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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경찰청 Oct 20. 2022

# 11. 1만 교민의 요람을 뒤흔든 한인 납치..

前)주과테말라대한민국대사관 경찰주재관 경정 박성훈*

1만 교민의 요람을 뒤흔든 한인 기업인

납치살인사건 현장에서 고뇌하다


  치안 불안을 기회로 딛고 일어선 1만 동포들의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불철주야 동분서주하던 그때를 돌아보며...




Ⅰ. 과테말라 경찰주재관으로 파견되다

Ⅱ. 김 사장 납치 의심 신고와 불길한 예감

Ⅲ. 피를 말리는 몸값 협상

Ⅳ. 절망의 늪에서 정의감을 불태우다 – 납치조직 일망타진

Ⅴ. 정의와 현실 사이

Ⅵ. 다시 찾은 추억의 과테말라



. 과테말라 경찰주재관으로 파견되다


2009년 2월 과테말라 경찰주재관으로 파견됐다.

당시 과테말라에는 우리 동포 1만여 명이 주로 봉제산업과 의류 도소매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인구 1,300만 명의 국가에서 연간 6,000여 건의 살인사건이 발생하는 그야말로 ‘치안 부재’의 나라였기에 경찰주재관에 대한 동포사회의 기대가 더없이 높았다.      

 

부임한 첫날 호텔에 짐을 풀고 있을 때부터 현지 근로자들의 봉제공장 점거 사태를 비롯해 강도, 살해 협박 신고가 끊이지 않았다. 그 당시에는 ‘이렇게 3년을 어떻게 보낼까’하는 걱정이 앞섰던 게 사실이다.     

‘경찰주재관’은 외교관 신분으로 해외 공관에 파견되어 재외국민보호 업무를 주로 수행하면서 각종 외교 행사에도 참석하여 여러 나라의 외교관들과 우애를 다지며 인적 네트워크를 확장할 수 있기에 경찰관들의 로망이기도 하다.

그러나, 일부 국가에 파견된 주재관들은 수많은 사건․사고를 혼자서 감당해야만 하기에 외교부에서 부여한 ‘영사’보다는 ‘나 홀로 형사’로서의 역할이 더 걸맞다고 할 수 있다.

    

현지 생활에 어느 정도 적응해 있을 무렵 지금도 잊히지 않는 그 사건이 터졌다.

바로 2010년 1월 18일 발생한 우리 기업인 납치․살인사건이다.

주재국에서 사법권이 없는 외교관 신분으로 치안 당국에 철저한 수사와 신속한 범인 검거를 요청하는 의례적인 활동의 이면에서, 납치범을 꼭 잡겠다는 결연한 의지로 현장을 동분서주하던 그때를 회고해 본다.    


 

 Ⅱ. 김 사장 납치 의심 신고와 불길한 예감     


2010년 1월 18일 18:44경 가족과 함께 저녁 식사를 하고 있는데 휴대폰 벨소리가 울렸다.

낯선 여성의 다급한 목소리가 불길한 느낌을 자아냈다.

“영사님, 우리 사장님이 납치된 것 같아요, 도와주세요! 사장님께서 ‘경찰이 나를 잡았어’라고 말씀하시고는 연락이 끊어졌어요.”

신고를 한 사람은 김 사장이 운영하는 봉제공장의 공장장 C씨였다.     


사태가 심상치 않다는 생각이 들어 곧바로 과테말라 내무부 장관 직속 납치전담수사팀 노엘(Noel) 팀장에게 전화를 걸어 상황을 설명했다.

즉시 신고자 C씨를 과테말라시티 호텔 지역에 있는 M호텔로 오도록 하고 노엘 팀장과 팀원들이 합류했다.     

C씨는 김 사장이 전날 교민 L씨가 운영하는 포커 게임장에 갔었는데 당일 내내 기분이 좋아 보였다고 했다.

순간 직감적으로 L씨가 관여됐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김 사장이 큰돈을 땄다면 그 돈을 노린 범행일 수도 있겠다는 추론이 가능했다.


