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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에피타프에 승부를 걸어라

(그림;.theden.co.kr/news)

by 신정수



생은 참으로 복잡하기만 하다.

온통 난잡할 수도 있다.

너무나도 일그러지고, 마구 꼬여져 있을 수도 있다.

신의 엄숙하고 단호한 섭리는 전혀 찾아볼 수 없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그 누구에게는 아주 매력적일 수도, 매우 행복한 곳일 수도 있다.

오늘도 자기 정신을 잘 붙들어 매어 가며, 부단히 분투하고 있는 사람이 그래도 있을 테니 말이다.

이렇게 생은 참으로 오묘하고, 매우 다채롭기만 하다.

딱히 정답이 없는 듯하다.


그런데, 그 정답의 범주를 굳이 표현해 보자면, 과연 무어라 해야 할까?

과연 어떻게 살아가는 사람을 최후의 승자라고 말할 수 있을까?

돈을 많이 번 자?

유명인?

아주 높은 지위까지 오른 사람?

수상, 대통령 등으로 과연 최고의 자리에 올라간 사람?

명망이 아주 높은 사람?

선행이나 봉사를 많이 한 사람?

종교인 혹은 철학자?


모두 모두 정답이 맞을 수도, 아닐 수도 있다.

그런데, 그 제대로 된 정답은 아마, 당신의 마지막 자락에, 에피타프(비문)에서 주장할 수 있는 ‘당신 말과 모습의 수준’이라고 한번 생각해 볼 수 있겠다.

그런데, 그 수준이란 것은 또 무엇인가?

한마디로 표현할 수는 없겠으나, 대체적으로 보았을 때는, 아마 자신의 마지막 자락에도 자신 있게 주장할 수 있는 자기 생의 총체적 내공이라고 한번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가령, 자신의 마지막 자락에, 어떤 이는 아주 하찮은 말을 남길 것이고, 어떤 이는 매우 의미 있는 말을 남길 것이고, 또 어떤 이는 매우 고귀하고 수준 높은 말 혹은 표현을 남길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어떤 이는 불안에 떨며 쩔쩔맬 수 있을 것이고, 어떤 이는 비교적 차분한 모습을 보여줄 것이고, 또 어떤 이는 매우 담대하고 의연한 모습을 보여줄 테니 말이다.

간혹 우리 주변에서 목격할 수 있는 일부의 깨달은 자들에게는, 그분이 가진 게 별로 없어도, 신분이 별로 탁월하지 않아도, 객관적으로는 별로 내세울 게 없어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마음으로 존경해 마지않을 수 있는 그러한 깊은 내공이 있는 것이겠다.



네 에피타프에 승부를 걸어라-1.jpg “네 에피타프에 승부를 걸어라!”(그림; stoneletters.com/blog)



이해를 돕기 위해, 내 주변의 이야기를 한번 해 보자.

내 당숙은 거의 유명세가 없어도, 별로 가진 게 많지 않아도, 아주 편안하고 행복하게 생을 잘 마무리하신 것 같다.

후세들의 마음속에 항상 인자한 모습으로, 늘 자상하고 자애로운 어른으로 남아 있었다.

언제나 덕담을 아끼지 않으시고, 늘 웃으며 모든 이들을 대했던 것이다.

사람이, 보통은, 나이 들어 여기저기 많이 아프고, 생활하기 힘들어지고, 잘 움직이기조차 어려운 상황이라면, 누구라도 짜증을 잘 내고, 때로 헛소리를 하기도 하고, 때로 어린아이와 같이 여려지기도 하고, 여러모로 그 심지와 의지가 매우 약해지기가 쉬운 법인 데, 당숙은 그러한 흐트러진 모습이 거의 없이, 늘 모든 고충을 혼자 내적으로 잘 삭혀낸 듯하다.

그저 옆에서 보기에는, 너무나 편안해 보이고, 너무나 대단한 어른의 모습이라, 마지막 순간까지, 누구 하나 함부로 흐트러진 이야기도 하지 못했을 정도였다.

이런 게 당신 생의 진정한 내공이 아니라면, 최고의 덕목이 아니라면,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당신은 이웃들의 마음속에, 후손들의 가슴속에, 영원히 사랑받는 그러한 큰 어른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위의 이야기에서도 보듯이, 당신 생의 최후의 승부는 과연 그 마지막 자락에 있는 것이다.

