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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덕분에 정신과를 갔습니다. 9

우울증은 죄가 없다.

by 윤이

시국이 참 어지럽다. 얼마 전 아이 키우는 엄마로서 그리고 한 사람으로서 분노게이지가 상승하는 기사를 보았다. 대전의 한 초등학교에서 8살 어린 소녀가 칼에 찔려 하늘나라로 간 사건이었다. 아이의 이름은 하늘이 아버지가 공개한 소녀의 사진을 보니 이름처럼, 그리고 하늘처럼 맑고 투명한 아이였다.


공개된 사진 속 아이의 해맑은 미소가 점점 눈앞을 가렸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일말의 동정심은 아니었다. 안타까운 마음은 물론, 그 이상으로 무언가... 공허하고 허탈하고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요즘 세상 돌아가는 시국에 여러 가지 사건사고 사망이라는 단어가 뉴스에서 너무 익숙해질 무렵 소녀의 죽음은 꾹꾹 눌러왔던 사람들의 분노를 폭발하게 만들었다.

작고 연약한 어린아이의 소중한 목숨을 볼모로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면서 조절되지 않는 분노를 퍼부은 자,

하늘이를 공격한 그 자가 바로 학교에서 아이들이 가장 믿고 따르는 돌봄 선생이었다는 사실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현재 신경 안정제 약을 먹고 있음에도 기사를 보자마자 손발이 떨리고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아이의 아버지의 인터뷰를 보고 있으니 순간 감정이 이입되었다. "가장 안전해야 할 학교가 우리 하늘이를 죽였습니다!!" 그렇다 아이들이 가장 믿고 안전해야 할 학교가 아이를 죽였다.


한 미치광이 여자 때문에 선생님들의 사기가 바닥을 치고 있다. 안 그래도 떨어진 교권이 길을 잃었다. 그 여자는 그냥 한낯 돌아이였고, 미친 사람이었다. 의학용어로는 잘 모르겠다. 병원 치료가 필요한 정신질환자였을 것이다.


언론에서는 마치 우울증을 앓는 한 사람이 아이를 그렇게 무참히 살해한 것처럼 너나 할 것 없이 기사를 올렸다. 글의 말미엔 우울증 약을 복용 중이고 우울증 상태로 병가를 쓰고 복직했다는 말을 빼먹지 않았다. 복사 붙여 넣기처럼 우울증 환자 = 잠재적 범죄자로 일반화되었다.


정신과 치료를 받는 사람들, 특히 우울증 환자들을 싸잡아 우발적 살인을 하는 것처럼 몰아세우는 것이 바로 언론이다. 물론 범죄를 저지른 자들은, 감형을 위해 심신 미약을 노리고 자신의 약 복용을 내세우고 있지만, 언론이 사건을 바라보는 시각이 너무 단편적이라고 느낄 때가 많았다.


물론 묻지마살인의 처럼 불특정 다수를 공격하는 사건에.. 알고 보니 조현병 환자더라…라는 사례가 많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조현병 환자들이 사람을 죽이는 것은 아니다.


이처럼 병명이 주는 중압감은 크다. 평소 외향적인 성격이라 하더라도 신체화 증상으로 스트레스를 받으면 우울증 진단을 받기도 한다. 신경 안정제나 불안 장애 약을 먹는다고 해서 꼭 우울증으로 진단하는 것도 아니다. 나 역시 소량의 약을 복용하지만 우울증은 아니다 약간의 불안장애와 스트레스로 인한 신체화 증상으로 약을 복용하는 중이다.


우울증의 가장 기본적인 증상은 무기력함이다. 손하나 까딱할 수 없을 만큼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무력감이 감정을 잠식했을 때 우울감이 증폭된다.


분노도 화도 그 어떤 감정도 없이 무감각한 느낌을 가지고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이불 밖을 나오지 못하는 것을 의지가 없고 게으르다고 표현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우울감이 극에 다다르면 이불 밖을 나갈 힘도 밥을 먹거나 씻을 힘도 없다.


혹시라도 분노가 차오르거나 괴로움이란 감정이 극에 다다르면 자신을 자해하거나 공격한다. 끝내에는 고통을 이기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한다. 이것이 보편적인 우울증의 증상이다. 물론 나는 의사가 아니다. 하지만 현재 사건을 바라보는 정신과 의사들 역시 우울증이 사건의 집적적인 원인은 아니라고 말했다.


8살 어린 소녀를 죽인 범인은 속된 말로 미친 사람이다. 단순히 약을 먹는 것이 아니라 전문적인 치료와 관리가 필요한 정신질환자였다.


