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에게
세상의 전부가 우리였던
학창 시절을 생각한다. 그때의 공기가 점점 희미해져 간다. 전부인 줄 알았던, 모든 순간 함께였던 친구들과도 뜸해지고, 매일 닿던 발걸음이 이제 전혀 발걸음이 닿지 않게 된 순간들은 너무 익숙해진 일상이 되었다. 한때는 전부였고 나의 모든 것이었던 것이, 당연하다는 듯이 스러진다. 그래, 당연한 것은 맞다. 우리는 각자의 시간을 보냈고 그곳으로 다시는 갈 수 없다는 것. 그 자체로 없는 일이 되었다.
그 무엇보다 더 선명했던 그날의 공기와 햇살들이, 점차 잊혀간다. 잊히는 기분은 썩 유쾌하지 않다. 가장 찬란하다고 생각했던, 따뜻하고 편안했던 날들이 잊히는 것은 뒷맛이 참 쓰다.
마냥 행복했던 학창 시절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생각나는 것은 무슨 심리일까. 기억의 미화일까?
그래도 그때를 분주하게 떠올린다. 울고 웃고 했던 그 시간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있으니. 잊을 순 없다. 없던 일이 되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더 열심히 그 순간들을 기억하려 한다. 누군가는 과거에 산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 순간들이 지금의 나로 기인된다는 것을 아는 누군가들은 과연 그런 말을 할 수 있을까? 좋든 싫든 우리는 그때의 우리의 모든 선택들과 기억으로 지금을 살아간다. 그러니 더욱 잊히게 둘 수 없는 것이 아닌가.
가장 많이 떠오르는 시기는 16살로 기억한다. 고등학교 진학을 앞둔 모든 게 두려운 시기. 그 시기가 가장 평화로웠다면, 모순일까 나태함이었을까? 진학할 고등학교를 정하고 그 고등학교에 대한 소식을 듣고, 준비를 하고 바쁘고 무서웠던 그 시절이 참 평화로웠다.
사람과의 관계가 편했던 시기였기에 그랬나 싶다. 열여섯의 우리 모두는 대체적으로 평화로웠다. 우리는 매일을 잔뜩 취해 거리를 걷는 취객처럼 질풍노도의 시기를 보내고 나름의 균형을 찾을 때였다. 3년이라는 시간을 매일 만나니, 좋아도 보고 싫어도 보고 어찌할 수 없는 시간들을 보냈다.
그래서였을까, 우리는 행복했다. 서로를 이해하고 배려하고 가끔은 묵인하며. 우리의 균형을 만들고 그렇게 찾은 평화였나 싶다.
큰 창으로 들어오던 햇살과 칠판에 써지던 펜 소리, 필기 소리, 자장가 같던 선생님의 말씀. 자잘하게 들리는 친구들의 잡담, 웃는 소리. 맨 앞줄에서 열심히 수업을 듣는 아이, 맨 뒷줄에서 엎드려 자는 아이. 친구에게 장난치던 아이, 낙서로 키득이던 아이들. 그런 수업시간이 끝나고 달콤한 쉬는 시간이 오면 너 나 할 거 없이 나가던 우리들. 또 누군가는 참았던 잠을 청하고, 누군가는 여정을 떠나고, 그렇게 여정을 떠나온 다른 반 친구와 어느 반인지 분간이 되지 않게 놀던 우리. 다른 반 친구가 들어온 것을 마땅치 않아 하던 아이, 그런 친구를 마땅치 않아 하는 아이, 그런 모두와 섞여 놀던 아이, 조용히 그림을 그리던 아이, 그 앞에서 조잘거리는 아이, 매일 따스히 웃어주던 아이. 우리는 이 모든 아이들이었다.
봄에는 피는 꽃을 보며 마음을 싹 틔우고, 여름엔 싹 틔운 마음과 그렇지 않은 마음들이 모여 물놀이를 했다. 가을엔 운동장 벤치에 앉아 맺어지지 못한 마음을 안고 가을이라는 것도 타고, 겨울엔 차가운 눈을 맞으며 눈싸움을 하다가 들어와 따뜻한 온기로 각자의 마음을 녹였다. 그렇게 시기마다의 우리는 계절을 가장 계절에 맞게 보냈다.
당장에 급한 일들은 우리 영원하자던 친구의 연락이 조금이라도 늦는 일들. 사귀기로 했던 아이가 학원에 가서 연락이 늦게 되는 일에 목매는 일들. 그 일들이 우리에겐 전부였다. 전 날 친구가 올린 글들이 뜨거운 감자였고, 누구를 좋아하는 일이 가장 크게 와닿았다.
그래서인가 보다. 우리가 행복했던 이유. 우리는 서로에게 서로가 전부였다. 각자가, 우리가 서로에게 했던 말들이 뉴스처럼 우리에게 전해졌고, 가장 흥미로운 가십거리였다. 그 당시에는 그런 관심이 무섭고, 때론 힘들 때도 많았다. 그 때문에 나 자신이 가장 힘들어했음에도, 그게 다 서로가 전부였기 때문이 아니었을까라고 생각하곤 한다. 지난 시간의 미화라는 것을 알지만, 그냥 그렇게 생각하고 싶어졌다.
지금처럼 사람을 어쩔 방도 없이 알게 된 것이 지금이 삭막하게 된 이유일까. 그 누구보다 많은 사람을 알게 되었지만, 서로에겐 관심을 주지 않는 우리들. 각자의 얘기만을 쏟아내는 서로. 평생을 모를 수도 있던 어느 사람의 일상을 보게 되고, 취향을 듣게 되어 그런 것일까. 그래서 더 과거를 잊고 싶지 않아 하는 걸까.
202409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