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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_뇌구조가 닮았네

눈도 코도 입도 전부 닮았지만, 가장 닮은 건.

by 두부맘

어머니를 시설에 모시고 난 이후, 본가에 내려가는 날이면 거의 매일 아버지와 술잔을 기울이곤 했다. 어머니 면회를 다녀오고 나면 착잡한 마음이 들었을 뿐 아니라, 아버지와 둘만 남은 집에서 달리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어머니께서 보셨다면 아마 “누가 김 씨 집안 인간들 아니랄까 봐” 술 없이 못 지낸다고 한소리 하셨을 테다. 뭐 어쩌겠는가, 김 씨 집안 인간들이 이렇게 생겨먹은 것을.


지금은 많이 나아졌지만(잠깐, 가슴에 손을 얹고 다시 한번 생각해 보자. 과연 그런가?), 당시 아버지와 나는 술을 마시지 않은 상태에서 진솔한 대화를 하는 법을 모르는 상태에 가까웠다. 아버지는 전형적인 경상도식 가장이셨고, 나는 소위 말하는 아들 같은 딸이었다. 한 번은 아버지께서 “남의 집 딸들은 애교도 부리고 한다던데 나는 딸 키우는 맛이 없다”라고 서운함을 토로하신 적이 있었다는데, 그 말씀을 들은 어머니께서 “여시 같이 애교 많은 딸은 아니지만 다 커서 당신 힘들 때 묵묵히 옆에서 소주 한 잔 같이 마셔줄 수 있는 딸”이라고 위로하셨다고 하니, 내가 얼마나 무뚝뚝한 딸인지는 독자분들도 대강 감이 올 거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어머니의 예언(아버지를 힘들게 하는 원인이 당신이 되실 거라는 사실까지는 내다보지 못하셨겠지만)은 완벽히 적중했고 나는 본가에 내려갈 때마다 수서역에서 전통주를 한 병씩 구매하는 알코올 속성 효녀로 자랐다.


2022년 초였을까? 날씨가 아직 차갑던 어느 날, 술이 좀 되신 아버지께서 하신 말씀은, ‘아, 내가 진짜 생각하는 방식마저도 아버지를 쏙 빼닮았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내가 너랑 너네 엄마 때문에 살고 있는 거 같니? 아니야, 할머니 때문에 사는 거야. 할머니한테 남은 자식이 나 밖에 없으니까. 내가 먼저 가면 너무 큰 불효니까.”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속으로는 굉장히 놀랐던 기억이 난다. 나도 그즈음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인생을 살면서 쉽지 않은 순간들이 참 많았다. 내가 선택한 길이었지만, 13살 때부터 집을 떠나 지내면서 생긴 가족의 빈자리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정서를 불안정하게 만들었다. 중고교 기숙사 생활의 최대 단점은 나의 24시간이 고스란히 또래 친구 혹은 권위 있는 어른에게 노출된다는 점이었는데, 이로 인해 타인의 평가에 예민한 성격이 형성되었다. 끊임없이 뒤처지면 안 된다는 압박감에 시달렸고, 교우관계가 조금이라도 어긋나거나 성적이 떨어지기라도 하면 ‘나는 왜 이 모양 이 꼴일까’하는 자책에 시달렸다.


유년기에 꼬여버린 성격은 성인이 되어서도 해결되지 않았다. 아니, 해결되기는커녕 점점 나빠지기만 했다. 문제의 핵심에는 알코올이 있었다. 알코올로 인해 겪은 수 차례(아니, 수십 차례)의 부정적인 결과에도 나는 좌절스럽거나 분노할만한 일이 생기면 습관적으로 알코올을 찾았다. 무언가 잊고 싶은 일이 있을 때도 자연스레 알코올을 찾았다. 나와 친밀한 사람들은 모두 나의 알코올 의존성을 알게 되었고, 그 평판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어 일 년 넘게 잠적을 하며 지인들의 연락을 피하기도 했다. 하지만 문제로부터 도피를 한다고 해서 나아지는 것은 없었다. 새로운 사람들 사이에서도 나는 또 그렇고 그런 인간이 되어있었으니까.


회사 취직 후, 약속이 없는 거의 모든 날을 ‘혼술’로 채웠다. 퇴근길에 500ml 맥주 4캔과 안주거리를 사서, 딱 3캔 반을 마시고 나면 알딸딸하니 잠들기 최적의 컨디션이 되었다. 어머니도 잊고, 회사일도 잊고, 나 자신도 잊고 그냥 세상만사 다 잊어버린 채 아무 생각 없이 잠들고 싶었다. 시간이 지나자 나는 싼 값으로 더 빨리 취하기 위해 맥주에 소주를 섞기 시작했고, 곧 깡소주를 들이켜는 지경에 이르렀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즈음 공황증세가 발생하였고, 정신과 약 복용을 위한 금주령이 내려졌다. 썩 잘 된 일이었다.


‘혼술’ 기간을 보내며 자주 했던 생각은 주로 이런 거였다.

‘내가 앞으로 살아야 할 인생 전체에서 행복을 양으로, 불행을 음으로 둔다고 가정했을 때 합산 결과가 과연 양의 값일까? 만약 음의 값이라면 내가 삶을 유지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

‘어차피 인생은 곧 고통인데, 하루라도 빨리 이 고통을 끝내고 싶다.’

‘모든 사람들이 나라는 사람의 존재를 하루아침에 까맣게 잊어버리면 좋겠다. 애초에 나라는 사람은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처럼 증발할 수만 있다면.’


나에게 악마의 속삭임이 찾아왔을 때, 극단적인 생각을 행동에 옮기지 않고 버틸 수 있었던 건 오로지 아버지 때문이었다. 나까지 잘못되면 아버지는 정말 무너져 내릴 것이다. 부모보다 먼저, 그것도 내 선택으로 죽는 것은 정말 용서받을 수 없는 불효라는 생각으로 매일을 버텼다.


내가 하루에도 몇십 번씩 곱씹었던 그 생각들을, 알고 보니 아버지도 그대로 하시고 계셨다니. 붕어빵 부녀는 사고회로마저 유사하게 설계되었나 보다. 정말, 누가 김 씨 집안 인간들 아니랄까 봐.



*** 우리 가족보다 훨씬 어려운 환경에서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긍정적인 마인드로 삶을 지탱해 나가는 분들이 많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원래 남의 큰 상처보다 내 손톱 밑의 가시가 더 아프다고들 하지 않는가? 죽음을 쉽게 생각했던 것에 대해 반성하고 있으니, 질타보다는 넓은 마음으로 혜량 해주시면 감사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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