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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윤진 Feb 23. 2022

생방송의 무게 下

2010년 하반기부터 2011년 , 학교 방송국 앵커


  룸메이트가 된 동기와는 살면서 한 번도 부딪힌 적이 없었다. 그건 온전히 룸메이트의 무던하고 좋은 성격 때문이었을 것이다. 내가 지금까지 같이 살았던 룸메이트들 중에서 지금까지도 친한 사이로 남아있는 것은 그 친구 뿐이다. 집에서는 항상 두꺼운 안경에 알록달록한 수면 양말을 신고있던 룸메이트. 내가 하고싶어하는 것은 무엇이든 좋다며 같이 해주던 친구. 우리는 나란히 놓여있던 두 개의 매트리스 위에서 과제를 하고, 음악을 듣고, 뭔가를 먹었다. 브로콜리 너마저, 가을방학, 검정치마, 언니네 이발관과 같은 인디밴드에 심취해 있었다. 때때로 계피가 왜 ‘브로콜리 너마저’를 나갔을까, 하는 이야기를 심도있게 나눴다.


  그러나 그 집을 ‘잠만자는 방’이라고 써 놓았던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는 것을 차츰 알게 되었다. 얼굴도 모르는 사람과 화장실이나 빨래 건조대를 같이 써야한다는 사실이 어찌나 불편했던지 점점 집에 들어가기가 싫었다. 낮에는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학교에서 보냈다. 방송국에서 음악을 선곡하거나 과제를 했다. 어둑어둑해지면 어김없이 술을 마시러 갔다. 저렴한 순살치킨이나 안주를 파는 술집에 가서 소주를 들이켰다. 최대한 집에 늦게 들어가는 것이 목표였으므로 너무 빨리 취하지않도록 주의하며 몇 시간이고 마주앉아 이야기를 나눴다. 매일 붙어있으면서도 신기하게 이야기 거리는 마르지 않았다.


  딱 한 가지 문제가 있다면 ‘아침방송’이었다. 친구는 일주일에 이틀, 나는 하루. 둘 중 한 명이라도 아침 방송을 나가야하는 날이 일주일에 세 번이나 되었다. 물론 우리가 그것때문에 술을 자제하는 일은 없었다. 잘 수 있는 시간이 얼마 안 남으면 차라리 잠을 안 자는 쪽을 택했다. 동이 터 올때쯤 집에 들어가면서 “한 명이라도 알람을 꼭 듣자.”했지만 사람 일이라는 게 어디 마음처럼 쉬울까. 당장 떠오르는 것만 해도 몇 번이나 가슴이 철렁한 순간이 있었다. 일단 자고있는데 알람이 아니라 벨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면 비상이었다. 그건 몇 번이나 울렸을 알람을 둘 다 듣지못했다는 의미였고, 화가 난 다른 동기들이 전화를 걸었다는 것이었다. 그 순간에는 전화를 받을 시간 따위는 없었다. 그대로 일어나 학교로 뛰어야 했다. 나는 아직도 용수철처럼 튀어나가던 룸메이트의 뒷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룸메이트는 PD였기 때문에 다른 친구들의 대타를 해야하는 경우도 많았다. 멀리 사는 동기들은 원래 나오던 시간보다 10분만 늦어도 지각 확정이었다. 방송 시작을 1시간 50분이나 남겨두고도 본인의 지각을 만천하에 공표해야하는 그들의 입장도 안 되긴 했지만, 그래도 룸메이트 만큼은 아니었다. 그런 일이 발생하면, 학교 앞에 사는 우리들은 대략 방송 시작 1시간 전쯤 전화를 받았다. 미안한데, 책상 위에 원고랑 CD 있을거야. 오늘 방송 좀 해줄 수 있을까? 눈이 많이 온다거나 동기 중 누가 아픈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룸메이트는 매번 용수철처럼 튀어나갔다. 때때로 내가 일어나보면 이미 나가고 없는 경우도 있었다.


  그런 상황 속에서도 꺾이지 않고 밤이면 어김없이 술을 마시러 갔다는 사실이 믿어지지가 않는다. 끊임없이 마시고, 웃고, 떠들고, 뛰어다닌 날들이었다. 우리가 방송을 건너뛰더라도 알아챌 사람은 없었겠지만 당시 우리에게 그런 선택지는 없었다. 사명감만큼은 이상하리만치 투철했다. 아침 저녁으로 하는 방송에 적응하기 시작할 즈음 겨울 방학이 찾아왔다. 룸메이트였던 동기는 2학년 때부터 친언니와 방을 얻기로 했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동기는 진심으로 미안해했고, 나도 아쉬운 것은 사실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나는 겨울 방학동안 동해에 내려가 호프집 알바를 했다. 오랜만에 만난 고등학교 친구 한 명이 서울에서 살고싶다는 이야기를 하길래 “그럼 나랑 같이 살래?”물었고,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어 금세 둘이 함께 지낼 원룸을 구했다. 우리 학교 근처였다.


  2011년에도 나는 계속해서 방송을 했고, 본격적으로 시를 쓰기 시작했고, 때때로 택시를 타고 클럽에 놀러갔다. 서울은 점점 익숙한 도시가 되어갔다. 지하철을 잘못 타는 일도 없었고, 단골 가게들도 생겼다. 나는 매일 새로운 책을 펼치듯 서울 이곳 저곳을 보러다녔다. 그 시기는 지나치게 바빠서 기억이 하나로 뭉뚱그려졌는지 세세하게 써보려고 해도 마음처럼 되지 않는다. 기억에도 단위가 있나보다. 나에게 있어 다음 기억은 학교 졸업에 실패하고 살도 많이 쪄서 은둔아닌 은둔 생활을 하고있던 스물 한 살 겨울로 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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