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박눈이 내렸다
아침부터 함박눈이 내렸다.
나는 함박눈을 좋아했다.
하얀 세상에서는 허름하고 초라했던 우리 집이, 마치 눈의 나라의 집처럼 아름다웠다.
좁은 마당에 지저분하게 깔린 연탄 재들이 하얀 눈에 덮였다.
마당 중앙에는 오래된 소나무가 있었는데 할아버지가 그곳에 항상 요강을 비우셨다. 항상 지린내가 진동했던 소나무도 하얀 눈에 덮여 내 눈에는 크리스마스트리처럼 보였다.
언제나처럼 눈이 내리면 동네 아이들끼리 약속이나 한 듯이 마을 중앙으로 모인다.
마을 중앙은 우리 집 앞이었다. 집 앞에는 우물가가 있었는데 개인 수도가 설치되기 전까지 식수로 사용되었다.
약속이나 한 듯이 우리는 눈을 굴린다.
눈을 굴리고 눈사람을 만든다.
눈사람 만들 준비에 설레었다.
함박눈이 내렸다. 나는 나갈 생각에 기분이 설레었다.
그러던 중, 나는 전화를 받았다.
“ Y니?”
“누구야?”
“나야, H.”
H는 나를 싫어했다. 나도 모르게 심장이 뛰었다.
“무슨 일로?”
“우리 집에 놀러 올래?”
“지금? 눈이 많이 오는데.”
“싫어?”
“아, 아냐. 갈게, 갈 수 있어.”
나에게는 H와 친하게 지낼 수 있는 기회였고 또한 거절할 용기가 없었다.
“지금 갈게.”
“그래, 기다릴게.”
수화기 넘어 서너 명쯤 되어 보이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나는 서둘러 옷을 입었고 제일 좋은 옷을 꺼내 입었다. 나에게 가장 좋은 옷이란 깨끗한 옷을 말한다. 소매가 되도록 해지지 않은 옷으로 꼼꼼하게 골랐다.
밖으로 나갔다. 거센 눈보라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너무 추워서 바람을 등지고 걸었다. 천천히 뒤로 걸었다 다시 올바른 방향으로 걸었다를 반복했다. 15분이면 가던 거리를 거꾸로 걷다 보니 두배의 시간이 걸렸던 것 같다. 정말이지 몹시 추웠다. 그래도 도착하면 나는 따뜻한 방 안에서 놀 수 있으니 참을 수 있었다. 드디어 H의 집에 도착했다.
나는 일부러 내 몸에 쌓인 눈들을 털지 않았다. 내가 이런 상황에서도 왔음을 보여주고 싶었다. 꽁꽁 언 손가락을 쥐었다 폈다 해보았다. 손이 아주 시렸다. 집안에서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나는 언 손가락을 펴 초인종을 조심스레 눌렀다.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내가 너무 살살 눌렀나 싶어 이번에는 손가락에 힘을 잔뜩 주고 꾹 눌렀다. 잠시 뒤 문이 열렸고 H가 나왔다.
나는 H의 표정을 보고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분명 나를 반길 거라고 생각했다. 많이 추웠냐고 하면 이 정도는 괜찮다고 웃으면서 말해주려고 했다. 그런데 예상이 빗나갔다.
“어떻게 온 거야?”
“응?”
“갑자기 어떻게 왔냐고.”
“전화했잖아, 네가.”
“내가 너한테 전화를 했다고?”
심장이 쿵쾅거렸다. 추위 때문에 몸이 떨리는 것인지, 이 상황 때문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그러는 사이 집안에서 S가 나왔다. S는 H와 친했고 우리 셋은 같은 반이었다.
“왜 그래?”
S의 물음에 H가 말했다.
“내가 전화를 해서 놀러 오라고 했다는데?”
“우리랑 놀고 있는데 네가 전화 할리가 없잖아.”
S의 말에 나는 고개를 떨구었다. 더는 여기 있을 이유가 없었다.
내가 착각했나 봐, 갈게.
서둘러 말했고 몸을 돌려 밖으로 나왔다.
집으로 오는 길, 나는 많이 울었다. 그럼에도 선명히 기억하는 것은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아이들의 웃음소리였다. 그 웃음소리에는 분명 S의 웃음소리가 섞여 있었다.
누군가 나를 싫어한다는 것을 확인하는 순간은 그 비참함과 슬픔을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온몸이 떨리고 죽음이라는 단어를 생각한다. 마치 악한 누군가 나에게 죽음이란 단어를 넣어주는 것만 같다.
내가 세상에서 사라져 버리면 이 모든 순간이 편안해질 것만 같다. 느껴지는 그 모든 슬픔을 나는 눈을 맞으며 길 위에서 견디었다. 친구 집에 놀러 간다고 나왔기 때문에 집에 빨리 들어갈 수가 없었다. 함박눈이 내리는 거리는 너무도 추웠지만 나는 슬픔과 추위를 모두 견디어야 했다.
오래도록 친구가 싫었다. 함께 어울리고 이야기를 하는 그 모든 것이 싫어 오래도록 혼자였다.
눈이 오면 좋았지만 오래도록 그 슬픔이 따라다녔다. 하지만 상처는 아물고 신이 주신 최고의 선물은 망각이듯이 나는 다시 친구를 만났다.
나는 눈을 맞는다. 눈을 맞으며 그때를 기억한다. 하지만 나에게 더는 슬픔이 아니다. 슬픔이 아니라 그저 하나의 기억이다. 내리는 눈을 본다.
참, 예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