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에겐 시간이 더러 걸리는 일들이 있다
고작 2시간도 시차라고 일찍 눈이 떠졌다.
한여름의 맑고 눈부시게 화창한 아침이었다. 숙소의 테라스로 나가 밖을 내다보니 사방에 식물이 가득하다. 덥고 습한 곳이라 한국에서 익숙하게 보아오던 나무들이 아니다. 다른생김새의 나무와 꽃들은 거리에 다른 풍경을 만들어 낸다. 약간은 생경하고 이국적인 느낌이 마음에 들었다. 나무와 식물을 너무나 사랑하는 나는 일단 이 나라의 첫인상에 후한 점수를 준다.
베트남에서는 현지의 ATM에서 인출을 하는 방법이 가장 손쉬운 것 같아 수수료가 들지 않는 카드만 미리 준비해 가져오고 환전은 해오지 않았다. 오늘은 드디어 몇 년 동안 기다려온 서핑을 처음으로 경험하는 날인데, 강습 비용을 현장에서 현금으로 지불하기로 해서 구글맵을 켜고 근처의 ATM을 검색했다. 산책도 하고 동네도 살펴볼 겸 걷기로 했다. 걷다가 지치면 그랩 오토바이를 불러야지.
숙소 바깥으로 나서니 번화가 쪽이 아니라서 그런지 동네 분위기가 꽤나 정겹다. 베트남 사람들의 첫인상은 '부지런함'. 아침 일찍부터 거리를 비질하거나 집안일 또는 가게 오픈 준비를 하고 있는 사람들도 많고 동네의 노점에 앉아 커피를 마시거나 식사를 하고 있는 사람들도 많았다. 번화가가 아닌 동네라서 이런 소박하고 정겨운 분위기를 풍기는 건지도 모르지만 이 시간의 서울을 떠올리니 왠지 지옥 같은 출근길과 지하철에 빽빽이 들어찬 피곤이 그늘을 드리운 고된 얼굴의 사람들만이 떠올라 마음 한편이 씁쓸했다.
아침부터 동남아의 태양이 뜨겁게 존재감을 드러낸다. 작은 우양산과 챙있는 모자를 챙기길 잘했다.
ATM까지는 꽤나 거리가 있었지만 우리나라와 비슷한 듯 다른 거리의 풍경, 사람들의 모습이 흥미로워 지겨운 줄 모르고 한참을 걸었다. 사람들이 줄을 선 반미 리어카에서 돌아오는 길에 반미를 사서 아침으로 먹어야지, 저 사람들은 뭘 저렇게 맛있게 먹나 이런 생각들을 하면서 30분 정도를 걸어 ATM이 있는 곳에 도착했다.
'맙소사...!' 두대가 다 고장이다. 내가 가져온 카드로 출금할 수 있는 ATM은 다시 한참을 가야 했다. 까딱하다 서핑수업에 늦겠다!
일단 그랩앱으로 오토바이를 호출했다. 오토바이를 타고 시원한 바람을 만끽하며 십 분 만에 숙소로 다시 돌아왔다. 서핑을 하려고 일부러 강습이 진행되는 미케비치 근처로 숙소를 잡은 것은 정말 잘한 결정이었다. 서둘러 옷을 갈아입고 짐을 꾸려 나섰다. 오늘은 오픈채팅방에서 알게 된 분들과 수업에서 만나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다.
숙소에서 빠른 걸음으로 5분. 다행히 늦지 않게 도착했다. 엇! oo님? 하고 두 분과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온라인에서 이야기를 많이 나눠서 그런지 처음 보는데도 생각보단 어색하지 않았다. 한분은 카카오톡에 등록된 프로필 사진을 봐서 어떤 분인지 단번에 알았는데 사진에 선글라스를 쓰고 계셔서 정확한 인상을 알 수 없었던 다른 분은 온라인으로 이야기를 나눌 때 짐작했던 이미지와는 좀 달라서 마음속으로 약간 당황했지만, 뭐 같이 강습도 듣고 점심도 같이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운이 좋게 좋은 분들과 함께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서핑강습을 진행하는 곳은 한국분이 운영하는 업체라 그런지 같이 수업을 듣는 사람들 모두 한국분들이었다. 가족, 커플, 혼자 오신 분 다양한 분들이 모였다.
영상을 보며 간략한 이론수업을 마치고 채비를 마친 후 보드를 실은 코끼리 열차 같은 것을 타고 해변으로 이동했다.
미케비치에 도착하니 정말 휴가 중이라는 게 실감 났다. 어제저녁까지 서울에 있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마치 눈떠보니 순간이동해서 여기로 날아온 기분이었다. 날씨도 너무 좋고 강사님은 오늘 파도가 너무 잔잔해서 조금 아쉽다고 하셨지만 초보가 지금 파도 가릴 때는 아니지! 오늘의 목표는 '보드에서 일어나기' 니깐.
서핑을 배우는 것은 꽤 오래전부터 나의 버킷리스트에 있었다. 용기가 없어서, 또 같이 할 사람이 없다는 핑계로 계속 미뤄오다 올 초여름의 강원도 여행에선 드디어 해보는구나 싶었는데 여행 한 달 전 발목에 깊은 상처가 생겨버렸다. 바다에 들어가도 되냐고 했더니 당혹스러움으로 눈이 동그래졌던 선생님 표정이 떠오른다. 어쨌든 여행준비를 하면서 다낭에서 서핑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얼마나 신이 났었는지!
해변에 도착해 가볍게 몸을 풀고 기본적인 동작을 연습했다. 패들링을 하다가 아! 이때구나 싶을 때(물론 초보는 알 수 없음! 강사님이 뒤에서 타이밍을 알려주신다.) 스무스하게 동작을 이어가며 마침내 안정적으로 보드에 서는 것! 강사 한 명당 2-3명 정도를 맡아 리드해 주셨는데, 남아공출신인 브래드가 우리를 담당해 주었다. 유쾌하게 농담도 던지고 수업 내내 얼굴에 미소를 띠고 있었던 브래드와의 서핑 강습은 기대했던 것보다 더 즐거웠다. 난 생각보다 보드에서 금방 일어날 수 있었지만 몸이 중심을 잡을 수 있는 마음의 준비가 되기도 전 급한 마음으로 일어나려 하다 보니 계속해서 파도 위에서 얼마 못 가고 물속으로 빠졌다. 새롭게 다시 엎드려 패들링을 하며 파도를 기다리는 동안 브래드가 해준 조언들을 새기며 계속 연습하다 보니 일어날 타이밍에 대한 감이 조금씩 생겨났다.
이거 너무 재밌는 거 아니야?!
주변에 서핑을 시작하고선 급격히 빠져드는 사람들이 몇 있었는데 이제 나도 그 이유를 조금 알 것 같다.
2시간 30분 정도의 수업이 첫 수업으로 적당한 것 같으면서도 아쉬움이 많이 남았다. 서핑을 더 해보고 싶어졌다.
남은 일정동안 서핑을 한번 더 할지 고민해 봐야겠다 생각하며 체크아웃을 하러 숙소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