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각기 다른 환경에서 태어나 자라며, 서로 다른 이념과 생각을 가지게 된다.
그리고 그 생각들은 살아가며 겪는 경험에 따라 수정되고, 조금씩 자신만의 옳고 그름의 기준을 만들어 간다.
하물며 내가 키운 내 아이들의 가치관조차도, 때로는 내가 쉽게 이해하거나 받아들이기 어렵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 특히 며느리의 기준을 내가 온전히 이해한다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한 일이다.
나는 정리를 좋아한다. 정리된 공간을 보면 마음이 놓이고, 물건이 제자리에 있을 때 비로소 하루가 안정되는 느낌이 든다.
하지만 그것이 ‘옳다’고 말할 수는 없다. 정리가 되지 않아도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 사람도 있고, 정리의 기준이 전혀 다른 사람도 있다.
내 눈에 어질러져 보인다고 해서 그 공간의 주인이 불편하지는 않을 수 있다. 내가 중요하게 여기는 기준이, 그 사람의 삶 속에서는 하찮은 일이 될 수도 있다.
결국 정리든, 식사든, 대화의 방식이든 모두 다름의 영역이지 옳고 그름의 영역이 아니다.
그런데 일부 시어머니들은 ‘내가 맞다’는 확신으로 며느리의 삶을 교정하려 든다.
아들집에 가서 청소를 해주겠다며, 며느리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손을 대기 시작한다.
옷장을 새로 정리되어 있고, 주방의 식기들은 제멋대로 옮겨져 있다. 세탁물을 함부로 빨아 정리해 두고, 냉장고 속 식재료를 제 기준으로 분류해 둔다. 겉으로는 “도와주려는 마음”이라 하지만, 그 안에는 자신의 방식이 절대적으로 옳다는 확신이 깔려 있다.
그러나 그런 ‘도움’은 며느리에게 삶의 침범으로 느껴진다.
그녀의 세상에 무단으로 들어와 질서를 바꾸고, 주인의 손때가 묻은 일상을 뒤흔드는 것이다.
도움은 타인이 원할 때에만 도움이다.
원하지 않는 도움은 간섭이며, 때로는 폭력이다.
‘좋은 의도였으니 괜찮다’는 말은 결코 면죄부가 되지 못한다.
며느리의 집은 그들의 삶의 공간이다.
그곳에는 그들만의 규칙과 질서, 그리고 사정이 있다.
시어머니의 눈에 부족해 보일 수 있다. 청소가 덜 되었을 수도 있고, 반찬이 모자랄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만의 리듬과 방식 속에서 자연스러운 일상이다.
그들의 세상은 그들만의 질서로 돌아가야 한다.
시어머니는 며느리의 도리를 본인의 기준으로 정하고 며느리를 옥죄어 오기도 한다.
며느리는 이 정도는 해야 한다는 기준, 그것은 결국 시어머니의 기준일 뿐이다.
전화를 자주 하지 않는 며느리,
자주 찾아오지 않는 며느리,
시어머니에게 살갑지 않은 며느리
그 모든 판단의 잣대는 며느리의 잘못이 아니라,
시어머니가 세운 ‘기대의 기준’에서 비롯된 것이다.
세상에는 다양한 관계의 온도가 있다.
누군가는 자주 연락하며 정을 쌓고, 누군가는 묵묵히 거리를 두며 믿음을 쌓는다.
그 다름을 ‘무심함’이라 단정하는 순간, 관계는 금이 간다.
‘나였다면 이렇게 했을 텐데’라는 말이 얼마나 많은 관계를 멀어지게 했는지,
돌아보면 알 수 있다.
며느리에게 기대를 두지 않고, 그저 한 사람의 인격체로 존중해 줄 때
비로소 진짜 관계가 자란다.
정말 현명한 시어머니는 자신의 기준이 상대의 세상에서는 틀릴 수 있음을 인정하는 사람이다.
내가 옳다고 믿는 방식이 타인에게는 불편함이 될 수 있음을 이해하는 사람이다.
그 인정이 관계의 출발점이자, 평화의 첫걸음이다.
시어머니가 된다는 것은 단지 나이를 더 먹는 일이 아니다.
삶의 기준을 내려놓고, 타인의 기준을 존중할 줄 아는 어른이 되는 일이다.
그들이 그들만의 방식으로 세상을 살아가며 시행착오를 겪는 것, 그것이 바로 성장이고 경험이다.
그 기회를 빼앗지 않는 것, 그것이 진짜 어른의 배려다.
먼 미래에 나는 며느리의 삶에 발을 들이려 할 때마다 스스로에게 다짐하려 한다.
‘이곳은 나의 세상이 아니다.’
그들이 만들어가는 세상에 감히 내 기준을 들이밀지 않겠다고,
그들이 나와는 다른 질서 속에서 행복할 수 있음을 믿겠다고.
다름을 받아들이는 연습, 그것이야말로 시어머니가 배워야 할 공부일지 모른다.
내 세상의 규칙이 그들에게는 낯선 법임을 잊지 말자.
“나의 기준이 옳다고 믿는 순간, 관계는 멀어진다.
그저 서로의 삶을 다르게 살아갈 뿐, 잘못 살아가는 것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