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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세이스트 Jan 28. 2022

소설이 이토록 나의 가슴을 울릴 수 있다니.

최은영 작가 장편소설 - 밝은 밤

어제 모처럼 퇴근 후, 지인을 만났다. 함께 저녁을 먹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 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이유를 알 수 없는 우울이 나를 덮쳤다. 그동안 쉼 없이 달려와서일까. 마케터와 작가라는 두 가지 일을 모두 다 탁월하게 잘 해내려고 욕심을 내서일까. 마음이 툭-하고 갑자기 와르르 무녀졌다.


위기를 직감했다. 이럴  기분 전환이 필요하다는 것을 다행히 빠르게 알아차렸다. 우울의 늪에 파묻히면 헤어 나오는  한참의 노력과 시간이 필요하니까. 집으로 돌아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곧장 뒤돌아 서서 교보문고로 갔다. 그리고 성인이 되어   번도  돈을 지불하고  적이 없었던 소설 책을 샀다.

에세이 덕후가 소설이라니. 무슨 일인가 싶겠지만, 나도  선택에 대한 이유를  모르겠다. 그냥 소설이 끌렸고, 해당 섹션으로 발걸음을 옮기니 마침 문학동네 편집자 유튜브 영상에서 봤던 최은영 작가의 '밝은 ' 있었다. 다른 소설은 쳐다도 보지 않고 곧장 그것을 골라 결제를 마쳤다.

성인이 돼서 읽는 사실상  소설이기도 했고, 워낙 뛰어난 작품이라는 평을 많이 들어서였을까. 부푼 기대감을 안고 대충 손만 씻고 책상에 앉았다. 잠시 시계를 보니 자리를 잡고 앉은 시각은 오후 10. 내일 출근을 해야 되니, 1/4 분량만 가볍게 읽어보자고 시작했지만 결국  그자리에서 2시간 동안   모금 마시지 않고 완독을 해버렸다.

밝은 밤은 증조할머니 - 할머니 - 엄마 -  ()  4대의 걸친 여성들의 이야기다. 일제 대부터, 산업화 시기를 건너 현재까지 이르는 우리나라의 역사를 함께해  여성들의 스토리인 것이다. 탄탄한 전개와 인물 구성에  '어떻게 이런 글을   있는 것일까?'하고 탄복했다.


그리고 책에서 그려진 4대에 걸친 여성들의 아픔에 함께 울었다. 백정의 딸이라는 이유로 차별과 멸시를 받아야만 했던 삼천. 일제를 피해 양민인 남편의 도움으로 백년가약을 맺었지만, 그녀는 백정의 딸이라는 이유로 뿌리가 그와 다르다는 이유로 온전한 사랑을 받지 못했다. 총탄이 빗발치는 전쟁을 피해 떠난 피난지에서도 남편은 연약한 아내와 딸을 두고 가장 좋은 자리에서 눕고 배불리 먹었다. 그 부분을 읽는 순간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가슴 저 깊숙한 곳에서 피어오르는 울화를 잠재우고자 냉장고 문을 열고 벌컥 차가운 물을 목구멍으로 흘려 넣을 정도로.

어디 그뿐인가. 남편은 딸을 이미 북에서 결혼을 한 상태인 남자와 결혼을 시키고 말았다. 결국 딸은 나중에 이 사실을 알게됐고, 전쟁이 끝나고 북에서 돌아온 조강지처를 따라 남편이 떠나버리자 홀로 죽을 때까지 외로이 딸을 키웠다. 그녀의 이름은 영옥. 조강지처를 따라가버린 남편이었지만, 자신의 딸인 미선을 남편이 본인의 호적으로 올리는 바람에 평생 그녀는 법적으로 딸의 엄마가 될 수 없었다. 이 무슨 비극이란 말인가.
이부분에서도 열이 확 올라서 책상을 세게 쳤다. 정말로. 덕분에 책상 위에 세워둔 립스틱들이 와르르 쓰러지고야 말았지만.

장편 소설이라 줄거리를 이야기하면 끝이 없을 것이다. 아마 밤을 새워도 모자라겠지. 살면서 에세이가 아닌 소설을 이렇게 재미있게 깊이 몰입하며 읽어본 적은 처음이다. 다시 이런 소설을 만날 수 있을까. 왜 나는 그동안 한사코 에세이만 고집했을까. 좋은 에세이를 쓰려면 오로지 에세이만 읽어야 하는 것은 아닌데. 오히려 소설 속에서 난 더 많은 글감들을 얻었고 다채로운 표현들을 익혔는데 말이다.

지난 7~8년간 에세이만 고집했던 내가, 미워졌다. 진작에 소설을 읽었더라면, 들여다봤더라면, 재미를 들였더라면 조금은 사고의 폭이 넓어지지 않았을까. 문장력이 풍부해지지 않았을까. 진부한 표현을 덜 쓰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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