살아생전에 매우 화려한 생을 살았고, 마치 날아가는 새도 떨어뜨릴 정도로 그 위세가 대단하였어도, 마지막 순간에 그 얼굴이 험상궂게 찌그러져 있다면, 그 화려했던 생이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천하에 떵떵거릴 정도로 재산을 많이 모았어도, 마지막 순간에 재산 상속 문제로 온통 시달리게 되고, 온갖 탈법과 불법으로 구설수에 오르게 되고, 정신적으로도 마냥 헛소리나 늘어놓게 된다면, 그 많은 재산이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당신 생의 진정한 승부는 과연 그 마지막 자락에서 결판이 난다고 보아야 마땅하다.

그러니, 오늘도 당신 생의 모든 추구가 그 마지막 자락을 향해 일관성 있게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잘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하겠다.

지금 당신이 주장하는 언행과 믿음이 과연 그 마지막 자락에 다다라서도 변함이 없을 수 있는지를 잘 한번 성찰해 볼 필요가 있겠다.

그렇게 하여야만, 당신의 말과 행동이, 그 믿음이 그만큼 끝까지 가치로울 수 있을 것이니 말이다.

끝까지 당신의 그윽한 인품을, 당신 생의 반듯한 신념을 잘 지켜낼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끝까지 당신의 편안한 미소를 결코 잃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니 말이다.


결국, 당신이 마지막 자락에 내어놓을 수 있는 표현의 수준은 당신이 살아온 생을 가장 잘 이야기해 줄 것이며, 당신 생의 참 의미 또한 가장 잘 대변해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당신은 과연 그러함을 진정으로 경계하고 두려워할 필요가 있겠다.

그래서 너무 각박한 현실 속에 얽매이지 말고, 너무 혼란하여 자가당착에 빠지지도 말고서, 당신의 마지막 자락까지 한결같은 주장을 해 나갈 수 있는 지를 잘 살펴보아라.

과연 그러지 않고서는, 모두 모두 의미가 매우 적을 수밖에 없다.

의미가 거의 없을 수도 있다.

그냥, 껍데기 인생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

아예 가짜 인생일 수도 있다.

아무런 가치도 만들어 내지 못하는 아주 허망한 생이 되어버릴 수도 있다.


그럼, 당신의 마지막 자락에 진심으로 할 수 있는 말은 또 무엇이어야 할까?

물론, 사람마다의 상대성이 있을 것이므로, 구체적으로 말할 수는 없겠으나, 그 대략적인 윤곽을 한번 잡아보게 되면,

일단, 그 말이 거짓은 아닐 것이다.

자기 마지막 순간에, 거짓까지 꾸며 대며, 이야기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니 말이다.

대개는 아마, 일단 진심으로 보야야 할 것이다.

자신의 마지막 자락에는, 가장 진심의 말을 살아있는 자들에게 전하고 싶어 할 것이 아주 당연하다.

또한 그 말은 자기 생에서 가장 알맹이에 해당할 수밖에 없다.

가장 중요하게 느낀 점, 가장 하고 싶었던 말, 가장 처절하게 몸소 행한 체험 등에 관한 이야기일 수밖에 없다.


당신은 그러한 마지막 말을 혹은 마지막의 몸짓이나 표현을 지금부터 스스로 준비하는 것이 좋다.

나중에 결국은 내어놓아야 할 것이니 말이다.

과연, 그 수준이 창피하지 않을 정도로, 오늘도 내일도 최선을 한번 다해볼 필요가 있다.

물론, 세상이 그리 호락호락하지가 않아서, 당장 오늘 먹고살기도 바쁜데, 어떻게 그런 것들을 미리 마련할 수 있겠느냐고 반문을 할 수도 있다.

만약 당신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면, 사실 당신은 지금껏 세상을 헛살은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당신은 당신 생을 왜 살았는가?

과연 무엇을 추구하며 살았는가?

마지막 자락에, 그래도 당신 최선의 정답을 조금이라도 내어놓지 못한다면, 당신이 생을 아무리 열심히 살았어도, 마치 사상누각에 불과할 것이다.

당신 생에 아무런 의미를 남기지도 못하고서, 그냥 쓸쓸히 떠나야 할 수도 있다.


네 에피타프에 승부를 걸어라-2.jpg “스스로를 잘 성찰하여, 당신 생의 변함없는 방향을 잘 한번 잡아 보아라!”(그림; productive.fish/blog)


지금이라도 당신은 스스로를 잘 성찰하여, 당신 생의 변함없는 방향을 잘 한번 잡아 보아라.

그래서 당신이 전정 옳다고 생각하는 방향으로, 전정 원하고 있는 방향으로, 진정 정답이라고 생각하는 방향으로 그렇게 한번 계획하고, 살아내어 보아라.

