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에 맞추기가 힘들어 질 때

by 동이

우리는 알게 모르게 타인의 기분이라는 거울 앞에서 매일 표정을 연습합니다. 그들의 작은 떨림과 기대에 맞추어 내 입꼬리의 각도를 섬세하게 조절해왔습니다. 아침의 햇살처럼 밝게 웃어야 했고, 때로는 깊은 밤의 정적처럼 신중하게 침묵해야 했습니다. 그 모든 노력은 나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오직 타인과의 관계를 매끄럽게 만들기 위함이었습니다. 마치 가면을 쓰고 연극 무대에 오르는 배우처럼, 나는 쉼 없이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그러나 연극이 끝난 후에도 가면을 벗지 못하고 일상으로 돌아오는 날들이 많았습니다. 가장 친근해야 할 내 본래의 얼굴을 잃어버린 듯한 낯선 감각이 엄습해왔습니다. 타인의 기대라는 물살에 휩쓸려 내 마음의 모양이 조금씩 마모되어갔습니다. 정작 내면의 나침반은 어느 방향을 가리키는지 잊은 채, 오직 외부의 소리만을 좇아 달렸습니다. 이제 와 돌아보니, 그 모든 친절과 배려가 나를 향한 것이었는지 의문이 듭니다. 거울을 들여다보았을 때, 깊은 피로의 흔적만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습니다. 나의 내면은 조각조각 부서지기 직전의 유리처럼 위태로워졌습니다. 이 모든 것이 남을 위한 봉사가 아닌, 나 자신을 향한 소모였음을 깨닫습니다. 더 이상 스스로를 속일 수 없는 지점까지 왔음을 몸이 먼저 알고 고통을 발산합니다. 닳아버린 마음은 더 이상 어떤 새로운 감정의 자극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오늘은 그 모든 감정 노동의 무게에 지쳐 주저앉아버린 날입니다. 숨 쉬는 것조차 버거울 만큼, 영혼의 에너지 레벨이 최저점에 도달했습니다. 나는 잠시 이 세상의 모든 의무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강렬한 충동을 느낍니다. 이 무거운 피로의 짐을 내려놓을 단 한 사람의 공간이 간절해집니다. 그 공간은 오직 나만이 허락할 수 있는 침묵의 심해(深海)여야만 합니다.