경찰주재관 부임 직후부터 축적해 두었던 교민사회의 사건․사고 분석 자료에서 L씨와 그의 지인 Y씨의 휴대전화 번호 4개를 찾아내어 노엘 팀장에게 건네주며 통신 수사에 활용하도록 요청했다     


신고 접수 당일 23:15경 납치범으로 추정되는 현지인 남자가 전날 L씨의 게임장에 함께 있었던 김 사장의 친구 강 모 씨에게 김 사장의 몸값으로 미화 150만 달러를 요구하는 전화가 걸려 왔다는 제보를 받았다. 강 모 씨는 이 사건에 관여되기 싫다며 더 이상 전화를 받지 않겠다고 했다.

그나마 발신 번호는 확보할 수 있었다.

나는 C씨에게 몸값 협상 전화가 올 수 있으니 당분간 납치전담팀과 함께 대기해 달라고 부탁했다.

가정을 꾸리며 직장을 다니는 C씨에게 쉬운 부탁은 아니었다.     



Ⅲ. 피를 말리는 몸값 협상     


김 사장의 가족은 서울에 거주하고 있었다.

납치 소식을 듣고 과테말라로 날아왔지만, 납치범과의 협상은 현지어 소통이 가능한 C씨가 계속하기로 했다.

교민들에게 노출되지 않은 호텔에서 온종일 납치범의 전화를 기다리며 피를 말리는 시간을 보냈다.

피랍자의 생존 사실을 확인하지 않고서는 단 한 푼도 줄 수 없다는 것이 납치사건 협상의 기본이기에 우리는 김 사장의 목소리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     

C씨는 회사 공금으로 몸값의 일부를 준비하고 있었다.


1월 18일 23:15경 김 사장의 지인 강 모 씨에게 몸값 150만 달러를 요구했던 첫 전화,

이튿날 밤 9시경 C씨에게 두 번째 전화, 그 후로 매일 밤 9~10시 사이에 단 한 통의 짧은 전화로

몸값이 얼마나 준비됐는지 묻고, 돈을 더 준비하지 않으면 김 사장을 죽이겠다는 협박을 남기고 끊었다.

발신 번호는 매번 달랐다.     


납치범이 요구한 150만 달러가 전달된다면 피랍자를 죽일 가능성이 더 크다는 게 납치전담팀의 판단이었고, 나 역시 큰돈을 주면 검거될 경우 가혹한 처벌이 두려워 피해자를 살려두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앞섰다.

또한 ‘재미를 본’ 납치범들이 한인들을 주된 타깃으로 삼아 납치를 하려고 눈이 벌겋게 설칠 것이 뻔했다.

그래서 우리는 현실적인 선에서 더 이상 돈을 준비할 수 없다고 맞서기로 했다.     


1월 24일 저녁 8시경 납치범은 그때까지 얼마가 준비됐는지 물으며 김 사장의 목소리를 들려줄 테니 몸값을 가져올 준비를 하라고 했다. 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소리는 “살려줘, 살려줘...”

목이 졸린 상태로 내뱉는 비명에 가까운 두 마디였다.

기다림에 지친 C씨는 “사장님, 사장님?”이라고 묻더니 “우리 사장님 목소리가 맞아요”라며 울먹였다.      

김 사장만이 알 수 있는 내용의 질문을 하고 그 답을 들어야만 생존을 확신할 수 있다고 몇 번이고 당부했건만, 피를 말리며 애를 태웠던 일주일간의 시간은 사람의 인지력을 둔감하게 하고 이성보다는 감성을 먼저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김 사장의 목소리를 식별할 수 있었던 유일한 C씨의 말을 믿었고, 준비한 돈다발을 챙겨서 납치범이 시키는 대로 출발했다.

경찰이나 대사관에서 따라붙으면 김 씨를 죽이겠다며 C씨 혼자 오라고 요구했지만, C씨가 밤눈이 어두운 데다 운전이 서툴다며 C씨의 남편이 운전을 하기로 했다.

