되짚어보는 초로기치매의 타임라인
초로기 치매는 노인성 치매에 비해 급속도로 진행되는 경향이 있다. 통상적으로 노인성 치매는 진단 후 약 10년(혹은 그 이상)에 걸쳐 서서히 말기에 이르게 되지만, 초로기 치매는 5년 내에 급속도로 악화되어 가족도 못 알아보는 경우가 허다하다고 한다. 우리 어머니의 경우, 내가 어머니의 증상을 최초로 인지한 시점으로부터 현재 계시는 요양원에 입소하시기까지 대략 3년의 시간이 걸렸다. 병원에 가지 않겠다고 한사코 버티셨던 기간이 약 1년 9개월이니까, 실제로 진단을 받은 지 1년 3개월 만에 입소하시게 된 거다.
2020년 9월, 어머니께서 최초로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으셨을 당시에는 시간과 공간에 관한 지남력(현재의 상황을 올바르게 인식하는 능력) 장애, 그리고 기억력 장애가 주요한 병증이었다. 어머니는 오늘이 며칠인지, 계절이 어떠한지, 당신의 연세가 얼마인지 전혀 가늠하지 못하셨다. 또, 어머니에게 익숙한 공간이 아니면 그곳이 어디인지 알지 못하셨으며 방금 계단을 올라와놓고도 이곳이 1층인지 2층인지를 대답하지 못하셨다. 당연히 고차원적인 대화는 불가능했지만, 그래도 당신의 의사 전달을 위한 대화는 가능한 편이었다.
그즈음, 본가에 방문할 때마다 어머니는 나에게 행복한지를 물으셨다. 컨디션이 좋은 날에는 “회사 다니는 건 재미있나? 행복하나?”라고 하셨고, 그렇지 못한 날에는 “학교 다니는 건 재미있나?”라고 물어보실 때도 있었다. 내가 집을 떠나 지낸 지 어언 13년째였으니, 딸이 지금 몸담은 곳이 회사인지 학교인지를 착각하시는 것 정도는 애교 수준이었다. 어머니의 질문에 회사 사람들과의 일 중 재밌었던 일만 추려 조잘조잘 대답하면 어머니는 “그래, 행복하면 됐다.”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시곤 했다. (그 상황에서 가장 큰 관심사가 자식의 '행복'이라니! 모성이란 얼마나 위대한지.)
2021년 초, 어머니의 망상 장애가 점차 심해지고 폭력성이 조금씩 발현되기 시작했다. 장기요양등급 판정에서 4등급을 인정받아 주간 보호 시설을 이용하기 시작하신 것이 이 시점이었다. 시설에 나름 잘 적응하시는 모습을 보며 이제 한숨을 돌리나 싶던 찰나, 잠깐의 쉴틈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 ‘어금니 발견 사건’이 발생해 충치 문제로 원정 치료를 다니기도 했다.
원래 악재는 겹쳐서 온다고 하던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이 시기부터 친할아버지의 건강 역시 급격히 나빠졌다. 아버지께서는 어머니와 할아버지를 번갈아가며 간병하느라 몸이 남아나지 않을 지경이었다. 고통을 견디다 못한 할아버지께 섬망 증세가 찾아오자, 갑작스레 병원에 쫓아다니셔야 하는 날도 잦아졌다. 코로나19가 여전히 말썽이던 시기라, 간병인을 고용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아버지께서 불가피하게 병원에 머무르셔야 하는 날이면, 나는 당일 휴가를 무릅쓰고라도 즉시 본가로 내려갔다. 어머니는 자꾸 집을 비우는 아버지에게 서운함을 느끼시는지, “네 아빠가 바람을 피운다”며 불평하셨다. 아버지가 집으로 돌아오면 어머니는 각종 집기류를 던져대며 쌓였던 불만을 표출하셨지만, 다시 아버지가 눈앞에서 사라지면 금세 불안증이 도져서는 “너희 아빠 어디 갔노?”라며 아버지를 찾으셨다. (할아버지는 결국 그해 11월 초순 돌아가셨다. 나는 아버지가 이 시기를 도대체 어떤 심정으로 견디셨을지 감히 상상도 되지 않는다.)
