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자매 Jan 18. 2024

#02 나의 아빠에게

남탕 앞에서 아빠를 기다렸다

아빠와 같이 남탕에 들어가

등을 밀어줄 남자가

우리 집에는 없다.


내가 모셔다 드리기는 하지만

항상 입구까지만 가능.


지난주 목욕탕 다녀온 아빠,

때가 그대로 있다고

엄마가 속상해하셨다.


엄마도 이제는 연세가 있어

집에서 때 밀어주기 버겁다 하셨거든.


아빠는

스스로 밀 줄을 모르니

엄마가 답답해하면서도

속상해했다.


안 되겠다 싶어 이번 주말에

다시 목욕탕에 모시고 갔다.


사장님께 부탁해서 세신사님께

직접 현금을 드리고

아빠를 문 앞까지 배웅을 해주었다.


아빠는 많이 안 좋아지셨다.

일상생활에 버거움을 느낀다.

아빠는 인지가 없으니

그 버거움은 우리 몫이다.


시간에 맞춰

남탕 문 앞으로 가보니

아빠는 옷을 갈아입고

멍하니 서 계셨다.


그래도 엇갈리지 않고

그 자리에 있어주어서 감사했다.


신발을 찾으려고

목욕탕 열쇠를 달라고 하니

아빠는 모른다고 한다.


손, 발을 다 살펴봐도

열쇠가 없다.


어쩌나 싶었는데

어떤 남자분이 마침 들어오시길래

아빠가 54번 키를 가지고 계셨다고

죄송하지만 살펴봐달라

부탁을 드렸다.


한참 후에 아빠와 나오셨는데

없다고 하신다.


결국 사장님께 상황 설명을 드렸다.

사장님이 열쇠 못 찾으면 연락드린다고 하시길래

꼭 변상하겠다고 내 연락처를 드리고

집으로 왔다.


집에 와서 엄마가 점퍼랑 벗기니

팔꿈치 부근에 걸려있는 열쇠를 발견하셨다.

찾았는데도 화가 났다.

안쪽을 왜 살피지 않았나 나한테 화가 났다.

처음 겪은 이 상황에도 화가 난 것 같다.


열쇠 챙겨서 서둘러 목욕탕으로 갔다.

번거로우셨을 텐데

짜증 한 번을 안 내신 사장님께 감사해서

음료를 몇 개 샀다.


남탕 입구에서

조금 전 도움을 주신 분을 만났다.


열쇠 찾아서 다행이라고

마치 당신을 일처럼 좋아해 주셨다.


편의점에서 사 온 음료를 건네며

나도 모르게 아빠 얘기를 했다.


생판 모르는 남에게

이런 사적인 얘기를 해본 적이

처음인 것 같다.


그분이 하시는 말씀이

나도 나이 들어가는데

남일 같지 않아 마음이 아프다고.

살아계시는 동안 잘 모시라고.


이제 시작일 텐데

나는 벌써부터 아빠에게 짜증이 났다.

나만 몸이 닳고 아빠의 그 태연한 표정에

왜 그리 화가 나던지.

그날 목욕탕만 세 번을 간 것 같다.


아빠는 단지 아픈 것뿐인데

나는 그걸 조금도 이해해주지 않고 있다.


집에 돌아온 아빠는

이런 모든 상황은 전혀 모른 채

세신사님을 아주 흡족해했다.


가난하게만 살아온 아빠가

목욕탕은 가는 것도 감사한데

때까지 밀어주시니 너무 좋았나 보다.


아빠는 치매가 진행되면서

표정이 편안해졌다.


언제부터인가 아빠는 화가 난 얼굴이었다.

숱하게 사업을 망하고

손대는 모든 일이 실패로 돌아가자

표정이 바뀌었다.


분노했고 화를 냈으며

마음의 상태가

표정으로 그대로 드러났다.


거듭된 실패가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었던 그 욕구가

아빠를 그리 만든 것 같았다.


돌아오는 길 아빠를 쳐다보았는데

내 눈을 보며 미소를 지어주었다.


어릴 때 보던 아빠의 모습이었다.

선하게 웃는 그 모습에

나도 모르게 따라 웃었다.


어쩌면 치매는

분노로 가득 찼던 아빠의 기억을

그렇지 지워주고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우리 아빠에게는

치매가 축복이 아닐까.


내가 잊고 있던 아빠의 미소가

아빠 곁을 떠난 줄 알았던

그 미소가 다시 돌아왔다.






매거진의 이전글 ENFJ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