그 계획상, 타인의 눈치는 전혀 보지 말아라.

온전히 당신만의 생을 살아 내어라.

물론 처음부터 완벽할 수는 당연히 없다.

그 진지하고 엄숙한 계획과 마지막 자락까지 이어질 말씀을, 지금이라도 진심으로 한번 마련해 보아라.

그리고 그 말씀의 방향으로 살아라.

끝까지 업글하여 제대로 한번 구현해 내어 보아라.

사실, 이러한 시도 자체가 일단은 아주 중요하다.

모든 일에는 “시작이 반”이라고 했으니 말이다.


그 부단한 모습 또한 매우 중요할 것이다.

초지일관의 마음으로 지속해 두드리고, 추구하는 열정이 아주 중요하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당신의 마지막 자락에는 아주 흐뭇하게 이야기할 수 있어라.

나는 내가 생각하는 생의 ~~ 한 정답을, 내가 가장 원하는 방식으로 진정으로 추구했노라고 말이다.

그러한 ‘대 서사’를 당신 후손들에게, 이웃에게 가만히 들려줄 수 있다면 참으로 좋겠다.

아주 확신의 목소리로, 당신의 아름다운 이야기 들려줄 수 있다면, 더더욱 훌륭하겠다.

당신의 말씀이 당신 후손들의 마음을 타고 계속계속 흘러갈 수 있으면, 더 이상 말할 나위가 없지 않겠는가?


그러니, 당신은 이제부터라도, 아무런 사리사욕에도, 아무런 욕망에도 집착하지 말아라.

세상에 모든 부질없는 것들을, 될 수 있으면, 바로바로 떨쳐내어라.

일단은, 현실의 모든 것을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서, 그 위에 당신의 뜻을 더하여라.

당신이 생각하는 최선의 뜻과 방향으로 진정 집중은 하되, 절대 얽매이지는 말아라.

열심히 추구하되, 결코 그 추구하는 바의 노예는 되지 말아라.

현실의 모든 것을 잘 인정하고, 마냥 편하게 추구해 나가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네 에피타프에 승부를 걸어라-3.jpg “타인을 위해서도 살아 주어야 한다!”(그림; stoneletters.com/blog)


여기에 더하여, 당신은 반드시 타인을 위해서도 살아 주어야 한다.

당신이 세상으로부터 받은 것 이상으로 돌려주어야 함은 지극히 당연한 도리일 테니 말이다.

잘 생각해 보면, 당신은 알몸으로 태어나, 세상으로부터 참으로 많은 혜택을 받았을 것이다.

참으로 많은 사랑과 축복도 가득 받았을 것이다.

모두모두가 너무나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니, 최대한 많은 것을 내어 놓으려, 세상에 최대로 봉사하려 늘 고민해 나가라.

가능한 한, 간절한 이들을 위해 살아라.

그들을 다시 축복하여 주어라.

이제는 당신 차례이니, 무엇이든 아낌없이 내어주고, 아낌없이 도와주기도 한번 해 보아라.

그래서 결국, 타인의 웃음을 통해 당신도 전정으로 환하게 웃을 수 있어라.

타인의 승리를 통해 당신을 기어이 완성하여라.

타인의 만족과 행복을 통해, 당신의 의미를 찾아보아라.


당신 생의 마지막 자락에는 아주 고운 에피타프를 하나 마련해 보아라.

다소 엄숙한 듯, 고요한 듯한 그곳에 당신의 고운 말씀을, 아주 아름다운 말씀을 아로새겨 보아라.

당신의 뜻을 후세들에게 오래오래 남길 수 있도록 말이다.

당신 뜻과 가치의 수준을, 당신 생의 진정한 수준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그러한 문구로 미리 준비하여라.

당신이 오래도록 남길 침묵의 주장을 잘 한번 새겨 넣어 보아라.

물론, 그 귀한 당신 말씀에는, 당연히 절대적인 평가 기준 같은 것은 전혀 없다.

그냥, 당신 스스로의 기준이면 된다.

단지, 지극한 양심의 기준이면 된다.

즉, 당신 양심으로 진정 인정할 수 있는 그러한 기준으로 보았을 때도, 아주 가치로우면 된다.

그래서 스스로 매우 흡족해 할 수 있으면 된다.

그런 당신의 말씀이 세상 사람들의 마음을 다독이고, 더욱 푸근하게 해 줄 수 있어라.

당신 후손의 마음을 타고, 오래도록 흘러갈 수 있게 하여라!



네 에피타프에 승부를 걸어라-0.jpg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비문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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