그동안 나는 예민한 안테나처럼 타인의 감정을 실시간으로 수신해왔습니다. 그들이 원하는 온도를 맞추기 위해 내 감정의 체온을 수시로 높이고 낮추었습니다. 혹시나 상대방이 불편하지 않을까 끊임없이 걱정하는 것이 일상이었습니다. 언제나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그 안테나가 이제는 부러지기 직전의 고통을 호소합니다. 더 이상 타인을 향한 주파수를 맞추는 일이 불가능해졌음을 온몸으로 감지합니다. 이제 그 안테나를 향해 힘을 주어 '툭'하고 끊어버릴 용기가 필요합니다. 이 순간, 나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세상의 요구에 대한 단절입니다. 잠시 동안 모든 연락과 소통을 멈추고, 나만의 무선 통신망을 구축해야 합니다. 타인과의 연결을 끊는 행위가 이토록 해방감을 줄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느낍니다. 비로소 내 주변의 공기가 나를 중심으로 다시 흐르기 시작합니다. 다른 사람의 기분을 살피지 않아도 된다는 자유가 온몸을 감쌉니다. 이 순간의 고독은 외로움이 아니라, 스스로를 지키는 가장 강력한 방어막입니다. 문득 깨닫습니다, 나는 너무 오랫동안 나를 낯선 곳에 방치해왔다는 것을. 이제 집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임을 알리는 내면의 작은 목소리가 들립니다. 그 목소리는 친절이나 응원이 아닌, 그저 '돌아오라'는 담백한 명령입니다. 돌아온 곳은 화려한 응원 대신 조용한 침묵만이 존재하는 나의 방입니다. 방 안의 어둠 속에서 나는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가 없습니다. 내가 지금 울고 싶은지, 소리를 지르고 싶은지, 혹은 그저 멍하니 있고 싶은지를 정직하게 마주합니다. 그 모든 감정은 오직 나만의 것이기에, 그 누구에게도 해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안테나를 끈 순간, 비로소 나는 나만의 주파수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오늘은 아무에게도 친절할 의무가 없는 밤입니다. 습관처럼 타인을 향해 내밀려던 손길을 거두고, 나 자신을 감싸 안습니다. 굳이 밝게 웃어 보일 필요도 없고, 굳이 괜찮은 척 연기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 밤은 오직 나의 침묵과 나의 붕괴를 위해 존재하는 시간입니다. 세상의 모든 요구와 명령이 닿지 않는 깊은 물속으로 스스로를 가라앉힙니다. 나는 마치 바닥으로 침잠하는 돌멩이처럼, 중력에 순응하며 깊숙이 내려갑니다. 그 침묵 속에서 비로소 나의 진짜 무게를 느낍니다. 그 무게는 무겁지만, 이제는 나를 짓누르는 압력이 아니라 나를 붙잡아주는 닻이 됩니다. 온전히 나만의 침묵 속으로 깊이, 더 깊이 가라앉는 행위는 명상과 같습니다. 소음과 자극으로 가득했던 낮과는 완전히 단절된, 평화로운 수중 세계입니다. 그곳에서 나는 나를 둘러싼 모든 공포와 강박을 물방울처럼 흘려보냅니다. 마음속의 소용돌이도 힘을 잃고 잔잔하게 흩어집니다. 나를 힘들게 했던 모든 기억들이 먼 수평선 너머로 사라지는 것을 지켜봅니다. 숨 쉬는 법조차 잊었던 낮의 긴장감은 이곳에서 서서히 이완됩니다. 차가운 공기가 폐 속까지 깊숙이 들어와 낡은 공기를 밀어냅니다. 이 밤은 나의 영혼이 스스로를 닦아내는 정화의 시간입니다. 나는 나를 힘들게 했던 모든 상황과 인연으로부터 잠시 해방되었습니다. 이 침묵의 방 안에서 나는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될 필요가 없습니다. 텅 빈 나를 온전히 수용하고, 그 텅 빔을 따뜻한 공간으로 채워 넣습니다. 나는 이 고독의 시간을 통해 다시 일어설 힘의 근원을 발견합니다.

해결하려 애쓰지 않는다는 것은 가장 강력한 치유의 시작입니다. 세상의 모든 일은 내가 억지로 힘을 주지 않아도 흘러가기 마련입니다. 나는 그저 흐르는 시간 위에 나를 맡기고, 스스로 복원되기를 기다립니다. 잠시 멈춘다는 것은 곧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한 웅크림입니다. 이 멈춤 속에서 나의 심장이 다시 원래의 리듬을 되찾아갑니다. 불필요하게 빨랐던 모든 박동들이 고요해지고, 안정된 속도를 찾습니다. 이 침묵의 밤이 끝나면, 나는 이 고독의 기억을 간직하고 나갈 것입니다. 타인을 향했던 안테나는 이제 내 안의 주파수를 맞추는 데 사용될 것입니다. 닳아버렸던 마음의 표면은 밤의 정적 속에서 조금씩 매끄러워집니다.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이 고요 속에서 질문합니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서두르지 않아도 됩니다. 단지 질문을 던지는 행위 자체만으로도 나는 다시 살아있음을 느낍니다. 새벽의 이슬이 나뭇잎을 적시듯, 새로운 기운이 나를 채웁니다. 내일의 나는 오늘 밤의 침묵을 발판 삼아 다시 태어날 것입니다. 그때의 나는 굳이 노력하지 않아도 진실된 표정을 지을 수 있을 것입니다. 나를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이제는 더 자주 이 침묵의 방을 찾아야 합니다. 타인의 빛에 기대지 않고, 내 안의 작은 불빛을 스스로 지켜내야 합니다. 이 밤은 나에게 주어진 가장 값진 선물이며, 생존을 위한 필수적인 과정입니다. 깊이 가라앉은 만큼, 내일은 더 가볍게 수면 위로 떠오를 수 있을 것입니다. 온전히 나만의 침묵 속에서 맞이할 새로운 아침의 빛을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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