나와 납치전담팀은 C씨 몰래 차량 하부에 GPS 위치추적 단말기를 부착하고 호텔에서 실시간으로 이동 경로를 확인하고 있었다.     


GPS가 알려주는 동선은 나를 깜짝 놀라게 했다.

과거에 발생했던 교민 납치사건들의 몸값 전달 이동 경로와 거의 일치했다.

교민사회에 퍼져있던 소문 – ‘L씨와 Y씨가 현지인들을 동원해 교민들을 납치해서 거액의 돈을 뜯어내고 있다’ - 이 결코 단순한 소문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C씨 부부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납치범이 지시한 곳에 현금이 든 검정 비닐봉지를 떨어뜨리고 김 사장을 데려가라는 전화를 기다렸건만 그 후로 단 한 통의 전화도 없었다.

돈만 받고 피랍자를 죽였거나, 먼저 죽여놓고 몸값 협상을 벌였던 것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살아서 돌아오지 못한다면, 이제는 시신을 찾고 범인을 검거하는 데 총력을 기울여야 했다.

만약 시신을 찾지 못하면 영원히 실종사건으로 묻히고 만다.


    

Ⅳ. 절망의 늪에서 정의감을 불태우다 – 납치조직 일망타진  

   

몸값을 전달한 다음 날부터 우리는 납치범이나 김 사장의 전화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지만 모두 허사였다.

1월 18일 저녁 김 사장의 납치 소식이 교민사회에 알려지자 다음날부터 한인회장을 비롯한 많은 교민들이 대사관을 찾아와 업무가 마비될 정도로 분위기가 어수선했다.

그래서 나는 수사 기밀이 유출되면 피랍자가 더 위험하다고 판단하여 대사관에 출근하지 않고 매일 호텔을 옮겨 다니며 납치범과의 협상 및 수사 공조에 힘썼다.


예상대로 교민사회는 들끓었다.

경찰 영사가 현지 사정도 모른 체 교민들의 눈과 귀를 막고 있어서 사건이 해결되지 않는다는 비난이 쇄도했다.     

1월 26일 김 사장의 아내와 아들은 한인회를 통해 나에게 면담을 요청했다.

김 사장 가족을 포함한 한인회 관계자 등 8명이 한자리에 모였다.

한인회 관계자들이 그때까지의 수사상황에 관심을 보였지만, 나는 현지 경찰과 협조하여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원론적인 답변으로 일관하면서 면전에서의 비난을 감수해야만 했다.

시신이라도 찾아달라고 간청하던 김 사장 가족의 눈빛은 이미 절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사실 납치 의심 신고를 접수한 그 이튿날부터 우리는 납치범들의 윤곽을 파악하여 그들을 쫓고 있었다.

최초로 몸값 150만 달러를 요구했던 전화의 발신 기지국이 의미 있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었고, 내가 노엘 팀장에게 전달했던 4개의 휴대전화 번호 중 일부가 범행에 가담된 사실이 확인되었다.

그러나 피해자의 생존 여부가 확인되지 않았기에 범인을 붙잡더라도 납치범으로 단정할 수 없는 딜레마에 빠져있었다.      


김 사장의 시신을 찾기 위해 헬기를 빌려 최초 발신 기지국 주변의 사탕수수밭을 이 잡듯이 뒤지고 사무실로 돌아와 허탈감에 빠져있는데 납치전담팀에서 연락이 왔다.

김 사장의 시신이 발견되었다고.

시신이라도 수습할 수 있어 범인 추적의 실마리를 잡을 수 있었지만, 유족에게는 그 어떤 표현도 할 수 없었다.

그때가 2010년 2월 1일 오후 4시경이었다.   

  

김 사장의 모습은 처참했다.

현장에서 만난 감식 팀장은 부패 정도로 봐서 납치 당일 살해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했다.

