 

코트에서 냉담했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하나같이 나를 반겨줬다. 

소주가 한잔 들어가자 나는 그간 섭섭했던 마음을 쏟아냈다. 

'아니, 회원 가입을 시켜놓고 엄동설한에 벤치에 몇 시간씩 앉혀만 놓는 경우가 어디 있습니까?'


"우리도 몇 명 안 되는 인원에 실력도 부족해 여기저기 끼여치다 보니 미처 신경을 못썼네. 미안해요. 사실 초보때는 설음도 좀 받고 그러는 거야. 새해에는 진짜 신경 쓸 테니 운동시간에 자주 나와요"

믿음은 안 가지만 저렇게까지 이야기하는데 딱히 더 뭐라 할 말도 없었다.


"알겠습니다. 새해부터 다시 참석할 테니 잘 좀 부탁드립니다."


우리는 2차 장소로 자리를 옮겼다. 생뚱맞게 순두부집이었다.

"올해는 다를 겁니다. 나 한번 믿어봐요 실망하진 않을 겁니다. 허허" 

구석에 앉아있던 S가 말했다.

S는 굵게 주름이 파인 이마에 덩치도 좋아서 흡사 산적처럼 보였는데 올해부터 모임의 신임 총무를 맡았다고 했다. 사실 코트에서 두어 번 마주친 적이 있는 S. 

난 그의 공치는 모습을 본 적은 없지만 한눈에 봐도 초고수의 향기를 풀풀 풍기고 있었다. 

고수가 저렇게까지 이야기하니 없던 믿음이 다시 생기기 시작했다.


"난 마흔일곱인데 나이가 어떻게 돼요?" 

술잔을 주고받다 S가 물었다.

외모만 봤을 때 나보다 5~10살은 많다고 생각했던 이 친구는 나와 동갑이었다.

동갑이라는 나의 대답에 S는 "오... 갑장이네. 우리 친구 하자"라며 반색했다.

기대치도 않았던 동갑내기 고수 친구가 생기다니 마음 한편이 든든해졌다.


그 뒤로 소주잔이 몇 번 더 오갔다.

다들 취해서 집에 가야겠다고 생각할 때쯤이었다.

"어... 그런데 삶은 계란이 테이블에 쌓여있는 거야? 이거 써 비 쓴가?" 

S가 취해서 물었다.


"그거 날달걀이겠지. 여긴 순두부집이라고"


"아니야, 아니야 이거 삶은 계란 맞아! 못 믿겠으면 내가 확인시켜 주겠어!!"

말릴 틈도 없이 S는 계란하나를 집어 들더니 자신의 머리 위로 내리쳤다.

퍽 소리와 함께 터진 노른자가 그의 머리 위로 흘러내렸다.


'뭐지? 저 녀석..... 바본가?' 

사람들은 박장대소하며 웃었지만 내겐 술잔과 함께 쌓아놨던 믿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S는 테이블에 있는 냅킨을 몇 장 뽑아 주섬주섬 흘러내리는 계란물을 닦아내며 알 수 없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다 먼저 가겠다고 자리를 떠버렸다. 옆에 있던 콧수염에게 물었다. 

"저 친구 원래 저럽니까?"

"S형 산적처럼 생겼지만 사람은 착해요. 가끔 저렇게 실없는 행동을 해서 그렇지... 공친 지 일 년쯤 됐는데 운동신경이 둔해서 아마 형님하고 치면 딱 맞을 거예요. 흐흐"


컥. 뭐라고....

 

사진: UnsplashChristian Tengu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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