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432] 내 인생이 왜 니맘에 들어야 되는데요?
D-432. Sentence
내 인생이 왜 니맘에 들어야 되는데요?
박해영 작가님을 잘 알지는 못했다. 다만 주변 사람들은 작가님의 신작이 나왔다며 꼭 봐야겠다고 이야기했고, 처음 제목을 들었을 때 나는 이상하게도 대략적인 드라마의 무드가 그려지는 듯했다.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 제목만으로도 어떤 결의 이야기일지 알 것 같았다. 그래서인지 이상하게 꼭 봐야겠다는 마음은 들지 않았다. 아이러니하지만, 어쩌면 아이러니하지도 않았다. 이미 나는 그 문장 안에서 충분히 오래 살아본 사람 같았기 때문이다.
며칠 전 운전을 하다가 라디오에서 우연히 들은 드라마 속 대사였다. “내 인생이 왜 니 맘에 들어야 되는데요?” 그 말을 듣는 순간 마음 한쪽이 이상하게 멈칫했다. 생각해보면 그 누구도 나에게 자신의 마음에 들게 내 인생을 살라고 직접 말한 적은 없었다. 심지어 부모님조차도 그렇게 노골적으로 강요한 적은 없었다. 그런데 나는 참 오래도 다른 사람 마음에 들기 위해 애쓰며 살아온 것 같다.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성공, 명예, 인정, 그럴듯한 자리와 그럴듯한 결과에 나를 맞추려고 애썼다. 문제는 그들의 시선을 스스로 상상하고 정의하고, 그 기준에 나를 끼워 맞추며 살아왔다는 것이다. 결국 타인의 시선이라 믿었던 많은 것들은 사실 내가 만들어낸 기준이었고, 그 기준에 맞추느라 내 삶은 자주 왜곡되었다.
왜 그렇게까지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 쓰며 살았을까. 나를 어떻게 평가할지, 나를 어떤 사람으로 볼지, 내 선택을 성공이라 부를지 실패라 부를지에 대해 너무 오래 마음을 썼다. 신기한 건 정작 그들이 내 삶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있지도 않았다는 사실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각자의 삶을 살아내느라 바쁘다.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면, 모두가 다른 사람의 인생을 평가할 만큼 한가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마치 세상이 내 삶의 채점표를 들고 있는 것처럼 긴장했다.
이제는 조금 다르게 살고 싶다. 앞으로 내 인생만큼은 왜곡하지 않고 살아가고 싶다. 내가 하는 일의 가치를 내가 알아주는 삶. 나에게 허락된 사람들의 가치를 놓치지 않는 삶. 나에게 다시 주어진 새로운 시간의 가치를 스스로 인정하는 삶. 크고 멋진 결과로 증명하지 않아도, 지금 내가 붙잡고 있는 자리 안에 이미 의미가 있다는 것을 진짜 체감하는 삶. 그런 삶을 살고 싶다.
오늘부터 중2 첫째아들의 중간고사가 시작되었다. 시험이 다가오며 조급해지고 불안해지는 건 아들이 아니라 오히려 나였다. 단 이틀 시험을 보는데도, 오늘 아침 아들은 오늘시험이 끝나고 잠시 놀면 안 되냐고 물었다. 내일 국어와 역사 시험이 남아 있는데도 말이다. 다음날이 시험인데 게임하고 싶다고 말했던 작년 기말고사 때의 아들과 별반 달라지지 않은 듯 보였다. 언제쯤 스스로 발동이 걸릴까. 언제쯤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의 가치를 알게 될까. 언제쯤 지금 해야 할 일을 자신의 일로 받아들일까. 그런 생각들이 머릿속을 오갔다.
그럼에도 어젯밤 국어와 역사 시험 범위를 스캔하고, AI로 예상문제를 만들어 출력해두었다. 오늘 아침 거실 테이블 위에 문제지를 올려놓았다. 대신 공부할 수도 없고, 대신 깨달을 수도 없다는 걸 알면서도, 내가 해줄 수 있는 만큼은 해주고 싶었다. 그리고 이유는 모르겠지만, 오늘 아침 현관을 나서는 나에게 아들이 안아달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나는 그 아이를 꼭 안고 기도해주었다. 이 아이가 자기 삶을 미워하지 않게 해달라고. 자신의 속도와 방식 안에서도 스스로의 가치를 잃지 않게 해달라고. 그리고 나 역시 이 아이의 인생을 내 마음에 들게 만들려는 욕심을 조금씩 내려놓게 해달라고.
나의 역할은 여기까지다. 돕고, 기도하고, 사랑해주는 것. 아이가 언제 변할지, 언제 마음이 움직일지, 언제 자기 인생의 방향을 스스로 붙잡게 될지는 내가 알 수 없다. 다만 내가 해야 할 일은 아이의 삶을 내 불안으로 끌고 가지 않는 것. 내 기준으로 아이의 오늘을 함부로 재단하지 않는 것. 아이가 자기만의 시간 안에서 자라날 수 있도록 곁을 지키는 것. 그것이 오늘 내가 붙잡아야 할 엄마의 자리인지도 모르겠다.
중요한 건 상황이 어떻든, 다른 사람이 어떻든, 내가 내 자리의 가치를 잃지 않는 일이다. 내가 하는 일의 가치를 내가 알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가치를 있는 그대로 보고, 나에게 주어진 오늘의 시간을 함부로 깎아내리지 않는 것. 그거면 된다. 아주 거창하지 않아도, 오늘은 그 정도의 깨달음이면 충분하다.
내 안의 한 줄
내 자리의 가치를 잊지 않기 위해 살아가는 것이다.
매일의 감정이, 나를 설명할 언어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