현장에서 오열하는 김 사장의 아들에게 말없이 담배를 건넸다. 나도 8년간 끊었던 담배를 깊이 들이마시며 다짐했다.

납치범들을 꼭 붙잡아서 김 사장의 한을 풀어 주겠노라고.     


피해자의 시신이 발견되자 수사는 급물살을 탔다.

나는 과테말라 검찰의 협조를 받아 L씨와 Y씨의 통화 감청을 통해 이들의 움직임을 파악했고, 납치전담팀은 공범으로 가담했던 현직 군 장교와 경찰관들을 쫓았다.


2010년 2월 11일 11:00경 3개 조로 편성된 수사팀은 한국인 2명, 현지 납치조직을 동원했던 현직 군 장교 1명, 검문을 빙자하여 김 사장을 납치 조직에게 넘긴 현직 경찰관 4명에 대해 동시다발적으로 체포영장을 집행했다.     

한국인과 현직 군 장교와 경찰관들이 공모하여 한국인을 납치, 살해한 사건이 공중파 방송을 타고 과테말라 사회를 뜨겁게 달구었고, 국내 언론에도 빠르게 보도되었다.     

그동안 나에게 무능한 경찰주재관이라며 손가락질하던 몇몇 교민들은 내가 출근도 하지 않고 전화도 받지 않았던 이유를 그제야 알게 되었다며 오해해서 미안하다는 메시지와 함께 진심 어린 격려를 보내주었다.     


1월 18일 납치사건 발생부터 2월 11일 피의자들 검거․구속까지 주․야간, 주말도 없이 시내 호텔을 전전하면서 사건에 집중하느라 가족을 돌보지 못했었다.

납치범을 잡았다는 뉴스를 접한 아내는 원인 모를 전신의 고통을 호소했다.

병원을 찾아 진통제 처방을 받았지만 통증은 쉽게 사그라들지 않았다.

내 가족을 챙기지 못한 죄책감이 밀려왔다.

하지만, 이것이 경찰의 숙명인 것을 어찌하겠는가.     


               

Ⅴ. 정의와 현실 사이     


교민사회에서 공포의 대상이었던 L씨와 Y씨가 구속되자 한인사회는 거짓말처럼 평온을 유지했다.

그동안 수없이 제기되었던 의혹들의 중심에 이들이 있었다고 생각하는 교민들이 많았다.     

수감된 L씨와 Y씨는 이제 영사 면회의 대상으로서 나의 ‘고객’이 되었다.

수감시설 내에서도 각종 범죄가 버젓이 자행되고 있었기에 이들의 존재 자체가 경찰주재관의 부담이기도 했다.

 내심 외교부의 일반 영사가 수감자 면회를 담당해 주었으면 했지만, 항상 궂은일은 경찰주재관의 몫이었다.     

이역만리 타국의 교도소에서 하루하루 신변의 위협을 감내하며 살아가는 이들을 찾아가 면회를 할 때면 측은지심이 들기도 했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고 했던가...     

지난한 1심 공판 과정을 거친 결심공판 당일 나는 또 한 번의 갈등 속에서 고뇌해야 했다.

징역 100년을 구형한 검찰은 몸값 협상을 했던 C씨를 증인으로 신청했고, 공포에 질린 C씨는 죽어도 증언을 못하겠다며 맞서고 있었다.

피고인들에게 불리한 증인을 살해하는 경우가 흔히 있었기에 C씨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절박한 기로에서 나는 우리 국민의 안위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울면서 애원하는 C씨에게 검찰의 동행영장 집행에 응하지 않아도 된다고 알려주었고, 그 며칠 후 L씨와 Y씨를 비롯한 모든 피고인들은 증거 불충분에 따른 무죄로 석방되었다.    

 

목숨을 걸고 범인을 잡았는데 무죄라니...

그 아쉬움이 컸지만, 증인 C씨를 보호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우리가 추구하는 정의가 만인을 충족시켜주지 못하는 현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교민사회는 다시 술렁이기 시작했다.

