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엄청난 부자이길 바란 건 처음이다
평소보다 더 서둘러 병원 갈 준비를 했다. 꽉 막히는 도로를 지나 9시 조금 넘어 병원에 도착했고, 내과 과장 선생님과 면담을 했다. 아이의 상태를 설명하고 피 묻은 휴지를 보여주니 방사선이나 약으로 인한 부작용일 수 있다고 했다. 초음파 검사를 추가로 진행하기로 하고 마음을 졸이며 기다리기 시작했다. “OO이 보호자님!”이라며 나를 불렀고 불안한 마음을 꼭 잡은 채 다시 면담을 했다. 다행히 심각한 문제는 아니고 위벽이 조금 부어있는 상태라고 했다. 스테로이드제 등의 부작용이었고 검은색 변도 보기 시작해서 위장 보호제와 간 보호제를 조금 더 늘리는 걸로 일단락을 지었다. 최악의 경우 췌장에 문제가 생길 수 있는데 그런 경우에는 마지막 준비도 해야 했기 때문에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하루가 지나고 또다시 병원. 치료가 끝나고 계산을 하려는데 “보호자님, 혹시 다른 카드 없으세요?”라고 물었다. ‘한도 초과’가 나오면 늘 묻는 그 말. 메인으로 쓰던 카드 한도를 잔뜩 늘려놨었지만 넘쳐나는 병원비에 한도 초과가 되었고 다행히 갖고 있던 다른 서브 카드를 사용해 결제를 했다. 매번 12개월 할부로 결제하는 내가, 그 이후 갚아나갈 걱정을 하는 내가 갑자기 원망스러웠다. 모아둔 돈이 왜 많지 않을까. 왜 회사를 그만뒀을까. 아니야, 회사를 계속 다녔으면 아이와 병원을 올 수 없었겠지. 등등.
돈이 많으면 좋겠다고 막연하게 생각한 적은 많았다. 돈이 행복의 ‘다’는 아니지만, 돈이 있으면 여유는 있을 테니까. 돈이 있다면 걸리는 건 없을 테니까. 사실 돈이 부족하지 않을 만큼 많아본 적은 없어서 그들의 삶은 잘 모르겠다. 다만 적어도 그들을 부러워하며 살아오진 않았다. 그저 남에게 아쉬운 소리 하지 않을 정도로만 돈이 있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돈 같은 물질적인 것에 욕심을 갖지 않았다. 정말 마이너스뿐인 삶을 살아온 적도 있었고, 지금은 먹고 싶은 것이 생겼을 때 먹을 수 있고, 갖고 싶은 게 있을 때는 크게 고민하지 않고 살 수 있을 정도였기에 다 괜찮았다. 이렇게 아이가 아플 줄 알았다면 미리 보험이라도 들어둘 것을, 혹은 적금이라도 들어두었다면 좋았을 텐데,라고 계속 후회가 됐다. 난 후회하는 걸 싫어하는 편이다. 그래, 누가 좋아할 수 있겠어. 다만 후회는 나한테 독이 될 뿐이고, 다시 그 후회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살아가면 된다고 생각했고 그렇게 살아왔다. 이미 지나간 일들을 아파해봤자, 곱씹어봤자 또다시 우울증이 올 것이 뻔했다. 이미 너무나도 힘든 나날들을 보내왔기에 ‘이보다 더 나쁠 순 없겠지. 나아질 거야.’라는 생각을 하며 살아왔다. 다만, 이번 아이의 치료로 병원비가 많이 들고 생활에 영향을 주기 시작하면서 ‘돈’에 대한 욕심이 생겼다. 내가 엄청난 부자이기를 이렇게 바란 적은 처음이었다. 병원비 걱정 없이, 치솟는 기름값 걱정 없이, 치료 이후에 집에 돌아와서 밥 할 걱정 없이, 카드 한도나 통장 잔고를 걱정하지 않을 수 있을 만큼 엄청난 부자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치료가 끝나고 집에 돌아오는 길, 차에서 잘 누워 자던 아이가 몸을 뒤척였다. 지속되는 치료에 힘이 들었던 건지 잠을 자는 것조차 불편해 하기 시작했다. 제대로 눕는 걸 두려워하는 듯 한참을 뒤척이다 등받이에 머리를 기댄 채로 꾸벅꾸벅 졸다가 잠이 든다. 집에 오는 길 내내 나는 불안했다. 아이가 또다시 피를 토할까 봐, 아이가 무슨 일이 생겨버릴까 봐, 내일 결제 시 또 한도 초과가 나올까 봐, 모든 것이 두려웠다. 여전히 일을 해야 한다는 생각과 아이를 병원에 데리고 다녀야 한다는 현실. 이 두 가지가 뫼비우스의 띠처럼 연결되어 답이 없는 고민을 계속했다. 사실 고백하나 하자면, 병원 치료가 끝난 지 2달이 된 지금도 나는 일을 하지 못하고 있다. 즉, 여전히 딜레마에 빠져있는 상황이다.
병원을 갈 때마다, 집에 돌아올 때마다, 약을 먹일 때마다, 잠이 들 때마다, 그리고 잠에서 깨어날 때마다 늘 아이 생각과 돈 생각만 하게 되는 나를 발견했다. 현재 내 삶에 있는 건 오로지 그 둘 뿐이었다. 끝없는 고민을 하며 저녁을 먹고 남편과 술을 한잔 하며 대화를 주고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