딩크족에서 한 아이의 엄마가 되기까지
남편은 나만큼 심각한 인생 비관론자는 아니었지만 ‘인생은 기본적으로 고통스럽다’라는 명제에 동의하는 사람이었다. 교제 이전 무려 7년간 친구 사이로 지냈던 우리 부부는 서로의 생각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으므로, 자연히 우리 부부에게 2세는 없을 예정이었다. 자녀를 낳아 인생의 고통을 대물림하는 건 무책임한 행동이라는 판단에서였다.
어느 한 인간의 천성 내지 사고회로는 부모의 그것과 절대로 무관하지 않다. 어떻게 아냐고? 앞서 발행한 글에서 다루었던 것처럼 생각지도 못한 순간에 나에게서 부모님의 모습을 발견하는 일이 적지 않았으니까. 그렇기에 더더욱, 내가 겪었던 고통을 아이가 그대로 되풀이하게 될 것이 두려웠다.
“너희 엄마가 아무래도 예민한 성격이다 보니,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서 그렇게 된 것 같다.”
어머니의 이른 치매 증상에 주변 어른들이 내린 결론은 이랬다. 나는 그저 씁쓸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는데, 그분들이 말씀하시는 어머니의 예민한 기질을 내가 꼭 빼다 박았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당신만의 기준이 확고하신 분이었다. 그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 사람과 원만히 지내기 위해 가면을 쓰느니, 차라리 그 관계를 단절하는 편을 선호하셨다. 이 때문이었는지 어머니는 자아를 감추고 조직의 일원이 되어야 하는 상황에서 스트레스를 느끼시곤 했고, 이는 곧 ‘예민한 사람’이라는 평가로 이어졌다.
나 또한 다양한 종류의 사회생활에 노출되며 이러한 기질이 불쑥불쑥 고개를 쳐드는 순간을 자주 경험했다. 본격적인 회사 생활을 시작한 이후에는, 내가 나의 예민함을 굉장히 과소평가해 왔다는 사실을 깨닫기도 했다. 음… 어머니께는 죄송하지만, 경험상 이런 성격은 인생을 살아가는 데에 있어 그다지 유리할 게 없다.
각설하고, 결론만 놓고 보자면 나는 우울감에 취약한 데다 예민하기 짝이 없는 인간이었다. 이러한 성격적인 결함은 가정 내에서 전염되는 경우가 많다고 하던데, 내 아이에게 좋지 않은 성정을 물려주게 된다고 생각하면 끔찍했다. 물론 어머니의 병력도 한몫했다. 어머니의 알츠하이머가 유전성일 확률이 적다고는 했지만, 그래도 초로기 치매는 유전력이 있다던데. 자녀를 낳아 알츠하이머 유전자를 물려주게 되면 어쩌나, 혹시라도 내가 알츠하이머에 걸려 아이를 괴롭게 만들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앞섰다.
게다가,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좋은 엄마가 될 자신도 없었다. 어릴 적부터 받아온 여러 교육과정은 나를 성취주의자로 키워냈다. 나는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성실한 인간이었지만, 그 이면에는 성과에 과도하게 집착하고 지나치게 강박적이며 사회적인 역할과 내 자아 자체를 동일시하는 자기 파괴적인 인격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이렇게 인격적으로 불안정한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을 잘 키워낼 수 있을 리 만무했다.
남편 또한 유년시절 본인이 겪었던 대인관계에서의 고충, 근원을 알기 어려운 자기 혐오감, 자신의 통제 범위를 넘어선 문제들로 인한 박탈감 등이 계기가 되어 임신과 출산에 부정적인 입장이었다. 여러모로 우리를 닮는다면 아이는 힘든 유년기를 보내게 될 게 불 보듯 뻔했다. 아이가 평생 겪어야 하는 고통을 우리가 대신 짊어질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게 불가능한 상황에서 아이의 의사와 무관하게 생을 부여하는 것은 부모의 일방적인 욕심이라고 생각했다.
결혼생활을 시작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거창하게 끄적인 딩크선언이 무색하게도, 우리는 결혼 생활을 시작한 지 고작 일 년 만에 아이를 가지게 되었다. 매일 운동을 하며 엽산을 꼬박꼬박 챙겨 먹는 것은 기본, 고심 끝에 임신 최적기를 선정하는 등 철저한 계획 아래에서였다. 친한 친구들은 종종 우리 부부를 보며 “딩크 어디 갔냐?”라고 농담을 건네는데, 사실 조금 민망하기도 하다.
바야흐로 혐오의 시대가 도래하여 그런지, 온라인상에서 우리 부부처럼 딩크 선언을 철회하는 사람들에게 '패션 딩크'니 '딩크 호소인'이니 하는 멸칭을 붙여 조롱하는 글들을 왕왕 접하곤 한다. 나는 딩크뿐 아니라 비연애, 비혼, 동거, 결혼 등 현대인이 선택할 수 있는 다양한 삶의 형태는 개인의 신념을 바탕으로 형성되며, 그 신념은 개인을 둘러싼 환경에 따라 얼마든지 유연하게 바뀔 수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그 신념의 변화가 타인에게 해를 끼치는 방향만 아니라면 모든 선택은 존중받아야 마땅하다고 믿는다.
