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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깨달음의 샘물 Jan 15. 2024

3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한 도시 뤼벡(Lübeck)

그 3명의 이름은 토마스 만, 귄터 그라스, 그리고 빌리 브란트입니다,

1. 들어가며


독일 북부 발트해 연안에 뤼벡(Lübeck)이라는 도시가 있다(아래 지도 참조). - 우리에게 그리 익숙한 도시는 아니지만 - 뤼벡은 옛 한자동맹(Hanseatic League)의 중심 도시였으며, 오늘날에도 독일 북부에서는 꽤 중요한 거점 도시 중 하나이다. 그리고 뤼벡 사람들은 자신들의 도시가 옛 한자동맹의 중심이었음을 여전히 자랑스러워하고 있다. 



참고: 한자동맹


한자(Hansa/Hanse ) 동맹이란 독일 북부의 도시들과 외국에 있는 독일의 상업집단이 상호교역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창설한 조직으로, 13~15세기에 북유럽의 중요한 경제적·정치적 세력을 이루었던 것을 말한다. 아 독일어의  Hansa 혹은 Hanse는 '무리'나 '친구'라는 뜻의 고트어에서 유래한 단어로 '길드'나 '조합'을 의미한. 참고로 한자동맹의 중심을 이루었던 도시들은 자신들이 한자동맹의 후예라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으며, 그리하여 자동차 번호판에도 이를 표시하고 있다. 예컨대 역시 한자동맹에 속해있던 도시인 함부르크는 자동차번호판이 HH로 시작되는데, 여기서 앞의 H는 두말할 것도 없이 함부르크를, 그리고 뒤의  H는 바로 한자동맹을 의미한다. 여기까지 읽었다면, 그리고 최소한의 추론능력을 갖추고 있다면 떠오름직한 것은 독일의 국적기의 이름인 루프트한자(Lufthansa)가 떠오를 것이다. 아, 여기서 Luft는 독일어로 공기, Hansa는 볼 것도 없이 여기서 말하고 있는 그 한자를 의미한다. 즉, 독일의 국적기의 이름이 Luft Deutschland(Air Germany)가 아니라 Lufthansa라는 것에서 우리는 한자동맹의 위력을 엿볼 수 있다.

 



그런가 하면 오늘을 살아가는 뤼벡 사람들이 또 하나 자랑스러워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자신들의 도시 뤼벡이 무려 3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한 도시라는 것이다. 잘들 알다시피 노벨상은 알프레드 노벨(Alfred Bernhard Nobel, 1833~1896)의 유언에 따라 매년 "인류의 복지에 공헌한 사람이나 단체에게 수여되는 상"으로 그야말로 권위의 상징인데, 우리나라 사람으로는 돌아가신 김대중 대통령이 유일한 수상자이다(노벨평화상). 그런데 뤼벡에서만 3명의 노벨상 수상자가 배출되었으니, 그네들이 자랑스러워할 만하기는 하다. 아, 그 세 사람은 토마스 만(Thomas Mann, 1875~1955), 귄터 그라스(Günter Grass, 1927~2015, 이상 노벨문학상) 그리고 빌리 브란트(Willy Brandt, 1913~1992, 노벨평화상)인데, 지금부터 뤼벡에 남아 있는 이들의 흔적을 간단히 돌아보기로 하자. 



2. 빌리 브란트의 집


빌리 브란트(Willy Brandt)의 생애에 대하여는 이하에서 내가 조금 자세하게 말할 기회가 있는데, 일단 여기서는 빌리 브란트가 히틀러에 대한 저항과 망명 생활 끝에 2차 대전의 종전 이후에 구 서독 수상의 지위에 오른 사람이었다는 것 정도만 이야기해두기로 하겠다. 


(1) 외 관

빌리 브란트의 집은 쾨니히스트라쎄(Königstrasse: König는 왕, strasse 거리에 해당하는 독일어)  21번지에 있는데, 왕의 길이라는 이름에 어울리지 않게 쾨니히스트라쎄는 아주 좁은 길이다. 하여 길 건너편 끝에서 사진기를 들이대어도 건물 전체의 모습을 담아낼 정도의 거리가 절대적으로 확보되지 않는데, 아래 사진이 내가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여 찍은 빌리 브란트의 집의 모습이다.

