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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덕분에 정신과를 갔습니다. 10

그래도 살아야 하니까.. 움직 여 봅니다.

by 윤이

어쩌면 마지막이 될 수도 있는 글.


마지막이 된다는 글 맥락 상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겠다. 마지막이란, 이 시리즈의 마지막을 말한다.

나는 사실 글을 제대로 배워 본 적이 없다. 그저 어린 시절 유일한 친구였던 텔레비전을 좋아했다. 장르는 가리지 않았고, 그중에서 특히 시트콤과 코미디 프로그램을 좋아했던 것 같다.


중학교에 진학하면서 포근한 목소리를 가진 이소라의 음악도시 라디오 프로그램을 즐겨 들었던 아이였다. 그때부터 나는 막연하게도 글을 쓰는 작가가 되고 싶었다. 문학이 아니라 방송을 만드는 작가. 지금도 내가 좋아하는 한국기행이나, 다큐멘터리, 심야 라디오의 오프닝까지.. 잔잔하고 보편적인 글을 쓰고 싶었다.


어린 시절 어느 순간부터 나에게서 웃음은 사라졌었다. 어린 시절 사진을 보면 유아기 때는 나도 잘 웃고 장난기 많은 어린이였다. 내가 사춘기가 될 무렵부터 시작된 부모의 충돌은 나의 웃음을 뺏아갔다. 그래서일까 억지로라도 웃을 수 있는 시트콤과 코미디를 즐겨 보았던 건...


출생을 부정당하는 엄마의 가시 돋친 말과, 엄마를 향한 아빠의 욕지거리를 대신 들으면서 나는 삶을 부정당하는 기분에서 헤어 나올 수 없었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나는 왜 태어났을까가... 머릿속에 맴돌았다.


그 시절 엄마는 당신들 싸움 때문에 공부를 할 수 없다고 했더니, 독서실 가서 하라며 나에게 독기가 부족하다고 말했다.


나는 어리석게도 나의 악착같지 않음을, 부모의 싸움에 휘둘리는 나의 나약함을 탓했다. 되돌아보면 당시 나는 소아 우울증이었던 것 같다. 무기력하고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자괴감에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었다.


지금이라도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간다면 악착같이 공부를 할 테다. 그리고 돈을 아주 많이 버는 직업을 선택하고 일찍이 독립해 부모와 단절하며 살 것이다. 그게 나의 행복을 위한 길일거라고 믿는다.


대학 진학 이후, 고교 시절 같은 학원을 다니던 남사친에게 당시 내 별명이 어름공주였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공주였다는 말도 참 오글거렸지만, 나는 얼음이라는 단어가 가슴에 박혔다. 내가 생각해도 난 항상 웃지 않는 아이였다. 무표정하고, 말도 톡톡 쏘고, 세상을 비관했다. 질투심도 많았고 자존심도 강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는 그게 소아 우울증인지 뭔지도 모르고 그냥 내 감정을 외면하려 했고 엄마에게 미안하기만 했다. 내 존재에 대한 기쁨과 소중함 보다는 나 하나로 인해 모두의 인생을 망치는 것만 같았다.


그 생각은 지금도 유효하다. 엄마의 희생으로 포장된 가스라이팅은 한 사람의 인생을 망쳤다는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 없게 한다. 자신의 용기 없음을, 너희를 위해라는 말로 포장하는 것은 사랑하는 엄마라도 원망스러운 지점이지만, 아무리 말해도 그녀의 생각을 바꿀 순 없기에 그냥 그렇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래도 흔히 말하는 나쁜 친구들과 어울리며 탈선하지 않고, 내가 정해 놓은 선을 지키려고 했던 것은 종교와 글쓰기의 영향이 컸다. 나는 어린 시절 매일 하나님께 편지 아닌 편지를 썼다. 일기장에 나를 비난하며 우리 집의 환경을 안타까워하며 하나님께 기도를 했다.


정확히 말하면 일기를 쓴 것인데, 되돌아보면 그 행위가 나의 슬픔과 우울감을 조금은 해소시켜 준 것 같았다. 하지만, 집안의 상황이 점점 파국으로 치달을 때쯤, 그들이 믿는 하나님을 원망하게 되었고, 교회도 나가지 않았다.


설교 중에 정치적 메시지를 툭툭 던지고, 옷차림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목사. 없는 형편에 치킨 한 마리 한번 사준 적 없고, 매일 급식비와 학원비를 밀려서 수치감을 줬던 부모는 교회 건축 헌금으로 거액의 돈을 냈다.


그 믿음이라는 족쇄로 인해, 집에서는 쌍욕을 하고 싸우다가도 주일이 되면 잘 차려입고 아무 일도 없다는 듯 교회를 나갔다. (사이비 종교는 아니다. 그리고 모든 교회가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그 와중에 나는 종교에 환멸을 느꼈다. 작은 소도시의 작은 교회였는데도 사회의 탐욕이 가득 들어 있었다.


그들이 말하는 교회 안에 하나님과 예수님은 없었다. 자신을 신으로 아는 목사와, 맹목적인 교인들만 있을 뿐이었다. 요즘 종교에 대한 이슈가 크다. 그야말로 종교 대 통합이다. 그 시절 엄마가 말했던 좋은 목사님들은 하나같이 스캔들에 휘말려 있고, 탐욕이 가득한 마귀 같다. (지금은 부모님도 그것을 인정하고 15년 전에 가톨릭으로 개종했다.)