이들이 노름빚을 받으러 다닌다는 소문이 나돌았고, 현지인 ‘총잡이’(사설 경호원)를 대동하고 다녀서

불안하다는 민원도 들어왔다. 나는 22개월간의 옥살이에서 풀려난 L씨와 Y씨를 대사관으로 불렀다.

증거도 없이 자기들을 잡아넣었다며 원망이라도 할 기세였다.

여기서 밀리면 ‘도로 아미타불’이 되고 말겠다는 생각이 앞섰다.

경찰주재관 3년 임기 만료를 두어 달 앞두고 있었기에 ‘유종의 미’는 물 건너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들 앞에서 나는 ‘사법권이 없는 영사’가 아닌 ‘대한민국 경찰’로서 재외국민 보호 의지를 단호하게 보여주어야 했다.


앞으로 한인사회에서 강력 사건이 발생하면 과테말라 경찰과 검찰이 누구를 지목할 것인지 생각해 보라는 질문부터 던졌다.

그리고 법적으로 갚을 의무가 없는 도박 빚을 받아내려고 겁을 주는 행위는 또 다른 범죄에 해당하므로 더 이상 민원이 들어오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경고했다.

고분고분하게 수긍할 친구들이 아니었지만, 지옥 같은 과테말라의 옥살이에 지쳤는지 겉으로는 별다른 내색 없이 내 말을 들었다.


     

Ⅵ. 다시 찾은 추억의 과테말라     


2015년부터 경찰청 외사국에서 추진하고 있는 치안한류 전수사업과 관련, 나는 국제협력(스페인어 통역) 분야 인력풀에 선발되었다.

그해 4월 제1차 치안한류 전수 국가로 과테말라가 선정되어 디지털 포렌식 전문가와 함께 과테말라로 날아갔다.

3년 만에 다시 찾은 과테말라는 변함없이 그대로였다.

문명의 진화에 민감하지 않고 하루하루 끼니를 이어 가는데 만족하는 그들의 순진무구한 표정을 읽으면서 욕심을 쉽게 버리지 못하는 우리의 일상을 돌아보게 되었다.     

과테말라 경찰청 교육센터에서 2주 동안 교육을 하면서 경찰 수뇌부를 비롯해 과거에 나를 도와주었던 경찰관들을 만나 국경을 초월한 끈끈한 우정을 재확인했다.

여전히 치안 환경이 열악한 곳에서 생업을 이어가고 있던 교민들과도 고향 사람 상봉하듯 눈물겹도록 반가운 만남의 시간을 가졌다.

추억을 회상하는 자리였지만 과거에 나를 험난한 일터로 내몰았던 L씨와 Y씨의 근황도 궁금했는데 그들은 이미 과테말라를 떠나고 없었다. 옥중에서 고통을 겪으며 나를 원망했을 것이다.

일확천금의 과욕이 불러온 화를 피하지 못했던 그들, 지구촌 어느 모퉁이에서 사필귀정(事必歸正)의 이치를 깨우치며 살고 있으리라 믿는다.     

2017년 1월 과테말라와 국경을 접하고 있는 멕시코에 경찰주재관으로 파견되었다.

비행기로 한 시간 반이면 도착하는 과테말라를 다시 찾았다.


여전히 변함이 없었다.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 여행을 하는 것 같아 애틋함까지 더했다.

시간이 흘러도 과테말라는 잊히지 않는 내 마음의 고향이 되어 있었다.     

지나고 보니 모든 게 추억이다.


힘들고 괴로운 순간도 외면하지 않고 순수한 열정을 쏟아부으면 아름다운 추억으로 승화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 現) 대구강북경찰서 형사과장(경정)

  한국외국어대학교 스페인어과 졸업, 경찰 입문(1998. 간후 47기), 장기국외훈련(2004-2006 멕시코),

과테말라 경찰주재관(2009-2012), 멕시코 경찰주재관(2017-2020)  

  ※ 본 수기에 등장하는 인물의 성씨와 영문 이니셜은 실제 인물과 차이가 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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