내 기준에서 보자면 자신의 분노를 주체할 수 없는 분노조절장애자이며, 자신보다 약한 어린아이를 계획적으로 살해 한 사이코패스다. 물론 사이코패스 검사를 한건 아니겠지만 아주 주도면밀하게 흉기를 구입했고, 구입과정에서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거짓말을 했다.

8살 소녀가 아니었다면 다른 아이가 타깃이었을 것이다. 가장 마지막에 나오는 아이를 죽이기로 마음먹고 자신을 믿고 따르는 아이에게 책을 준다며 시청각실로 유도했다.


과정이 허술해 보여도 한 아이가 갖고 있는 신뢰와 믿음의 관계를 이용한 면식범의 계획적이고 치밀한 범행으로 볼 수 있다. 교내에서 가장 믿을 수 있는 선생이란 자리에서 아이를 유인하여 잔인하게 살해한 것은 그 어떤 사건 보다도 충격적이었다.


자신의 신세가 처량해서 화가 치밀어 오르고 분노가 생겼으면 자신을 탓해야 했다. 물론 그것 역시 좋은 방법은 아니었지만, 약을 먹어서도 고쳐질 수 없는 것이라면 가족들이 개입했어야 했고 올바른 사고를 가진 인간이라면 현실에서 도망 칠 용기라도 있어야 했다.


비겁한 그 여자는 우울증이라는 병명뒤에 숨어 있다. 우울증은 죄가 없다. 세상을 살면서 누구나 다양한 감정을 갖는다. 버티고 버티다 겨우 찾은 병원에서 조금이나마 숨을 쉬고 잠을 잘 수 있는 사람들에게 우울증이란 증상이 있다고 잠재적 범죄자로 만드는 것은 있어서는 안 될 일이다.


요즘 같은 시대에 넌 우울증 없니?라는 말이 유행일 정도로 정신과를 찾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또한 정신건강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다. 누군가의 권유가 아닌 스스로 정신과를 찾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이 모든 것이 고통 없이 행복하게 살기 위한 평밤한 사람들의 처절한 몸부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정신과의 문턱은 높고, 정작 정신과를 가야 할 사람들은 가지 않고 여러 가지 사고를 쳐댄다. 용기 내어 병원을 찾고 자신이 앓고 있는 마음의 병에 한 발씩 다가가려는 사람들이 이 사건을 계기로 숨게 된다면 세상은 더욱 흉악하고 포악해질 것이다.


혼란스러운 정국과 높은 물가 경제적 불안성 그리고 미래에 대한 막막함 모든 것들이 우리의 정신 건강을 괴롭힌다. 스트레스는 만병의 근원이라고, 우울증이 아니더라도 우리나라에만 있다는 화병은 방치할 경우 암이나 각종 질환에 노출되기 쉽다.


그래서 전문가와의 상담이 중요하다. 아이를 무참히 살해한 후 정신과 약을 복용했다느니, 우울증으로 병가를 냈다느니 하는 말은 정상참작이 되어서는 안 될 일이다. 심신미약자의 살인에 관해 여러 의견이 있다.


심신미약자라고 해서 살인을 할 권리는 없다. 감경사유도 될 수 없다. 안타깝지만 누군가를 살해하고 한 가족의 인생을 송두리째 빼앗은 죄는 심신이 미약할지언정 그 죗값을 받아야 한다.


하늘이를 죽인 선생이란 사람은 선생도 인간도 아니었다. 그저 자신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미친 자이다. 자신의 화를 주체하지 못한 책임은 제대로 받길 바란다. 그것도 감수하지 않고 이렇게 계획적으로 범죄를 저지르진 않았을 테니..


한 기사에서 보니 수술을 마친 후, 식음을 전폐하고 있다는데 그것도 나는 괘씸하게 느껴졌다. 유가족에게 진심이 담긴 사과를 하고 제대로 된 죗값을 받아야 한다. 그리고 형장의 이슬로 살아지길 바란다. 그것이 남은 가족들의 억울함을 조금이나마 풀어주고.. 앞으로 살아갈 힘을 줄 수 있는 유일한 해법일 것이다.


나는 사형제 폐지를 주장하는 사람이다. 사형을 당해야 하는 흉악범들보다 억울한 누명으로 죽을 수 있는 한 사람의 인생이 더 중요하다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재 우리나라의 법은 너무 관대하다. 그리고 중심이 없다.


판사 개인의 판단으로 사건마다 죄의 무게가 달라진다. 2011년 800원을 횡령한 혐의로 해직된 버스기사의 사례가 대표적인 예이다. 요즘 일간에 일어나는 사건을 보면 ai 판사 도입에 대한 이야기가 많다.


그만큼, 흉악범에게 내려지는 형량의 무게가 우리의 예상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대형 로펌의 변호사를 산다던가 전관예우를 지킨다던가.. 법의 평등성이 무너지는 것을 목격하는 와중에 돌봄 교사 살인 사건의 재판 결과를 주목해야 한다.


