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년에서 온 나의 11살 아빠>

제25화 아빠가 된 나를 바라보는 소년

by Wren

​하온의 방은 조운이 살던 세상과 달랐다.
​당연한 것이었다. 37년이 지났으니까. 하지만 막상 들어서니 그 달라짐이 생각보다 훨씬 컸다. 조운은 문 앞에 서서 방 안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책상 위에 무언가가 있었다. 얇고 납작한 것이었다. 빛나고 있었다. 뭔지 몰랐다. 벽에는 흰 상자가 붙어 있었다. 바닥에는 선이 달린 이상한 기계들이 몇 개 있었다. 창문 옆에는 작은 선반이 있고, 그 위에 책들이 꽂혀 있었다. 그것만큼은 알아볼 수 있었다. 책은 1988년에도 책이었다.
​그리고 공책이 있었다.
​책상 위에. 낡은 공책이 펼쳐진 채 놓여 있었다. 조운은 그것을 보는 순간 숨을 참았다. 자신의 공책이었다. 자신이 제기동의 그 좁은 방에서 수십 번 펼쳤던 그 공책이. 여기 있었다. 37년 뒤에. 하온의 방에.
​"야, 저거."
​조운이 말했다.
​"저거 내 거잖아."
​하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내 거이기도 해요. 우리 거예요."
​조운은 잠깐 그 말을 곱씹었다. 우리 거. 그 말이 이상하게 마음에 걸렸다. 좋은 쪽으로.
​방 안이 따뜻했다. 제기동의 방과 달리 바닥이 따뜻했다. 조운은 신발을 벗었다. 발바닥에 온기가 닿았다. 이상하게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참았다. 연탄가스 냄새도 없었다. 습한 냄새도 없었다. 그냥 따뜻하고 건조했다. 이 방에서 태어날 자신의 자식은, 이런 방에서 자랐을 것이었다. 지금 자신의 맞은편에 앉아 있는 이 아이가.
​"앉아도 돼?"
​조운이 물었다.
​"네. 앉으세요."
​조운은 바닥에 앉았다. 무릎을 세우고. 제기동에서도 그렇게 앉았다. 등을 벽에 기댔다.
​하온은 조운의 맞은편에 앉았다.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오래도록. 전등빛이 둘을 비추고 있었다. 창밖에는 눈이 내렸다. 방 안은 조용했다. 안방에서 엄마의 숨소리가 들렸다. 고른 숨소리였다.
​조운이 낮게 물었다. "저거 자는 사람 소리야?"
​하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엄마요."
​"그러면 나한테는."
​조운이 말하다 멈추었다. 그러면 나한테는 뭐지. 하온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수 없었다. 두 사람은 잠깐 그 침묵 안에 있었다. 눈이 내렸다. 방 안이 따뜻했다. 세상에서 가장 이상하고 가장 자연스러운 밤이었다.
​조운이 먼저 하온의 얼굴을 보았다. 코의 모양을 보았다. 눈썹의 각도를 보았다. 입술의 선을 보았다. 손가락의 길이를 보았다. 귀의 위치를 보았다. 그것들이 하나씩 낯설지 않았다. 어딘가 자신의 것들을 닮아 있었다.
​"야."
​조운이 말했다.
​"너, 누구 닮았어?"
​하온은 잠깐 말이 없었다. 그러고는 작게 대답했다.
​"아빠요."
​조운은 그 말을 들었다. 아빠. 자신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의 아빠인 자신을. 그런데 그 아이가 지금 맞은편에 앉아서 자신을 닮았다고 말하고 있었다. 자신과 같은 열한 살이. 조운은 그 말을 천천히 다시 되뇌었다. 아빠. 아직 자신이 되어본 적 없는 그 이름이.
​조운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하온의 손을 보았다. 손가락 길이가 같았다.
​"야."
​조운이 다시 말했다.
​"너 왼손잡이야?"
​하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어떻게 알았어요?"
​조운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냥 자신의 왼손을 들었다. 하온의 시선이 거기 닿았다.
​"나도."
​두 사람은 왼손을 각각 들고 서로를 바라보았다. 같은 손이었다. 같은 방향의 손이었다. 창문 너머로 눈이 내리고 있었다. 조운은 그 손을 내려다보다가 하온의 손을 다시 보았다. 오랫동안 보았다. 손가락의 마디를. 손등의 선을. 손목 안쪽의 피부를.
​조운이 말했다.
​"너, 학교에서 연필 왼손으로 쥐면 선생님이 뭐라 하지 않아?"
​하온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요즘은 그런 거 없어요."
​조운은 그 말을 들었다. 요즘은. 그 단어가 이상하게 크게 들렸다.
​"나는."
​조운이 말했다. 목소리가 작아졌다.
​"나는 선생님한테 매 맞았어. 왼손으로 쥔다고."
​하온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눈물이 나려고 했다. 참았다.
​조운은 자신의 왼손을 내려다보았다. 손목 안쪽에 흐릿한 화상 자국이 있었다. 담뱃불이었다. 박민철의. 하온은 그 자국을 알고 있었다. 공책에서 읽었으니까.
​"야."
​하온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 손목에 있는 거."
​조운은 손목을 소매 안으로 감추었다. "괜찮아. 옛날 거야."
​"옛날."
​하온이 그 말을 반복했다. "아빠한테는 옛날이지만, 나한테는 방금 전이에요."
​조운은 그 말에 멈추었다. 방금 전. 그렇다. 1988년은 조운에게 지금이었다. 하지만 하온에게는 37년 전이었다. 그런데 동시에 하온에게는 방금이기도 했다. 공책을 통해 연결된 이 두 시간은, 각자에게 다른 무게로 달려 있었다. 조운은 그 무게를 처음으로 실감했다.
​조운은 잠깐 눈을 감았다가 떴다.
​"야, 하온아."
​"네."
​"나 배고픈데."
​하온은 잠깐 멈추었다. 그러고는 웃었다. 이번에는 눈물 없이 웃었다. 그리고 일어섰다. "밥 먹을게요. 같이." 그 말을 하면서 몸이 먼저 부엌을 향하고 있었다.
​그때 조운이 말했다.
​"야."
​하온이 돌아보았다.
​"아까 그 볶음밥. 냉장고에 넣어놨지? 그거 먹으면 안 돼?"
​조운이 볶음밥을 알고 있었다. 공책 속 하온의 문장을 통해서. 하온이 엄마를 위해 참았던 그 마음을. 그 볶음밥을 아직 못 먹었다는 것도. 하온은 그것을 알았고, 조운도 하온이 아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시 웃었다. 오늘 밤 두 번째로 눈물 없이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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