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맘 알아요. “
하늘을 올려봤는데 가을 하늘이다.
‘가을이 왔다.’ 싶으면 고궁에 가고 싶어진다. 궁 담벼락만 보여도 마음이 그렇게 좋을 수 없다. 몇 해나 묵은 병이다.
햇살은 여름이지만 하늘은 가을이던 8월 끝날 경복궁까지 갔더니 가슴이 숭덩숭덩 다른 곳도 가보라 했다.
그래 어릴 때 다녔던 성당을 가보자.
종로 근처 정확한 위치는 모르는 그곳을 길 찾기로 눌러보았다. ‘세종로 성당’
경복궁역 건너 서울경찰청 쪽에 있었다.
“!”
최근까지도 종종 오가던 서촌과 세종문화회관 가까이에 과거의 장소가 있었다.
내가 다섯 살 때 부모님은 아빠의 직장 때문에 서울로 와 종로구청 근처에 집을 구했다. 몸이 약한 아빠를 위해 엄마가 아빠 회사 바로 앞으로 정한 것이다.
덕분에 나는 초등학교까지 1.2킬로, 성당까지 1킬로를 걸어 다녔다.
‘ 이게 맞아요 엄마? ’
집에서 덕수 초등학교까지 가려면 광화문 지하도를 건너야 했다.
하굣길 광화문 지하도엔 계단을 넘는 철 장난감, 효자손, 천자문책등을 파는 좌판이 있었다.
매일 보는 풍경이지만 하나하나 다 구경하고 나와 지금의 교보문고 뒤편 골목으로 꺾으면 뱀탕집이 있었다. 유리진열장을 타고 기어오르는 뱀의 하얀 배를 또 한참 구경하다 집으로 갔다.
성당을 가는 날은 세종로 지하차도를 건너야 했는데 차도와 인도가 있는 지하의 어두운 그 길이 무서워 긴장하며 건넜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다.
그 성당을 40여 년 만에 가 본 것이다.
들어서니 살짝 경사진 작은 마당이 익숙하다.
‘맞아 그 마당 맞아! ‘
대성당 안으로 들어갔다.
크지 않은 성당이어서 신자들끼리 좁혀 앉아 미사를 드렸다.
마침 그날이 그곳에서 5년을 계시다 은퇴하는 주임신부님의 마지막 교중미사였다.
목소리가 부드럽고 젊어 은퇴 연령의 신부님 같지가 않았다.
미사 후 복사단 어린이들의 신부님 환송 노래와 율동 선물, 그리곤 줄지어 꽃을 한 송이씩 드리는 순서가 이어졌다.
앉아서 손뼉 치고 괜히 미소 짓다 보니 그 시절의 내가 보인다.
유치원의 나, 초등학교 2학년의 나도 떠올랐다.
‘가만 그때 엄마 아빠는 몇 살이셨지? 어머 서른다섯, 서른일곱?’
지금의 나보다도 훨씬 젊은 부모님 모습을 떠올려본다. 눈물이 주르륵 흐른다.
아이 걸음으로 가기엔 먼 이곳까지 아이의 주일을 엄격하게 챙기던 30대의 젊은 부부.
어떤 마음으로 나를 보내고 키우신 걸까.
희망으로 가득했고 힘든 줄도 몰랐겠지?
후회는 없으실까.
그때의 엄마 아빠는 그때의 당신들보다 훨씬 나이 든 모습의 내가 이곳에 다시 와서 우리의 그 시절을 떠올릴 것은 생각도 못하셨겠지.
일요일 아침 어린이 만화가 막 시작했는데 “이제 끄고 성당 가라” 는 부모님의 목소리에 억울함을 꾹 참고 순순히 집을 나설 때의 속상한 마음도 아직 또렷하다.
그렇게 한참을 걸어 성당 마당을 들어서는 아홉 살의 내가 보인다. 교리 후 간식을 받아 든 모습도 보인다.
초등학교 2학년 가을에 우리 가족은 다른 동네로 이사를 했다.
아빠가 서울살이에 적응하신 것 같자 엄마는 성당이 바로 길 건너이고 학교도 바로 옆인 동네를 찾았다고 그곳으로 이사 가야 한다 하고는 바로 실행에 옮기셨다.
그 후 사십여 년 이 지나 중년이 되어 다시 왔다. 어릴 적 나와 젊은 부모님을 상상해 보다가 흐른 눈물을 살짝 찍어내는데 옆자리 나이 지긋한 어르신께서 고개를 돌려 내 얼굴 가까이 들여다보셨다.
눈이 마주치자 끄덕하고 미소 지으셨다.
나도 수줍게 마주 웃었다.
“그 맘 알아요 울어도 좋은 순간이에요 “ 하는 것 같았다.
그분이 내 생각의 꼬리를 읽고 마음까지 아셨을 리는 없지만, 서로 다른 생각이었다 해도 그 순간 내게 기울여준 잠시의 공감이 큰 따뜻함으로 남았다.
낯선 사람에게 나누어준 위로고 선함이었다.
그분의 깊고 짧은 눈길은 마치 내 부모님의 젊은 시절에 박수를 한번 얹어 주신 것 같았다.
나도 그분에게 축복을 빈다.
- 가을에 궁에 가고 싶기에 ‘전생에 공주였나’ 맘껏 상상했는데 이 글을 쓰다 보니 불현듯 가을에 이사를 나온 어린 시절 기억 때문인가 생각이 든다.
아아 … 맞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