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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년 복린이 스파링 체험기

by 디타이거

퇴근 후 복싱 학원에 갈 때마다 나는 내 안의 나와 먼저 싸운다.

오늘은 너무 피곤한데, 미뤘던 약속을 잡아야 할 때가 되었는데, 왠지 가족들이 나를 너무 기다리는 것 같은데... 운동을 할 수 없는 수십 가지 이유가 떠오르지만 스스로를 납득시킬 만큼 확실한 이유는 찾기 어렵다.

취미가 아니라 생존을 위해 운동을 하는 거니까.


6개월쯤 되었을 때 체육관에서 정기 스파링 데이를 시작했다. 링 위에서 공개적으로 그동안 갈고닦은 실력을 보여줄 수 있는 기회다. 난 그동안 학원에서 코치들과 2번 스파링 훈련을 해본 게 전부였다. 하지만 나 자신을 시험해보고 싶었다. 공식 규격 링은 생각보다 컸다. 긴장이 좀 됐지만 난 자신 있었다.


중학교 때 친한 친구와 사소한 말다툼을 한 적이 있다. 말다툼 도중에 친구가 갑자기 선빵을 날렸다. 무방비 상태로 있다가 볼에 정통으로 주먹을 맞았다. 순간 정신이 멍해져 눈을 감았는데 같은 곳으로 또다시 주먹이 날아왔다. 두 번째 펀치를 맞았는데 오히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난 반사적으로 몸을 돌려 반격을 했다. 그 친구는 한대 맞고 매우 당황해했다. 자세를 잡고 회심의 주먹을 날리는데 친구들이 몰려들어 우리를 떼어놨다. 너무 아쉬웠다. 내 안의 파이터 본능을 발견한 순간이었다. 물론 겉으로 버기엔 내 볼만 시퍼렇게 멍이 들었지만 그 친구는 정말 운이 좋았다. 그 후로 파이터로서의 재능을 발휘할 기회는 없었지만 난 복싱을 시작할 때부터 내가 잘할 거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내 스파링 상대는 1개월 된 진짜 복린이었다. 하지만 복싱에 진심인 편으로 거의 매일 체육관에 있었고 운동시간도 길었다. 결정적으로 그 친구는 20대였다.

공이 울리고 우리는 서로의 전투력을 탐지하며 한 번씩 펀치를 날렸다. 하지만 아직 펀치를 피할 정도의 실력이나 특별한 전략이 없는 복린이에게 탐색은 무의미했다. 나름 배운 걸 써먹어보려고 노력하면서 주먹을 뻗었지만 남들이 보기엔 그냥 주먹구구로 주먹이 날아다녔을 것이다. 가끔씩 상대의 얼굴에 내 주먹이 꽂혔다. 짜릿했다. 난 쾌감을 느끼며 신나게 주먹을 휘둘렀다. 그러다 두 번 정도 빗겨 맞았는데 생각보다 충격이 있었다. 아팠다. 덜컥 겁이 났다. 중학교 때 맨주먹으로 얼굴을 정통으로 2대나 맞았을 때도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반격을 했던 나인데... 그때의 느낌이 아니었다. 심지어 솜이 들어간 장갑에 헤드기어까지 착용하고 정통으로 맞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치열했던 첫 스파링을 마치고..(이겨서 손 든 거 아님 주의)


어쨌든 첫 스파링은 성공적이었다. 20대를 상대로 압승을 거뒀다고 코치들이 칭찬해줬다. 역시 나에게 파이터로서의 재능이 있는 게 분명했다.





그로부터 3개월 후 나는 2번째 스파링에 참여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한 달 전부터 꾸준히 운동을 하며 필승을 다졌다. 그런데 하루하루 다가올수록 그날의 공포심이 점점 커져갔다. 분명 중학교 때보다 훨씬 덜 아팠는데 왜 이런 마음이 드는 걸까. 모든 준비는 끝났다. 난 이제 두 번째 승리를 향해 자신 있게 링에 올라가기만 하면 됐다. 하지만 내 쇠약해진 몸은 본능적으로 백기를 만지작 거리며 기권할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결전의 날, 난 결국 도망치고 말았다. 몸이 유독 피곤하고 쑤신다는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슬펐다.

13살에 발견한 내 재능이 꽃을 피워보지도 못하고 이렇게 끝나버리다니. 그런데 오후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하는 게 아닌가. 내 몸은 쇠약해진 대신 날씨와 교감할 정도로 민감해져 있었던 것이다.

갑자기 맥아더 장군의 명언이 떠올랐다.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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