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9월 30일
일종의 강박인지, 나는 물건을 잘 못 버리는 편이다. 계곡에서 주워온 돌부터, 15년 전 갔던 박물관의 티켓까지. 일말의 의미만 있다면, 차마 버리지 못하는 것이 내 습관이다. 돌멩이와 티켓과 같은 것들은 기억의 매개체가 된다. 소설 <해리 포터> 에는 ‘펜시브’ 라는 마법 물건이 나온다. 조그마한 샘으로, 마법 지팡이로 관자놀이에서 기억을 꺼내 담그면, 펜시브의 물에 얼굴을 담근 타인에게 그 기억을 보여줄 수 있다. 아쉽게도 돌멩이와 티켓은 타인에게 내 기억을 보여주는 기능은 없다. 그저 그들을 오랜만에 꺼내보며 내 머릿속 깊은 곳에 묻혀 있는 기억의 스택을 위로 몇 계단 올릴 뿐이다.
“결혼식 피로연이 끝난 잔치장의 풍경을 본 적이 있느냐. 술통은 깨져 있고, 탁자들은 널브러져 있으며, 촛대의 불씨는 사그라들고 뻑적지근했던 전날의 난리법석이 고스란히 그 흔적을 남기고 있단다. 하지만 이런 무질서한 자취만을 생각한다면 너는 사랑에 대해 그 아무것도 배울 수 없을 거란다. 현자의 책장을 넘기며 채색된 글자들의 빛에만 눈이 멀어버린 맹인은 결국 책에 담긴 신성한 지혜라는 본질은 보지 못하게 된다. 양초의 본질은 녹아내린 밀랍이 아닌, 촛불이니 말이다.”
좋아하는 책의 한 구절이다. 인생의 본질은 물질적이거나 세속적인 것들이 우리에게 남긴 금은보화나 영광이 아닌, 성취에 상관없이 도전하며 얻은 모든 과정이 곧 본질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나 역시 이에 동의하지만, 그래도, 나는 책의 예쁜 표지와 양초의 밀랍에 집착하곤 한다. 삶이란, 모든 순간이 인상적이고 감동적일 순 없다. 사실 우리에게 주어진 대부분의 시간은 불과 한 달도 안 되어 잊혀지기 마련이고, 우리가 살아온 긴 시간동안 기억하는 건 그 중의 극히 일부분, 아주 강렬했던 기억들 뿐이다. 기억의 순간이 담긴 매개체도 필요 없이 가끔 우리의 마음을 두드리곤 하는 강렬한 기억들.
매 순간은 소중하다고들 하지만, 이미 얘기했던 것처럼 그 모든 순간에 의미를 부여하고 머릿속에 저장할 순 없다. 우선 내 기억력은 그렇게 좋지 않고, 기억과 생각이란 것은 원체 서로 섞이길 좋아하니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종 잊고 싶지 않는 순간들이 생기기 마련이다. 인생의 축을 뒤흔들 만큼 강렬하진 않지만, 꼭 언젠가는 다시 꺼내보고 싶을것만 같은 순간들. 그래서 나는 글을 쓰고, 물건을 간직한다. 그들은 나만 들여다 볼 수 있는 펜시브이니까.
이는 단순히 물질적인 것에만 국한되는 얘기는 아니다. 노래에도 기억이 깃들곤 한다. 누군가에게 있어 수프얀 스티븐스의 <Mystery of Love>는 티모시 샬라메의 성장통이고, 나에게 있어선 초여름의 열기다. 뜨거운 도로에 떨어져 아스팔트 사이로 익으며 스며드는 빗방울의 냄새, 누군가와 함께 누워 듣던 타이어의 마찰음, 함께 보던 여름밤의 별. 이처럼 불특정 다수가 향유하는 음악, 혹은 영화, 티비 프로그램까지. 형체가 없는 것들일지라도 각각의 기억의 매개체로서 사유화되어 우리에게 펜시브로서 작용한다.
상자를 하나 만들었다. 기억의 물건들로 가득 찬 상자들. 기억력이 그다지 좋지 않은 나로서는 이들이 곧 삶의 증거들이다. 한때는 뜨겁게 타올랐던 촛불의 열기들을 담아낸 이 상자를 종종 열어보곤 한다. 돌멩이를 꺼내 어루만지며 돌멩이를 주웠던 오스트리아의 계곡을 떠올린다. 함께 갔던 사람들, 산책하며 마주친 강아지, 숲에서 본 커다란 달팽이까지. 이 작은 탄소와 규소의 덩어리가 그만치나 많은 기억을 불러온다. 이걸 어찌 버리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