어... 혹시 긁혔냐고요? 뭐, 조금은 그렇습니다만. 여하튼 기왕 '딩크 호소인'이 된 김에, 임신과 출산에 부정적이었던 두 사람이 만나 어떻게 정반대의 입장으로 바뀌게 되었는지 독자분들께 알려드리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먼저, (상당히 뻔한 이야기지만) 우리는 함께하는 매 순간마다 긍정적으로 변화하는 서로를 확인하며 ‘이 사람과 함께라면 아이를 잘 키울 수 있지 않을까’하는 믿음을 갖게 되었다. 단적으로, 나는 알코올 의존 성향을 완전히 극복하였다. 시험 삼아 시도해 본 금주는 벌써 1년 3개월째 유지 중인데, 성인이 되고 나서 이렇게 오래 술을 마시지 않은 적은 정말 처음이다. 만성적이었던 우울감 역시 자연스레 해소되어, 혹시 몰라 부적처럼 소지하고 다니던 인데놀(공황 증상을 조절하기 위해 복용하던 약)을 처분한 지도 꽤 오래되었다. 나의 고질적인 결함이 단박에 해결되다니! 정말 놀라운 경험이었다. 남편 또한 나 덕분에 평생 느껴보지 못했던 삶의 충만함을 누리게 되었다며, 서서히 ‘하나에서 둘만 되어도 이렇게나 행복한데, 셋이 되면 그땐 얼마나 더한 행복이 찾아올까’하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또, 우리 부부는 ‘가정에서의 나’라는 새로운 자아를 갖게 되었다. 우리는 결혼 전 각자 1인 가구 생활을 꽤 오래 했던 터라, ‘사회에서의 나’를 내려놓는 훈련이 부족했다. 혼자 지내다 보면 집에 돌아와서도 나에게 별다른 역할이 주어지지 않기 때문에, 사회에서의 내 역할에 더욱 매몰될 수밖에 없었다. 본격적인 결혼 생활이 시작되자, 가정에서의 자아가 소위 말하는 ‘본캐’로 우뚝 섰다. 자연스레 사회적 자아는 상대적 후순위로 밀려나게 되었고, 이러한 우선순위 조정은 우리에게 평생 숙제와도 같았던 대인관계 문제와 과도한 성취 욕구의 일부를 해소시켰다.
그리고 이보다 더 큰 변화는, 인생의 불확실성을 겸허히 받아들이는 것이 삶을 대하는 보다 성숙한 태도임을 깨달으며 이루어졌다. 나는 내 의사로 온전히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 부닥치면 굉장한 스트레스를 느끼는 인간이라, 가능한 한 삶의 모든 불확실성을 배제하고자 하는 욕구가 있었다. 오죽하면 혼담이 오가는 도중 ‘결혼하고 같이 살면 사소한 걸로 많이들 싸운다던데… 그냥 같은 건물에 원룸을 두 세대 마련해서 각자 생활하고 필요할 때만 같은 공간에 있으면 안 되나?’라는 생각을 할 정도였다. 남편도 당시에는 말하지 않았지만 ‘동거’를 한다는 것에 대한 강렬한 불안감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웬걸, 결혼 생활은 예상치 못했을 정도로 순조로웠다. 아니, 더 나아가 함께 지내는 생활이 너무도 행복했다. 항상 최악의 결과를 먼저 상정했던 우리에게, 긍정적인 경험의 누적은 통제 성향을 누그러뜨리는 방향으로 작용했다. 그때부터 우리 부부는 우리가 임신과 출산을 회피하는 이유가 막연한 두려움 때문은 아닌지 고민에 빠졌다. 그리고 내리게 된 결론은, 아이가 고통받을까 봐 삶을 가질 기회를 주지 않는 것 또한 우리의 만용이며 '아이의 인생에 고통이 없어야 한다'와 같은 그릇된 통제 욕구는 내려놓을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아이의 탄생이라는 사건은 결혼과는 차원이 다른 불확실성을 내포하고 있다. 그럼에도 확실하게 단언할 수 있는 것은 태어날 아이의 삶이 우리의 걱정처럼 고통스럽기만 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나의 인생비관론은 틀렸다. 행복과 고통은 플러스 마이너스 개념으로 상쇄되는 것이 아니며, 각각의 경험에서는 반드시 얻는 것이 발생하기 마련이다. 우리가 그랬던 것처럼 아이에게는 인생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사건과 그로 인한 감정을 겪을 권리가 있고 이를 통해 스스로 성장해 나갈 것이다. 너무 속 편한 소리 아니냐고? 글쎄, 어쩔 수 없다. 부모가 되기로 결심한 이상 우리는 그저 아이가 내면의 힘을 잘 키워나갈 수 있도록 지지하고 응원하는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