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피아노와 고무신
“카즈오, 영도다리 보러 안 갈래?”
용수가 뒷짐을 지고 제기를 차면서 묻습니다. 반쯤 접어 올린 하얀 바지에 검정 고무신을 신었습니다.
제기의 하얀 종이가 팔랑팔랑 춤을 춥니다. 나비가 나풀거리는 것 같습니다.
“너무 멀지 않니?”
카즈오도 제기차기를 하며 대꾸합니다. 구두를 신은 채 차려니 금세 제기는 나가떨어지고 맙니다. 구두를 벗고 다시 차자 제기가 양말에 닿아 발이 아픕니다.
용수는 이제 오른발 왼발 번갈아 찹니다. 발길을 멈추지도 않고 묻습니다.
“니 봤나? 영도다리 하늘 높이 들려 올라가는 거. 진짜 멋있대이.”
용수는 카즈오가 대답도 하기 전에 제기를 주머니에 집어넣습니다. 눈짓을 한 번 하더니 냅다 뛰기 시작합니다.
“용수야, 같이 가!”
그 뒤를 허겁지겁 카즈오가 따라갑니다.
시장통의 가구점, 과자 가게를 지나 세탁소를 지나칩니다. 두 사람은 약속이나 한 듯 갑자기 멈춰 섰습니다. 참새방앗간 같은 장난감 가게 앞이기 때문입니다.
유리 진열장에 이마를 대고 들여다봅니다. 눈이 커다래지고 침이 꼴딱 넘어갑니다.
“우와~. 새로 나온 그림 딱지다!”
팽이, 구슬 등등 갖고 싶은 것이 너무도 많습니다.
빨간 기모노 인형과 나란히 금발에 파란 눈동자를 가진 서양 인형도 있습니다.
바로 옆에는 악기점이 있습니다. 용수가 피아노를 가리키며 말합니다.
“저 풍금은 억수로 크네. 나는 풍금에 맞춰 창가 부를 때가 제일 신나더라.”
“아, 저건 풍금이 아니고 피아노야. 우리 학교에 있어.”
“피아노라꼬? 너거 학교는 좋겠다. 피아노도 있고.”
용수가 노래를 흥얼거리다 물었습니다.
“카즈오 니는 학교에서 무슨 시간이 제일 좋은데?”
“과학 시간. 현미경으로 관찰도 하고 별자리 알아보는 것도 재미있어.”
“엉? 현미경? 도통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가자!”
두 사람은 다시 뛰기 시작합니다. 시장통을 빠져나와 토성 역을 지나칩니다.
땡 땡 땡 땡!
전차가 미끄러지듯 역으로 들어옵니다. 온천장에서 출발하여 종점에 도착한 것입니다. 전차는 초록색 몸통에 머리엔 장수벌레 같은 뿔을 달고 있습니다. 기모노를 입은 아주머니와 중절모를 쓴 아저씨가 내려왔습니다.
“우렁차게 토하는 기적 소리에/ 남대문을 등지고 떠나가서/
빨리 부는 바람의 형세 같으니/ 날개 가진 새라도 못 따르겠네.”
용수가 ‘경부철도가’를 흥얼거리며 얼른 전차 뒷문으로 올라탑니다.
“야, 용수야! 어디 가?”
카즈오가 눈이 휘둥그레져 외칩니다.
“따라온나! 괜찮다.”
용수는 전차 안을 통과해 앞문으로 재빨리 내려왔습니다. 카즈오도 할 수 없이 뒤따라 했습니다.
“히히, 재미있제? 오랜만에 전차 타봤다 아이가.”
카즈오가 씽긋 웃었습니다.
다이쇼(대정)공원을 지납니다. 숲이 우거진 언덕길이라 숨이 찹니다. 부산에서 제일 넓은 운동장입니다. 야구대회를 하던 곳이 요즈음은 군사 훈련 하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선수 대신 군인들이 총을 차고 줄지어 있습니다.
