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말이 불러온 희망

백수린 장편소설 / 눈부신 안부

by 설민
표지를 그려보았다. 긴 방황의 끝에, 지금 막 공항에 도착한 해미의 손을 우재가 잡아주길 기대하면서......

거짓말이 불러온 희망

눈부신 안부


설민


살아가면서 ‘거짓말’이라는 것은 필수 불가결한 것인가? 거짓말이 최선은 아니지만, 선한 것이 무조건 솔직하다고만은 할 수 없다. 정직한 말이 때로는 상대의 가슴에 비수가 되어 꽂히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때그때에 따라, 상황에 맞는 대응과 소통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한낮의 찬란한 자유를 만끽하는 듯한 파란 표지와 제목이 마음에 와닿아 [눈부신 안부]라는 책을 손에 쥐게 되었다. 백수린 작가가 쓰고, 문학동네에서 펴낸 이 장편소설은 상실과 거짓말이 불러온 해미 인생의 소용돌이 속에서 자신을 지키고, 알아가는 여정을 다시금 되짚어보게 한다. ‘평범한 삶은 축복’이고, 인생은 흔들리는 마음의 뿌리를 견고하게 만들어 가는 과정이라는 것을 각인시킨다.

또, 우리는 한 사람에 대해 얼마나 알 수 있을까? 원래 사람들은 다 자기중심으로 생각한다. 시련이 닥쳤을 때, 누구나 자신만의 방식으로 슬픔에서 회복해 간다. 더 성숙한 사람이 사과하고 문제를 해결해 나갈 뿐이다.


어쩌다 웃는 순간에도 상실의 고통은 사라지지 않는 해미네 가족. 모범생이자 환경운동가가 꿈인 해미 언니 해리는 갑작스러운 가스 폭발 사고로 죽는다. 이에 가족들은 슬픔을 드러내지는 못하고 각자의 거짓말로 아픔을 감추기 시작한다. 해미도 마찬가지다. 평범한 일상조차도 언니가 있었던 때와 없을 때의 집안 분위기가 달라진다. 언니가 사라져 버린 이후, 서로의 괴로움을 견디지 못하고 매일같이 싸우던 엄마 아빠에게는 떨어져 있을 시간이 필요했다. 어디를 가든 딸아이의 흔적이 떠오르고 누구를 만나도 딸을 잃은 부모로 기억되는 동네에서 멀리 떠날 계기가 필요했으리라는 것을 이해한 해미는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해 주기 위해서는 때로 체념이 필요하다는 것을 일찌감치 깨달았다.

해미가 열세 살이 된 겨울부터 열다섯 살이 된 겨울까지, 엄마와 동생 해나는 독일에서 살게 된다. 파독 간호사로 한국을 떠나 독일에서 의사가 된 이모가 있었기에 그곳으로 떠날 수 있었다. 이모의 친구들은 ‘파독 간호사’다. 그녀들은 뿌리가 끊어진 병을 앓고 있다. 고향을 떠나 다른 나라에 산다는 건 뿌리가 뽑혀 다른 기후와 환경에 놓인 나무와 같은 처지다.

한국 친구들과 편지를 하면서 시작된 거짓말. 독일에서의 생활에 적응하기 어렵고 친구를 사귀기도 어려웠지만, 잘 지내고 있다는, 거듭되는 거짓말로 혼란스러운 시기가 도래하자 해미는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 모든 것을 적어두기로 했다. 이 거짓말은 이모에게 들통이 나고 이에, 레나를 소개해 주었다. 상상 속의 친구가 아닌 실제 친구들이 주변에 조금씩 생겨났다. 이모의 친구들은 독일에서 나고 자란 그녀들의 아이들이 해미, 해나와 교류하며 한국 문화에 조금 더 친숙해지길 바랐다. 엄마와 이모는 독일어 실력이 향상되길 바랐고. 그 아이들과 있을 때면 낯선 나라에서 이주해 온 이방인도, 언니를 사고로 잃은 아이도 아닌 온전한 우리여서 좋았다.

레나를 통해 알게 된 한수는 선자 이모 아들이다. 그는 해미와 레나에게 뇌종양으로 살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엄마의 첫사랑을 찾아달라고 부탁한다. 해미는 한수가 준 선자 이모의 일기장을 보면서 거짓말을 기록하던 비밀 노트에 단서를 적어 나간다. 상실과 그 고통을 감추기 위한 거짓말로 시작된 선자 이모의 첫사랑 찾기 프로젝트. 한수가 생의 마지막에 선 엄마의 첫사랑을 찾아주고 싶어 하는 구원자라면, 그를 돕는 해미 입장에서는 어쩌면 그 일이 자신의 아픔을 토닥이고, 삶의 진리를 깨달아가는 치유의 여정이었다.

해미가 한국에 나온 이후로도 계속 찾아보고 애써봤지만, 선자 이모의 첫사랑을 찾아내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한수의 다급한 연락을 받고 거짓으로 자신이 K.H인양 편지를 써 보내자 답장이 왔다. 생의 마지막을 정리하듯 써 내려간 선자 이모의 편지에는 ‘자신의 삶을 후회하지 않는다며 내 마음이 이끄는 길을 따랐고, 외롭고 고통스러운 길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자긍심이 있다. 무수한 실패와 좌절이 있었더라도 그것은 온전한 나의 것이고 그렇게 사는 한 우리는 누구나 거룩하고 눈부신 별이다. 우리 자체만으로도 태초의 별만큼이나 아름다운 존재’라는 말이 쓰여 있다.

해미가 나중에 극적으로 만나게 된 선자 이모의 첫사랑 K.H, 천근호. 그렇게 오랫동안 찾고 있던 사람이 이름과 정황만으로 당연히 남자인 줄 알았는데, 여자였다는 신선한 반전은 고정관념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가를 깨닫게 한다. 자신이 거짓으로 써 보낸 편지인 줄 알면서도 생의 마지막을 정리하듯 답장을 해준 선자이모의 애틋함이 느껴진다. 아주 적은 가능성만으로도 사람은 희망을 본다. 그리고 희망이 있는 자리에는 기적들이 일어나기도 한다. 사람을 사랑하는 일에는 지극한 정성과 수고가 필요하다.


[눈부신 안부] 책을 읽으면서 ‘삶을 단순하게 만들고 몸을 조금이라도 쓰면 인생이 살 만해진다, 찬란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삶은 누구에게나 한 번 뿐이고 아까운 거니까.’라는 해미 이모의 말은 마음 한쪽에 숨 쉴 수 있는 구멍을 만들어주는 느낌이 들었다.

이십 대 초반 나를 들뜨게도 갈급하게도 하던 사람, 하지만 몇 번의 우연과 엇갈림 끝에 연인 관계로 발전하지는 않았던 우재는 독일에서도 한국에서조차도 이방인처럼 살았던 해미에게 말한다. 이국적인 풍경을 위해 뿌리째 뽑아 기후와 토양에 맞지 않는 곳에 심었던 야자수가 이제는 제주 일부처럼 뿌리를 내리며 정착했다고. 선자 이모의 첫사랑 K.H를 찾아낸 해미는 이제야 나, 그리고 내 가까이에 있는 사랑하는 이에게 눈부신 안부를 전하고 싶어진다.

해미의 앞날이 더 눈부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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