같은 해 가을이 되자 어머니는 언어 기능을 많이 상실하셨고, 배변 장애 증상도 조금씩 시작되었다. 긴 문장을 말씀하시려는 욕구가 있었음에도, 세 단어 이상을 연결하지 못하셨다. 문장을 발화하는 도중 무슨 얘기를 하려고 하셨는지를 자꾸만 잊어버리시는 모양새였다. 어머니의 병세가 예상보다 너무 빠르게 진행된다는 생각이 들어, 부모님께 결혼할 남자친구(지금의 남편)를 소개하는 자리를 급히 마련했다. 더 늦기 전에 어머니의 머릿속에 사위에 대한 기억을 심어드리고 싶다는 욕심이었다. 첫인사 자리에서 어머니는 남편을 유심히 뜯어보시며 “예쁘다, 정말 예쁘다”라고 말씀하셨고, 그 자리를 끝낸 이후로도 나에게 “정말 예쁘더라”라고 몇 번이나 말씀하셨다. (다행히도 인물에 대한 인지는 가능하셨는지, 남편과 함께 면회를 갈 때마다 남편이 “어머님, 사위 왔어요~”하고 애교 부리는 걸 알아보시는 눈치다.) 그리고 2021년 말, 배변 장애 문제 및 낙상 위험 등으로 인해 결국 현재 계시는 요양원에 입소하시게 되었다.
3년간 수직낙하하듯 나빠지는 어머니를 보며,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많이 괴로웠다. 그리고 내게 주어진 상황이 야속하기만 했다. 2020년에 코로나19가 창궐하지 않았더라면, 자가격리와 이동의 제약이 없었더라면, 내가 서울이 아닌 본가 인근에서 직장을 다녔더라면, 그래서 어머니의 증상이 심해지기 전에 내가 더 자주 집에서 시간을 같이 보냈더라면.
아니, 사실은 자업자득이었다. 어머니와의 시간을 충실히 보내기 위해서는 치매의 진행 단계와 앞으로 찾아올 병증에 대해 미리 공부했어야 했다. 변해가는 어머니의 모습에 충격을 받을 것이 아니라, ‘아, 이제는 이런 증상도 나타나는구나’하고 담담히 받아들일 수 있게 마음의 준비를 충분히 했어야 했다. 그런 준비를 통해 하다못해 본가에서 지낼 수 있었던 날만이라도 어머니와 양질의 시간을 보내기 위해 최선을 다했어야 했다.
현재는 어떻게 되셨냐고? 어머니는 모든 일상생활을 전적으로 타인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는 와상 상태에 진입하셨다. 뇌의 문제가 심화되면 장기적으로 신체의 기능 저하 내지 마비를 야기한다. 어머니도 신체 균형감각과 통제력을 잃어버리셨기에, 요양사님의 도움을 받아 휠체어로 이동하실 때마저도 낙상을 방지하기 위한 벨트를 착용하셔야 한다. 원래 모든 병이 환자 개개인마다 다르게 발현된다고는 하지만, 정말 이렇게까지 빨랐어야만 했을까. 그럼에도 아직 희망적인 점은, 좋아하셨던 간식을 가지고 찾아뵙거나 남편과 함께 영상통화를 할 때면 손을 뻗거나 발을 동동 거리시는 등의 동작으로 관심을 표하신다는 사실이다. 제발 아이를 무사히 낳고, 손주와 함께 찾아뵐 수 있을 때까지 자식 내외를 알아봐 주실 수만 있다면 더 이상 소원이 없겠다.
*** 이 글은 만삭시절 작성한 원고로, 글을 발행하는 지금 나는 막 아이의 백일잔치를 치른 참이다. 지난 3개월 동안, 감사하게도 시부모님과 친정아버지를 비롯해 많은 지인들이 아이를 보러 와주었고 참 소중한 시간을 함께 보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정작 가장 찾아뵙고 싶던 어머니께는 아직 손주를 보여드리지 못한 상황이다. 어머니와의 만남이 계획에 없었던 것은 아니었으나, 갓난아이의 장거리 이동이 의학적으로 바람직하지 않다는 주변의 만류에 결국 면회를 미루고 말았기 때문이다. (장시간 차량 이동시 영아의 뇌에 가해지는 충격이 심각한 건강상의 문제로 발전될 수도 있다고.)
결국 3월 말, 나는 홀로 어머니를 찾아뵈었다. 오랜만에 뵌 어머니는 점점 악화되는 병세로 더 야위어 있었지만 손주의 영상을 보시고는 환하게 웃으셨다. 얼마 만에 본 어머니의 웃음인지! 솔직히 어머니께서 의미 있는 반응을 보이시리라곤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터라, 그 순간은 나에게 놀라움과 경이로움으로 다가왔다. 영상을 들여다보시다가 손을 뻗어 핸드폰을 직접 쥐셨을 때에는 정말 기적이 일어난 것만 같았다. 무척이나 기뻐하시는 어머니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마음이 벅차올라 다음엔 꼭 손주와 함께 오겠노라, 누가 시키지도 않은 약속을 했다. 부디 너무 늦기 전에, 곧 어머니께 손주를 직접 보여드릴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