자갈치 시장이 가까워졌습니다. 바람을 타고 비린내가 코끝을 찌릅니다. 손수레에 잔뜩 짐을 싫은 짐꾼들이 분주하게 지나갑니다.
나룻배가 싣고 온 생선이 허연 배를 드러내고 줄지어 누웠습니다.
“어서 오이소! 싱싱합니더.”
흰 수건을 머리에 두른 아주머니들이 쪼그리고 앉아 손님을 기다립니다.
“다 왔다. 여기서 쪼매만 기다리면 다리 올라갈 끼다.”
바닷가 바위에 나란히 걸터앉아 때를 기다렸습니다.
드디어 영도다리 한쪽이 하늘 높이 들려 비스듬히 섰습니다.
그 아래로 커다란 배가 검은 실타래 연기를 뿜으며 지나갔습니다. 하얀 갈매기들이 뒤따라갑니다.
“저 무거운 다리가 어떻게 높이 올라가지? 신기하네.”
카즈오는 처음 보는 광경이 놀랍기만 합니다.
돌아오는 길에 두 사람은 약속을 했습니다. 카즈오 학교의 피아노를 보러 가기로.
캄캄한 밤, 학교 강당으로 몰래 숨어들어 갔습니다. 어둠 속을 더듬어가자 커다란 피아노가 있었습니다.
“우와! 진짜 피아노네.”
용수가 좋아서 소리쳤습니다.
카즈오가 강당의 묵직한 커튼을 열어젖혔습니다. 창문으로 하얀 달빛이 들어와 두 사람 얼굴을 비추었습니다. 피아노 앞에 나란히 앉았습니다.
딩동댕 딩동댕 동!
용수가 배워본 적도 없는 피아노를 마음껏 두드렸습니다. 리듬을 타고 몸을 이리저리 움직였습니다. 눈을 지그시 감자 끝도 없는 파란 바다가 눈앞에 펼쳐졌습니다.
피아노 멜로디에 맞춰 파도가 춤을 춥니다. 그 위를 갈매기들이 날아다닙니다. 갑자기 하늘에서 환한 빛이 내려와 용수를 비추었습니다. 눈이 부실 정도입니다. 그러자 용수의 손놀림이 더욱 빨라졌습니다.
“다레다? (누구냐?)”
경비 아저씨가 들어와 소리쳤습니다. 손전등 불빛이 두 사람을 매섭게 쏘아댔습니다. 눈이 부셔 손으로 눈을 가렸습니다. 두 사람은 벌떡 제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아니, 너는 조센징이잖아?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들어와?”
경비 아저씨가 눈을 부라렸습니다. 용수는 너무 놀라 딸꾹질이 났습니다.
“죄송합니다. 2학년 노무라예요. 얘는 친구이고요. 제가 피아노 쳐보고 싶어서 데리고 왔어요.”
카즈오가 말하자 아저씨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습니다.
“조센징 친구라니. 용서해주는 건 이번 딱 한 번이야. 어서 집으로 돌아가!”
두 사람은 부리나케 도망쳐 나왔습니다.
교문을 빠져나와 배를 움켜잡고 웃었습니다.
여름에는 물놀이가 최고였습니다.
보수천 양쪽에는 수양버들이 하늘하늘 춤췄습니다. 초록 그늘에 들어가면 사각사각 바람 노래가 들렸습니다. 보석처럼 맑은 개울물은 한여름이라도 발이 시릴 정도입니다.
개울 위쪽에는 까만 통나무 다리가 있었습니다. 그 아래 얕은 폭포처럼 물이 내리쏟아지고 있었습니다. 마치 국수 실타래를 늘어놓은 것 같습니다.
“누가 오래 참나 내기해보자.”
용수와 카즈오는 물이 떨어지는 곳에 나란히 팔짱을 끼고 앉았습니다.
잠시 후 입술이 파래지고 턱이 떨렸습니다. 이빨 부딪치는 소리도 났습니다.
