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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열음 Feb 06. 2022

밥의 모순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계속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걸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부모와 자식이라는 이름을 무시하고 남남처럼 살아도 되는지, 아침에 눈을 뜨면 그가 출근해있기를 바라고 저녁에는 그가 꽤 다정한 목소리로 퇴근한다고 말할 때 기쁨보다는 답답함을 느끼는 것이 합당할까. 우리는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묶이는 것 말고는 공통된 기억을 공유할 일이 많지 않다. 그것이 문제일지도 모른다.


어느 순간부터 당연한 온도차를 느끼며 동생에게는 ‘우리 아들’이라는 칭호를 붙이는 아빠의 불합리함을 목도해왔다. 나는 매번 밥때가 되면 집으로 돌아가야 할 것만 같은 귀소 본능을 부정하며, 엄마와 딸의 경계에서 어느 쪽으로도 밀려나지 못한 채 중립을 유지해왔다. 그렇기에 나는 더욱 밖에서 식사를 해결하려고 무의식 중에 노력했다. 사실 무의식이라기보다는 일종의 복수일지도. 암묵적인 식사 당번이라는 틀 없는 감옥에 나를 가둔 이들에 대한 복수. 그러나 그마저도 일말의 죄책감이 끼어들어, 매 끼니마다 죄책감과 통쾌함을 곁들여야 했다. 그것은 결코 만족스러운 식사가 아니었다.



나는 미움을 포기하지 않기로 했고, 이는 아빠를 미워하는 스스로에 대한 증오로 연결되었다.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싶은 간절한 소망과 대립되는 상황에 대한 원망, 그럼에도 내려놓을 수 없는 복수심이 수년간 나를 괴롭혔다. 사람이 마음에 한을 품으면 삶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진다. 사랑을 받으면서도 줄 줄 모르고, 아주 작은 생채기에도 ‘네가 나한테 그럴 줄 알았어’ 하고 마는 옹졸함을 갖게 된다. 결국 타인 혐오의 모습을 띤 자기 혐오로 변모하여, 있지도 않은 상황까지 끌어모아 ‘그는 그럴 거야’ 하고 단정짓고 분을 키워나간다. 내게 아빠에 대한 마음은 쉽게 무너지지 않는 성벽이었다.


밥의 모순, 그것이 내가 하고 싶은 말이다. 살기 위해 먹는 밥이 나를 서서히 잠식시키고 있었다.  끼니마다 적절한 식사를 적절한 때에 성공적으로 차려내야 한다는 압박감, 스스로  커온 딸이기에 앞으로도 군말 없이  자라야 한다는 책임감이 식사로서의 행복을 앗아간 듯하다. 스스로를  차리는 존재로 한정했고,  밖으로 걸어나올 생각을 아예 하지 않았다. 그저 나에게 밥은 모순 덩어리라고, 나를  굶주리게  뿐이라고 악을 쓰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 미움에도 한계가 왔는지 ‘내게도 행복한 가정을 가질 권리가 있다 생각이 들었다.  역시 ‘계속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걸까라는 의문이, 날선 걸음에 제동을  것이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참고 견뎌왔던 모든 관행들을 꺼내어 도려낸다면 파도가 치고 고통이 일겠지. 그치만 바다의 흐름을 뒤바꿀  있겠지. 내게 그런 용기가 생기기를 기도해왔다.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 성경 말씀이  마음을  찔렀기 때문이다.


더욱이 ‘금쪽 같은 내 새끼’를 시청하기를 권하며 곁을 지켜주었던 친구들의 응원에 힘입어, 아빠와의 엉킨 실을 풀기 위한 대화의 틈을 노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1월 21일 금요일 저녁 11시 30분, 갑작스럽게 빨래를 개러 나온 아빠의 옆에서 조용히 물었다.



“아빠는 나한테 바라는 거 없어?”

-“응 없어, 지금처럼만 별탈없이 잘 자라면 돼”


“나는 있어, 나는 아빠가 요리를 좀 할 줄 알았으면 해”

-“진짜? 몰랐네, 예전에 해보니까 아빠는 요리가 좀 서럽더라”



파문이 일었고 아빠와의 짧고 굵은 대화를 통해 새로운 사실을 알았다. 아빠는 전혀 눈치채고 있지 못했다는 사실. 그리고 더 놀라운 것은 내가 아빠를 대신해 서러웠다는 말을 하자마자, 아빠의 입에서 ‘미안하다’는 말이 나왔다는 것. 나는 그동안 아빠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듣고 싶었나보다. 혼자 그 짐을 지게 해서 미안하다는, 진심 어린 인정을 받고 싶었던 것이다. 여느 때와 같이 터져 버린 눈물샘에 아빠도 짧은 눈물을 훔쳤고, 지금껏 돌려왔던 숱한 시뮬레이션보다 훨씬 쉽고 간결하게 문제가 해결되어버렸다.


결국 내가 생각했던 최악은 없었던 것이다. ‘내가 암묵적인 식사 당번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면 어떡하지?’, ‘내가 으로 나돌았던 시간이  많았다고 반문하면 어쩌지?’라며 고민했던 모든 걱정들은, 여러 해가 지나도록 한을 품고 혼자 썩혀온 데서 비롯된 것이었다.


 지금까지 하느라 힘들었어


이 한마디, 나 좀 봐달라는 부르짖음. 그 한마디에 담긴 용기가 내 평생을 바꿀 것이다.

아직도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분을 품고, 억울해하며 밥의 모순을 견디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딱 한마디면 된다는 것. 그 용기가 당신의 무거운 돌덩이를 내려놓게 한다는 것. 그리고 그 용기를 주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며, 숨겨둔 문제를 세상 위로 드러내는 사람은 그 이상 못할 것이 없는 사람이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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