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 사는 아이들은 여름방학 동안 놀이공원도 가고, 캐리비안베이 같은 거대한 워터파크로 놀러 갔겠지만, 코 앞에 바다가 있는 여수에서 살아온 아빠를 둔 우리 가족은 항상 작은 해수욕장이 있는 섬이나 바다로 여름휴가를 갔다. 큰 해수욕장은 안된다. 작은 해수욕장이어야 한다. 사람의 흔적이 많지 않은 곳이어야 물고기들이 흔적을 남기기 위해 그 공간에 머물고, 아빠의 소중한 여름휴가는 그 물고기들에게 사랑의 작대기를 던져야 하기 때문이다. 매번 섬이나 바다로 여름휴가를 보낸 우리들에게는 작은 돔형의 4인용 텐트가 있었다. 그때도 여름이면 캠핑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캠핑을 할 때면 역시 캠핑장비가 중요했다. (템빨 말이다.) 그러나 우리 가족의 캠핑 템은 자랑할 만한 것이 못되었고, 나는 우리 텐트보다 두배는 되는 직사각형 텐트를 가진 아이들이 부러웠다. 바다에서 물놀이를 하다가 엄마를 찾으면 그 많은 텐트 중에 가장 작은 텐트가 우리 집 텐트였기 때문이다. 새로 텐트를 사자고 몇 번이고 엄마랑 아빠를 졸라댔지만, 텐트가 있는데 뭐하러 또 텐트를 사야 하냐는 반응이었다. "좀 더 크면 좋잖아"라고 좀 더 칭얼대며 졸라봤지만 엄마 아빠에게 통하진 않았다. 내가 더 자라서 여름휴가를 더 이상 해수욕장으로 가지 않을 때까지 우리 집 텐트는 항상 그 작은 돔형 텐트였다.
그날도 우리는 돔형 4인용 텐트를 챙기고, 아빠는 낚시 장비를 트렁크에 실었고, 엄마는 우리가 먹을거리들을 아이스박스에 담았다. 정확히 어디를 갔는지는 기억이 안 난다. 매번 똑같은 곳을 갔으면 기억이 나겠지만, 여수에는 너무 많은 섬들이 있고, 그 섬들마다 또 작은 해수욕장이 있었기에.
나는 매번 우리가 어디를 가는지 몰랐다. 해수욕장이라는 것 밖에는.
우리는 도착해서 짐을 풀었다. 엄마랑 아빠가 텐트를 치고 한숨 돌리려 할 때 어딘가에서 허리가 굽은 할머니가 나타났다. 자릿세를 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자릿세가 얼만데요?"라고 엄마는 물었고 할머니는 "만 원"이라고 대답했다. 엄마는 만 원을 건넸고 할머니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어딘가로 다시 들어갔다. 나는 저 할머니는 누구길래 우리에게 자릿세를 내라고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어린 나이였지만 그게 정당한 값이 책정된 것이 아니란 것은 알 수 있었다. 그날의 여름휴가는 하필 날씨가 좋지 않았다. 하늘에는 회색 구름이 가득했고 밤이 되면 비가 올 것만 같았다. 그래서 그런지 해수욕장에는 우리 텐트를 합쳐 3개 정도밖에는 텐트가 없었고, 어느샌가 다들 철수하여 거의 우리만 남게 되었다. 그들이 언제 여기를 떠났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인적 드문 해수욕장에서 오빠랑 나는 튜브를 타고 바다에서 물놀이를 했다. 바다에는 오빠랑 나, 이렇게 둘만이 물에 둥둥 떠있었다. 물놀이하는 다른 아이들도 없고, 햇빛도 별로 없어 낮인데도 어둡고 으슥한 느낌이 들어서인지 물놀이가 별로 재밌지 않았다. 물놀이를 일찍 끝내고 엄마가 있는 텐트로 돌아왔다. 물놀이를 하고 나서 엄마는 코펠에 라면을 끓여줬다. 물놀이 후에 먹는 라면은 항상 꿀맛이었기에. 라면을 다 먹고 우리는 일찍 잠에 들었다.