몸만 성인이 된 나는 우울증을 그대로 안고 자랐고, 그것을 꿈이라는 거대한 희망에 꼭꼭 숨겨가며 잊으려고 애를 썼다. 내가 태어나서 가장 잘한 일 두가 지가 있는데, 한 가지는 스무 살이 되던 해 서울에 올라와서 부모와 떨어져 지낸 것이고, 나머지 하나는 지금의 아이를 낳은 일이다.


서울이라는 치열한 곳에서 좁은 꿈의 틈바구니에 끼자니 우울할 틈이 없었다. 그때는 젊었고, 몸의 신체화도 없었고, 연애를 하지 않아도 외롭지 않았다. 작가라는 꿈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비록 슬프고 어려운 삶을 살았지만 그 상실을 밑거름으로 좋은 드라마를 쓰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다.


그래서 내가 나의 우울증을 꼭 나쁘게만 보는 것은 아니다. 견딜 수 있었고 버틸 수 있었다. 아이를 낳기 전까지는 말이다. 컨트롤 까지는 안되어도, 순간순간 극복은 할 수 있는 나 자신과의 감정싸움이었다.


글을 쓰면서 행복했고, 즐거웠고, 힘들었지만 무엇보다 재미있었다. 그리고 희망이 보였다. 내가 우리 부모님처럼은 살지 않을 거라는 것, 스타 작가가 되어서 부모님을 꼭 호강시켜 드리겠다는 믿음.


우리 집의 주된 원인은 징글징글한 돈이었기 때문에 돈만 있으면 우리 가족의 행복을 찾을 수 있을 거라 믿었다. 하지만 그것은 나의 오만이고 착각이었다. 우리는 모두 정서적 허기에 굶주린 작은 아이였다.


돈이 있었다고 해도, 또 다른 문제들로 서로 상처를 주었을 것이다. 정서적 자산이 풍부한 사람은 재물이나 가진 것으로 행복의 만족도를 느끼지 않는다. 어려움이 닥치면 이겨 낼 수 있는 회복탄력성이 강하다.


아쉽게도 우리나라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서적 풍요로움이 없다. 그건 사회 구조와 시스템의 문제이다. 요즘 읽고 있는 정치에 관한 책을 읽고 느낀 것이다. 한 사람의 잘못으로 그 사람의 인생이 좌우되는 것만은 아니라, 사회의 시스템과 구조적 문제 그리고 그것을 직면하는 사회적 시선 등이 한 사람의 인생에 크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


물론 나의 슬픔을 모두 국가의 탓으로 돌릴 순 없다. 하지만 적어도 아이들의 행복권만큼은 나라에서 지켜줬으면 좋겠다. 무조건 오냐오냐 하자는 것이 아니다. 물질의 풍요로움을 말하는 것도 아니다.


아이들이 적어도 희망은 가지고 이 사회를 살아가게 했으면 좋겠다. 내가 버틸 수 있었던 그 꿈에 도달할 수 있다는 그 희망만으로도 과거의 슬픔은 잠시나마 사라질 수 있다.


나는 여전히 우울감으로 어떤 하루를 보내고 더 나아가 몇 년째 약까지 먹고 있지만, 중요한 것은 더 이상 내 탓, 부모 탓, 환경 탓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던 이유를 사회에서 찾고 애착과 정서의 상실에서 찾다 보니 아주 미세하게나마 그것을 이겨 낼 수 있는 작은 방법이 보이기 시작했다.


잘해야 된다는 압박, 행복에 대한 집착, 타인에게 내가 보일 시선들 내가 욕망하는 것들만 조금 내려놓다 보면, 작지만 마음의 여유가 찾아온다.


사람의 생명은 유한하다. 어느 날 아이가 " 엄마 내가 죽으면 어떻게 돼? "라는 질문을 한 적이 있다. 여섯 살 아이 입에서 나올 질문치 곤 조금 빠르다고 느껴 놀랐지만, 어떻게 설명해 줘야 할지 천천히 고민을 했다.


어린 시절 교회를 다닐 때는 천국에서 영원히 행복하게 사는 것이 최고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성인이 되어 그 말의 의미를 생각해 보니 조금은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원히와 행복이라는 단어에 이질감이 들기 시작했다. 영원히 행복하다면 그건 행복일까...?


나는 생명이 다한다면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간다는 선조들의 말을 믿고 싶다. 그냥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가 편안하게 턴 아웃 되었으면 좋겠다. 그만큼 현재를 열심히 감사히 살아야겠다. 열심히란 단어가 주는 보편성을 깨부스고, 열심히 놀고먹고 쉬고 일하고 웃고 떠들고 가끔은 우울해하고 슬퍼해가면서 말이다.


현재 나는 아이로 인해 정신과를 찾았지만, 결국은 깊숙이 묵혀 두었던 나의 아픔을 꺼내어 조금씩 치유하는 과정이다. 나는 앞으로 어떤 삶을 살게 될지 모르겠지만 오늘 보다 더 행복한 내일이 되길 바라본다.


행복이란 단어에 집착하지 않되, 주어진 감정에 잘 적응하며 내 생이 다 하는 날엔 그저 온화하고 편안한 얼굴로 눈을 감고 싶다. 그러기 위해선 지금... 당장에 닥친 삶을 열심히 살 것이다. 열심히 움직일 것이다.




지금까지 제 미흡한 글을 읽어주신 분들께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치유를 위해 시작한 브런치 글쓰기가 글을 다시 쓸 수 있는 동력이 되었습니다.

지금은 오랜 시간 내려놓았던 드라마 습작을 시작했습니다.

몸은 성인이지만 마음속 작은 아이를 품고 사시는 분들과 함께 힘을 내고 싶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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