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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벨에포크 Feb 10. 2022

 마음을 다스리지 않기로 했다

불순물을 내뱉어 삭히지 않고, 독기 품은 얼굴을 갖기로

인도 음악이 잔잔히 깔리고 조명은 약간 어둡게 한 상태에서 각자 매트에 앉아 거울을 통해 자신의 몸을 바라본다. 하루 동안 같은 자세로 일을 하느라 찌뿌둥해진 다리를 곧게 펴고 가지런히 매트에 올려놓는다. 엉덩이와 허벅지, 종아리, 발뒤꿈치까지 매트에 힘을 주어 잘 디딛고 허리를 곧게 펴서 'ㄴ'자를 만든 상태에서 팔은 자연스레 엉덩이 옆쪽에 놓아 힘을 많이 주지 않고 지지한다. 자세의 정렬을 맞춘다. 몸이 조금 익숙해지면 허리를 좀 더 다리 쪽으로 가까이 가져간다. 허리가 굽는다면 할 수 있는 만큼의 각도에서 기다리고, 허리를 핀 상태로 다리 쪽으로 가는 것이 가능하다면 더욱더 배와 허벅지가 닿도록 한다. 이 자세를 연습하고 있으면 선생님이 문을 열고 들어온다. 선생님은 맨 앞 중앙에 수강생들이 가장 잘 보일 수 있는 자리에 앉아 "오늘 수련 시작하겠습니다. 나마스떼" 라며 인사를 하고, 수강생들도 선생님의 모습을 따라 두 손을 합장하고 "나마스떼"라고 인사를 한다. 이렇게 요가는 시작되고 오로지 매트와 내 몸으로 시퀀스를 따라 몸을 굽혔다가 접었다가 폈다가를 반복한다. '다운 독'자세에서는 열 손가락을 다 펼쳐 매트를 밀어내듯 힘을 주고, 발뒤꿈치가 땅에 더 닿을 수 있도록 호흡을 통해 중심을 발뒤꿈치 쪽으로 옮긴다. 거울을 통해서 허리가 굽었는지 확인하고 계속해서 무릎과 허리가 굽지 않도록 쭉 펼친다. 다운 독에서 5번의 호흡을 하고 다음 빈야사로 넘어간다. 몇 번의 빈야사가 끝나고 쟁기자세를 통해 '시르사아사나'로 가기 위한 몸의 준비를 하고, 머리 서기인 '시르사 아사나'를 시도한다. 매트에 머리를 대고 발가락으로 매트를 밀어 발을 몸에서 떼보려하지만 쉽게 되지 않는다. 선생님이 다른 수강생들을 도와주고 내쪽으로 오기를 기다렸다가 선생님의 도움을 받아 머리 서기를 한다. 5초 정도 혼자서 버티고 내려온다. 그리고 가장 좋아하는 사바아사나, 편안히 누운 송장 자세로 요가를 마무리한다. 


요가는 첫 직장을 다니면서 배우기 시작했다. 시가지라면 상가빌딩에 요가학원 하나쯤은 있었기에 접근성이 좋아 시작했다. 예전에 '옥주현'이 요가로 다이어트를 했다고 해서 영상을 보면서 따라 하긴 했지만 본격적으로 배워본 것은 이때였다. 전쟁 같은 직장에서 일을 하고 나와, 요가를 하러 갔다 오면 그 개운함이 하루의 피로를 잊게 해 줬다. 긴장된 몸을 이완시키고 굽어졌던 허리와 하루 종일 서 있던 다리를 쭉 펴서 종아리와 허벅지 근육을 늘리면 그렇게 개운할 수 없었다. 오로지 나에게 집중하는 시간이었다. 들이마시고, 내쉬고, 호흡을 천천히 길게 하면서 내 몸이 하나의 공기 순환 통로가 됨을 느꼈다. 그렇게 반복하다 보면 다른 일은 생각나지 않았다. 


요가는 내 성향에 잘 맞는 운동이다. 보다 정적인 운동으로 남과 나를 비교하기보다, 오로지 나에게 집중해서 이루어진다. 요가의 매력은 무엇보다 시퀀스가 있다는 것이다. 흐름에 따라 서론, 본론, 결론인 시퀀스가 흐르고 있었고, 본론에서 땀을 흘리고 결론에서 그 땀을 식힐 때면 묘한 카타르시스가 있었다. 그렇게 하나의 서사를 완성하고 나면 다른 서사들은 저 멀리 잊힌다. 마음이 차분해진다. 차분한 내 성격에 잘 맞았다. 더욱더 차분하게. 마음을 다스렸다. 나는 불순물을 빼낸다는 생각으로 숨을 내뱉었다. 