우울증은 죄가 없다. 그저 한 인간의 일탈과 사악함이 누군가에겐 세상 전부이자 모든 것인 아이를 빼앗아 간 것이다.


기자들 역시 기사를 쓸 때, 우울증이라는 단어에 집중하기보다는 한 소녀를 살해 한 여자의 살아온 삶이나 부모에게 받은 학대 등 정신질환자이자 악마가 될 수밖에 없는 여러 가지 이유에 포커싱을 맞추고 취재하길 바란다.


그저 받아쓰기처럼 우울증 약을 복용했고, 우울증으로 인해 병가를 냈고, 복직 그 이후.. 여러 가지 이상한 행동을 하다가 해임 당일날 사건을 저질렀다는 것이 하나같이 말하는 사건의 전말이다. 어떤 매체를 보아도 다양한 시각을 보이는 기사는 찾아볼 수 없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여러 전문가들의 인터뷰를 담으면서 우울증 환자에 대한 선입견을 풀어주려는 시도들이 보이고, 사건을 바라보는 사람들 역시, 우울증이 포커싱이 아니라고 말한다. 집단 지성의 힘이다.


이번 사건 역시 어떤 트라우마나 어릴 적 경험을 통해 풀어내지 못한 한 사람의 불안정한 애착과 정서가 만든 한 괴물을 보는 것일 수도 있다.


이런 끔찍한 사건이 일어났을 땐 어떤 한 가지 메시지에 집중하기보다는 그 이면에 보이지 않는 범죄자의 특성을 범죄 의도를 다각도로 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아직도 많은 곳에서는 치료를 받아야 할 사람들이 병원을 찾지 않고 타인을 혹은 가족을 괴롭히고 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우울증에 대한 좋지 않은 시선 혹은 선입견으로 치료를 미루다. 또 다른 사건이 터지게 될까 두렵기도 하다.


정신과를 찾는 이유는 단순히 우울감 때문만은 아니다. 우울증 약을 먹는다고 사람을 잔인하게 죽일 계획을 세우진 않는다. 그저 사람의 가죽을 덮어쓴 괴물이 우울증 약을 복용할 뿐이고 그 괴물에게 우리의 미래세대가 억울하게 죽음을 당한 것일 뿐이다.




사진 속 하늘이의 밝은 웃음에 마음이 아려왔다. 우리 아이도 곧 초등학교에 입학하는데 나는 또 누굴 믿어야 할지 불안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일선에서 고생하시는 많은 선생님들께서도 난처한 입장이실 테다.


교사들 중 스트레스로 약을 복용하는 분들이 많다고 들었다. 일부의 학부모들은 또 이를 문제 삼을 것이다.

우울증 환자에 대한 선입견처럼 이젠 아무도 믿지 못하는 사회가 되어 교사와 학부모의 관계는 날카롭고 또 날카로워질 것이다.


교권 추락에 대한 말이 많다. 돌아이 질량 보존의 법칙처럼 미디어에 등장하는 이상한 학부모들을 제외하고는 아마 어릴 시절 선생님에 대한 트라우마로 인한 불안이 현재 선생님들에게로 작용한 것 같다.


한강 작가는 죽은 자가 산자를 살린다. 과거가 미래를 구한다고 말했지만, 교권 문제는 조금 다른 것 같다.

폭력이 난무했던 선배 선생님들의 과오가 현재 선생님들에게 떠 밀려온 것이다.


솔직히 나는 선생님에 대한 좋은 감정이 없다. 초등학교 시절 선생님이 남학생들을 무참하게 때리던 모습을 그대로 지켜봤고, 이유 없이 뺨을 맞아도 그 이유를 물어볼 수 없는 시절 이었다.


고작 초등학교 2학년 아이들, 지금 생각하면 어리고 여린 아이들이었는데, 어떤 잘못을 했길래 아이들이 선생의 실내화로 뺨을 맞아야 했으며, 엎드려뻗쳐를 시킨 채 밀대 걸레 막대기로 엉덩이를 맞아야 했을까...


중학교 때는 단어를 외우지 못했다고 틀린 개수만큼 손바닥을 맞았고 나와서 수학문제를 풀지 못하면 당구대로 학생의 엉덩이를 때리는 것은 일상이었다. 아픔보다 수치심이 들었다.


사립고에 진학했을 때는 성적이 상위권 학생들과 하위권인 학생들의 반을 나눠서 편성했다. 수학이나 영어처럼 수준별 교육이 필요한 과목의 반 바꾸기의 개념이 아니었다.


