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적으로 사람은 기질적으로나 경험적으로 우울함을 가지고 살아가기도 한다. 그런 사람은 종종 세상을 바닥에서 올려다보며 하루를 버틴다. 겉으로는 웃고 있어도 마음 한켠은 늘 무겁게 가라앉아 있고, 아무 일도 하지 않아도 숨이 가쁘며 단지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에너지가 소모된다. 누군가와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누는 일은 마치 무거운 돌을 굴리는 일처럼 어렵고, 웃음조차 피로하며 미소를 지을 때마다 마음이 닳아간다.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일도 그런 사람에게는 하나의 훈련이며, 대화와 공감, 눈맞춤 같은 것들이 본능이 아니라 의지로 이루어진다. 하루의 대부분은 감정의 무게를 견디는 싸움이 되고, 그 싸움 속에서 그 사람은 점점 자신을 잃어간다. 그러다 어느 날, 그 사람은 우울증 약을 먹기 시작한다.
처음 우울증 약을 복용했을 때 세상은 조금 달라진다. 갑자기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지만, 모든 감정의 파도가 낮아지고 기쁨도 슬픔도 두려움도 분노도 같은 거리에서 느껴진다. 사람은 마치 투명한 유리벽 너머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듯한 감각을 느끼며, 모든 것이 멀리 있었고 그래서 조용했다. 그 조용함 속에서 사람은 오랜만에 평화를 느끼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도 괜찮다고 느낀다. 사람들이 곁에 있어도 숨이 막히지 않고, 그저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이 위안이 된다. 그때 처음으로 편안함이라는 감정을 알게 되며, 그전에는 그런 상태가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조차 몰랐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미 그 편안함 속에서 살고 있었고, 그들은 힘들이지 않아도 사람들과 어울렸으며 노력하지 않아도 하루를 견딜 수 있었다. 그 평범함이 얼마나 멀고도 값진 것인지 사람은 그제야 깨닫고, 평범해지기 위해 얼마나 많은 에너지를 써왔는지를 비로소 이해하게 된다. 매일같이 무거운 마음을 들어 올려 억지로 웃어야 했던 날들을 떠올리며, 그 무게를 모르는 세상이 때로는 서운하게 느껴진다. 그러나 그 서운함마저 조용히 가라앉고, 우울증 약은 사람의 감정의 파도를 잔잔하게 만든다. 그 잔잔함은 마치 잃어버렸던 안식 같아서, 사람은 그 고요를 사랑하게 된다.
시간이 지나고 우울증 약의 용량을 줄이기 시작하면 감각이 서서히 돌아온다. 작은 소리에도 마음이 흔들리고, 사소한 일에도 눈물이 흐르며, 세상이 다시 강렬하게 사람의 안으로 밀려든다. 기쁨은 찬란하지만 불안도 함께 찾아오고, 모든 것이 너무 생생해서 가끔은 아프다. 그제야 우울증 약이 감각을 무디게 했다는 것을 깨닫지만, 그 무딤이 필요했던 시간도 분명히 있었다. 무딤은 사람을 살게 했고, 개방은 사람을 깨우게 했다. 그 둘의 경계에서 사람은 비로소 자신을 이해하기 시작하고, 완전히 무디지도 완전히 열리지도 않은 그 중간 어딘가에서 숨을 고른다. 이제는 어느 쪽이 옳은지 묻지 않는다. 정답은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삶은 균형을 찾아가는 긴 여정일 뿐이며, 감정이 무뎌질 때는 그 나름의 이유가 있고 감각이 예민해질 때도 그것대로의 진실이 있다. 사람은 이제 어느 한쪽을 부정하지 않는다. 무뎌짐 속의 평온도, 개방 속의 생동감도 모두 자신 안의 일부임을 안다. 그 둘 사이를 오가며 사람은 자신을 배워가고, 때로는 멀어지고 때로는 가까워지며 계속 살아간다. 감정의 색이 바래질 때도, 다시 짙어질 때도 괜찮다. 모든 감정은 결국 자신을 이해하게 하는 신호이기 때문이다. 이제 사람은 그 신호들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저 관찰하고 흘려보내며 그 속에서 호흡을 찾는다. 그리고 오늘도 걸어간다. 무뎌짐과 개방, 그 사이 어딘가로. 바로 그곳이 사람이 살아 있는 자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