불순물이 매일 직장에서 쌓였기에. 


이 불순물은 그 행위가 의도치 않았을 지라도 '가해' 행위에 의해 쌓였다. 직장에서 법의 테투리를 벗어난 '가해' 행위에는 명확한 기준이 존재하지 않았기에 그것을 증명하는 것도 어려웠다. '분노'라는 감정이 피부를 뚫고 나와 얼굴이 붉어지기 전에 '하...'라고 어처구니없어 자연스레 나오는 숨을 땅에 내뱉었고, 미처 알아채지 못해 쌓였던 감정들은 불순물이 되어 몸에 축적되었다. 


나는 그저 이 불순물을 내 몸에 담아두고, 요가를 통해 내뱉는 것이 어쩌면 내 몸을 더 '불순물을 담는 통'으로 여겨지게 한다는 것을 느꼈다. 다른 사람에게 그렇게 여겨지도록 한 것은 물론이고 나조차도 어쩌면 그것이 당연하다 여겼다. 그러나 불순물이 쌓였다면, 그 독기를 품은 얼굴을 '가해'행위를 한 자에게 보여야 했다. 독기를 품은 얼굴에는 사람들이 쉽게 아니, 감히 '가해'행위를 하지 못하였다. 그저 불순물을 담고자 하는 사람에게 마땅히 그래야 한다는 듯이 그 행위를 할 뿐이었다. 본채 차분히 마음을 다스리는 것밖에 하지 못했던 자들은 독기 품은 얼굴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조차 알지 못한다. 눈은 크게 부릅떠야 하는 것인지, 얼마나 콧구멍을 벌름거려야 하는지, 주먹은 불끈 쥐는 것이 좋은지, 이탈리아의 제스처처럼 손가락을 만두 모양으로 모아 몇 번을 앞뒤로 휘젓는 것이 좋은지 알지 못한다. 내가 해왔던 스타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표현해보지 못한 감정이고, 길러지지 못한 근육이기 때문이다. 


나는 한 번도 누군가에게 소리를 지르며 화를 내거나, 다리를 걸어보거나, 잽을 날리거나, 업어치기를 하거나 "머리!!"라며 검도의 날을 겨눠본 적이 없다. 합법적으로 스포츠 정신이라는 명목이 안전지대를 형성하고, 그 세계의 룰 안에서 충분히 남을 이겨볼 만한 기회가 있었음에도 나는 그 기회를 가지려 하지 않았다. 그것은 나에게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으므로. 내 성향과 정 반대였기 때문에 나는 언제나 요가를 통해 내 내면을 단력했고, 필라테스를 통해 근육의 움직임을 배웠다. 화가 날 때면 5킬로를 달리는 것이 나에게 유일한 역동적인 활동이었다. 


내가 배워야 했었던 것은 운동이라는 틀 안에서
 다른 사람들과 몸으로 여러 번 싸워봐야 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힘이 센 자들에게 뭉개져 매트 밖으로 넘겨져 봐야 했다. 수없이 부딪혀서 힘이 센 자에게 두들겨 맞다 보면 더 이상 지는 것이 의미가 없어지고, 두렵지 않게 되어 '맷집'이 형성되는 경험을 했어야 했다. 그리고 그 '맷집'을 통해 단전에서 올라오는 분노를 '기합'으로 승화해 소리쳐야 했다. 기초체력을 다지고 비로소 다른 사람에게 '잽'을 날리고 그동안 연마했던 기술을 한 번 성공해 봄으로써 몸으로 이기는 경험을 해봤어야 했다. 모든 사회적인 껍데기를 벗어내고 몸과 몸이 만났을 때 '내가 저 사람을 이길 수 있다', '덤비기만 하면 무조건 내가 이긴다'는 정신이 필요했다. 내 성향에 맞는 것만 해왔다는 것은, 내 입맛에 맞는 것만 먹었다는 것이고, 내가 하기 쉬운 것만 하려 했다는 것이다. 하루 종일 쉬운 수학 문제 100개를 푸는 것보다 어려운 문제 1개 가지고 고민하는 것이, 내 실력을 더 키워주는 것처럼. 어려운 것에서 견뎌내고 고민하는 것이 필요했다. 

누군가와 대결해서 이겨보는 경험, 독기를 품은 얼굴을 내보이는 경험, 분노를 '기합'에 넣어 소리치는 경험.

그것은 어렵지만 나에게 필요한 근육이었다. 


그래서 잠시 요가는 남겨두고, 나는 주짓수를 하기로 했다.
(다 덤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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