내 기억이 맞다면 상위권 반은 특반...(특별하단 의미였을까..) 하위권 반이 있던 반은 평반이었다. 심지어 건물을 따로 쓰기도 했다. 평반 아이들을 대하는 선생님들의 태도는 무시와 무관심으로 일관되었다.

지금이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인, 같은 학년 학생의 아버지가 어느 과목의 담당 선생님이기도 했다. 특별히 잘하는 아이들만 모아서 밤에 담당 과목 선생님께서 비밀과외를 하기도 했다. 학원이 아닌 학교 안에서 말이다.


어차피 대학은 특반아이들이 갈 테니, 아이들 방해하지 말라고 성적 하위권의 아이들끼리 몰아놓은 느낌이 강했다. 평반에서도 공부하려는 아이는 그런 분위기에 압도되고 의지는 금세 꺾였다. 나는 평반에도 있었고 특반에도 있어봐서 그 묘한 이질적인 공기의 차이를 잘 알고 있다.


그때부터 나는 선생님들을 불신하기 시작했다. 겉으론 좋은 척해도... 정작 내 이름을 아는 선생님은 없었다. 그저 한 명의 유령처럼 나는 자릿수만 채워주는 학생이었고 사고도 문제도 일으키지 않는 적당한 성적을 가진 그런.. 평범한 학생이었기에, 선생님들의 눈 밖에 나지도 눈 안에 들어가지도 못했다.


학교를 다니면서도 나는 36명 중의 한 명일 뿐 아무것도 아니구나 라는 생각에 처량한 마음이 들었던 기억이 난다. 내가 공부를 더 잘했으면 날 기억해 줄까... 엄마가 멋진 옷을 입고 학교를 들락날락했다면… 선생님이 번호가 아닌 이름으로 날 불러줬을까…?


학창 시절 부모님의 불화와 잦은 싸움으로 마음을 의지할 때가 없을 때 단 한 명의 선생님이라도 나에게 좋은 어른의 모습으로 남아있었다면, 나는 선생님 아니 어른을 존경했을 것이다.


오로지 성적으로 판가름 나는 그 세계 안에서 지금 변한 것이 있을까...? 저출산으로 인해 아이들의 버릇이 없어진 것도 사실이다. 엄마들의 요란스러운 컴플레인도 어처구니가 없다. 하지만... 선생님에 대한 불신이 큰 것도 부정하지 못한다.


나는 한 번도 선생님 다운 선생님을 만난 적이 없기에... 선생님에 대한 마음을 잘 모르겠다. 아이의 예민함 때문에 부탁드릴 일이 많으면 백번을 생각한 후 말씀을 드린다. 무언가 불만 사항이 있어도 내가 예민한 엄마 중 하나가 될지도 모를까, 열 번.. 스무 번 생각하고 자기 검열을 한다.


선생님의 심기를 건드리면 내 아이에게 불이익이 올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아직도 내면 안에 있다. 선생님도 사람이고 감정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되도록이면 참는 편이지만... 예전에 아이가 다니던 어린이집에서는 컴플레인하는 엄마들에게는 잘하고, 수긍하고 예예~하고 맞춰가는 엄마들에게는 흔히 말해 만만하게 보는 태도를 보인 적도 있다.


이처럼 학부모의 유형도 선생님들의 성향도 각양각색이다. 이제는 웃고 있는 선생님의 모습을 보아도 속으로 의심하게 되는 상황까지 온 것 같다. 하늘이에게 몹쓸 짓을 한 그 여자가 나쁜 사람이라고 해도 선생님이었다는 사실은 지워지지가 않는다.


어쩌면 우울증 환자라서 그런 흉악한 짓을 했다는 것처럼, 그녀의 직업이 선생님이었다는 사실만으로 선생님을 불신하게 되는 날이 올까 걱정이다.


그저 돌아이는 어디에나 존재하는 것처럼, 선생님도 우울증 환자도 아닌 인두껍을 쓴 한 금수의 흉악한 행동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가장 현명한 방법인 것 같기도 하다.


그렇지만, 온전한 믿음만으로는 아이를 잃은 부모님의 상처는 너무나 깊고 쓰라려서 나는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슬픔과 고통이 아련하게 전해져 온다.


하늘의 별이 된 작고 예쁜 소녀, 그곳에는 고통과 두려움 없이 그저 행복만 하길 바래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오늘도 두서없는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연달아 터지는 여러 가지 사건사고에 글을 쓰려는 힘조차 나지 않네요..


우울증이 도지는 것 같아 두렵기도 합니다. 아직은 약을 잘 먹고 평온한 마음으로 잠도 잘 자려고 노력합니다.


하지만 저도 사람인지라 여러 가지 스트레스에 많이 취약합니다. 너무 늦게 포스팅되는 글을 꾸준히 읽어주신 분들께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항상 행복하시고 건강하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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