새벽이 되자 비가 오기 시작했다. '우두두두'하고 빗방울이 우리의 작은 텐트를 두드렸고, 두드리는 소리들은 더욱 거세졌다. 아마 장마가 아니라 태풍이었을 것이다. 시끄러운 빗소리에 나는 잠에서 깼다. 불투명한 텐트 막 밖에서 엄마가 아침을 준비하는 실루엣이 보였다. 나는 동그랗게 포물선이 그려진 텐트 문을 열었다. 텐트 문을 여니 비가 와서 차갑고 축축한 바람이 이때다 싶어 우리 텐트 안으로 들어왔다. 텐트 앞에는 그 차가운 공기를 맞으며 엄마가 있었다. 우리의 작은 텐트는 비를 막아줄 공간도 역시나 작아서, 엄마는 불편한 자세로 꾸부려 앉아 무언가를 만들었다. 엄마가 만들고 있던 것은 아빠가 잡아온 물고기로 만드는 수제비 매운탕이었다. 엄마가 집에서 가져온 재료들과 그 당시 우리가 자주 음식에 넣어 먹었던 방아잎을 넣고 매운탕을 팔팔 끓이고 있었다. 가스버너의 덮개로 바람을 막고 밀가루 반죽을 떼서 수제비를 만들던 엄마는, 방금 일어난 우리를 보고 잘 잤냐며 밝은 목소리로 아침인사를 했다. 엄마의 밝은 모습에 무서웠던 태풍의 기운이 싹 가셨다.
엄마가 괜찮다면 우리도 괜찮은 것이었기에.
텐트 안에 작은 간이 식탁을 놓고 밥 먹을 준비를 했다. 엄마는 캠핑용 식기에 수제비 매운탕을 한 그릇씩 떠서 우리 앞에 줬다. 나는 뜨거운 그릇을 잡고 혀가 데이지 않게 조심스레 매운탕을 먹었다. 엄마가 끓인 매운탕은 환상의 맛이었다. 아빠가 무슨 물고기를 잡아왔는지 기억은 안 나지만 고기는 부드러웠고, 고춧가루를 넣어 적당히 칼칼한 국물에 무엇보다 방아잎이 향을 돋워 더 맛있게 느껴졌다. 오빠도 맛있다며 매운탕을 허겁지겁 먹었고, 엄마도 매운탕을 맛보더니 '엄마가 만든게 맛있지!'라며 자화자찬을 했고, 우리는 그렇게 매운탕을 입이 닳도록 칭찬하며 후루룩 먹었다. 정말 이때까지 먹었던 매운탕 중에 그렇게 맛있었던 것은 없었다. 엄마가 어떤 마법을 부려 그 악조건 속에서 이렇게 맛있는 매운탕을 끓인 건지 알 수 없었지만, 태풍과 비로 인해 차가운 아침 공기를 맞으며 먹었던 따뜻한 매운탕은 아직도 그 맛을 잊을 수 없다. 그 텐트 안에 아빠가 있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빠랑 같이 매운탕을 먹은 기억이 안나는 것을 보면 매운탕이 너무 맛있어서 내 기억에서 아빠를 잊었거나, 아니면 다시 낚시를 하러 갔거나, 둘 중 하나 일 것이다.
이 날 외에 다른 여름휴가에도 우리는 항상 아빠의 낚시로 인해 해수욕장을 갔지만 다른 날들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유일하게 나에게 생생하게 기억나는 우리 가족의 여름휴가는 바로 그 매운탕을 먹었던 날이다. 작은 돔형 텐트에서 4명의 가족이 몸을 붙이며 자고, 또 그 텐트 안에서 비와 바람을 피해 엄마가 만들어준 매운탕을 먹고, 그리고 그 매운탕은 아직도 잊을 수 없는 맛으로, 지금껏 내가 먹었던 가장 맛있는 음식이 되고. 그리고 또한 이때의 기억은 가장 행복했던 기억 중에 하나로 남았다.
최악이 될 수 있는 여름휴가임에도 엄마가 아침에 밝게 아침인사를 해줘서 그날은 행복한 날이 되었다. 태풍이 오고 비와 바람이 불어도 작은 돔형 텐트가 우리를 지켜주어서 행복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매운탕이 맛있어서 행복했다. 맛있었던 기억이 오래도록 남아 그때를 행복하다고 기억하는 것을 보면, 우리의 미각은 다른 감각보다 좀 더 특별한 기억 중추가 있는 게 아닌가 싶다.
어떤 상황도 맛있다는 이유로 행복하게 만들어버리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