그러자 용수가 고무신을 개울 아래로 휙 내던졌습니다. 동동 떠내려가는 고무신을 앞다퉈 낚아챘습니다. 용수 개구리헤엄은 뒤뚱거리지만 빠릅니다.
“추워서 안 되겠어. 나가자. 용수야.”
물가로 나왔습니다. 시냇가 돌들이 햇빛을 받아 따끈따끈합니다.
“아, 따뜻해.”
카즈오가 따끈한 돌멩이를 끌어안고 몸을 데웁니다. 차가운 몸이 순식간에 따뜻해집니다. 돌 위에 벗어둔 옷도 바짝 말랐습니다.
뱃속에서 꾸르륵 소리가 아우성칩니다. 카즈오가 가져온 도시락을 펼쳤습니다.
“우와! 우메보시(매실) 주먹밥이네. 맛있겠다.”
용수 입이 귀에 걸렸습니다.
“용수 너 좋아한다고 실컷 먹으래. 엄마가.”
주먹밥을 크게 한입 먹으니 새콤하고 달짝지근한 맛이 입안에 가득합니다.
다시 개울가 모래를 파고 모래성을 쌓았습니다. 터널도 만들었습니다.
용수가 고무신 한 짝을 뒤집어 접고는 다른 한 짝에 끼웠습니다.
“우와! 그거 트럭 아니야?”
카즈오 눈이 동그래졌습니다.
“응, 한 짝을 다시 산처럼 접어 이렇게 끼우면 뭐가 되게?”
“우와! 장갑차로 변했네.”
용수가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합니다.
“그렇지, 물 위에 띄우면 통통배도 되고······.”
“나도 한번 만들어볼래.”
카즈오가 고무신을 받아들었습니다. 두세 군데 땜질하여 덧댄 고무신은 말랑말랑했습니다. 밑창에 새겨진 별 상표는 닳아서 반쯤 핀 꽃 모양이 되었습니다. 고무신은 한 움큼 잡으면 마음대로 휘었습니다. 꼬부라져 있다가도 손을 놓으면 오뚝이처럼 팔딱 되돌아옵니다. 고무신을 접어 트럭을 만들었습니다.
“부웅부웅~.”
고무신 트럭은 모래 터널 사이를 바쁘게 달렸습니다.
카즈오는 고무신이 그렇게 재미있는 장난감인지 처음 알았습니다.
해거름이 다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다다이마(지금 돌아왔어요).”
현관에 들어서자 아버지가 힐끗 쳐다보며 말했습니다.
“어디서 놀다 이제 돌아와? 옷 꼬락서니하곤······.”
“용수랑 물놀이 했어요. 아버지, 저도 검정 고무신 사주세요.”
“뭐? 고무신? 네가 조센징이냐? 조선 놈과 어울리지 말라고 그렇게 일렀건만. 쌔고 쌘 일본 친구들 놔두고 하필이면······. 쯧쯧.”
아버지는 달항아리를 부드러운 천으로 닦다 말고 소리쳤습니다.
아버지 취미는 조선의 백자를 비롯한 불상, 그림 등 골동품을 모으는 것입니다. 집안 곳곳에 빈틈이 없을 정도로 넘쳐납니다.
“좋아. 그야말로 보름달을 닮은 항아리야.”
틈이 날 때마다 들여다보며 좋아했습니다.
그런 아버지이지만 조선인 친구와 노는 것은 탐탁지 않게 생각했습니다.
곁에서 바느질하던 엄마가 카즈오 편을 들었습니다.
“놔둬요. 둘이 얼마나 사이좋게 노는데. 조선 아이면 어때요? 그 덕에 카즈오가 요즈음 병치레도 않고 얼마나 건강해졌는지 아세요?”
“애 교육 좀 제대로 시켜요. 당신이 그렇게 감싸고돌려고만 하지 말고. 하나밖에 없는 자식이 저리 약해빠져선.”
아버지가 문을 쾅 닫고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엄마는 카즈오를 보며 눈을 찡긋해 보였습니다. 카즈오가 활짝 웃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