아, 그리고 이 사진은 현관만을 확대하여 촬영한 것이다. 

위 사진 속의 입구를 들어서면 오른편에 아래 사진들과 같은 것이 자리 잡고 있는데, 간단히 두 사진에 대하여 이야기를 해보자면...  먼저 왼쪽 사진 속에는 독일의 문장(紋章)인 독수리 하단부에 '연방수상 빌리브란트 재단'이라고 쓰여 있고, 그 밑의 동판에는 '독일 문화재보호재단'이라고 쓰여 있다. 그리고 오른쪽 사진에는 역시 독수리가 보이고, 그 밑에 '한자동맹도시 뤼벡'이라고 쓴 다음 고고학/문화재보호라고 써 놓았다. 


결국 왼쪽 사진은 이 건물이 국가적 차원에서 보호/운영되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오른쪽 사진은 이 건물이 뤼벡이란 도시차원에서도 보호를 받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많은 후원을 받아서 그런지 빌리 브란트의 집은 우리 같은 관광객들에게는 고맙게도 입장료가 없다.     


(2) 내 부

빌리 브란트의 집 내부는 그의 생애를 그 시기를 특징짓는 몇 개의 주제로 묶어(연대별로 구분하여) 전시하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주제는 다음과 같다: 뤼벡에서의 어린 시절 - (히틀러에의) 저항과 망명 - 베를린 시절 - 연방수상으로서 본에서 보낸 시절 - 그리고 세계평화를 위해 활동하던 시절. 아, 이런 설명이 가능한 것은 그곳에서 받은 팜플렛을 여전히 내가 소중히 간직하고 있기 때문인데, 아래 사진이 그 팜플렛의 일부이다.


자, 지금부터는 빌리 브란트의 생애를 간단히 들여다보기로 하겠다. 다만 그가 서베를린의 시장으로서, 그리고 연방수상으로서, 그리고 그 후 세계평화를 위해서 활동한 것들에 대해서는 인터넷에 상세히 소개되어 있으니 그런 이야기는 생략하기로 하겠다. 그래서 여기서는 상대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은 시절의 이야기를 위주로 빌리 브란트의 생애를 이야기해 보도록 하겠다. 아, 빌리 브란트는 독일연방의 수상으로서 대한민국을 방문하기도 했는데, 당시 중학생이던 나는 옛 국제극장 자리에서 태극기를 흔들어댔었다. 

먼저 그의 유년기인데, 빌리 브란트의 집에 들어서게 되는 순간 처음으로 맞닥뜨리게 되는 것이 바로 아래 사진과 같은 책상이다, 그냥 무심코 보면 별 특징이 안 보이는 듯하지만, 붉은 글씨가 내 눈을 사로잡았다. 누군가가 그의 어머니 Marta Frahm에게 한 말이라는데, 붉은 글씨의 내용은 "당신 아들을 정치에 손대게 하지 마시오, 그 아이는 정치적 재능이 탁월합니다. 그러나 그 정치가 당신 아들을 파멸로 이끌 수도 있습니다"


아, 어머니 이름이 Frahm으로 끝나는 것이 약간 이상하게 보일지 모르겠는데, 빌리 브란트의 원래 이름은 Herbert Ernst Karl Frahm이, 우리가 아는 빌리 브란트라는 이름은 히틀러에 대한 저항 끝에 노르웨이에 망명했을 때 개명한 이름이다,  

다음으로 히틀러에 대한 저항과 망명으로 요약될 수 있는 시기인 1933년에서 1947년까지를 들여다 보기로 하자. 빌리 브란트의 집은 그의 생애를 연대별/주제별로 묶어 전시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은 이미 말한 바 있는데, 재미있는 것은 그 시대를 한 단어, 또는 한마디의 말로 너무도 잘 표현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표현의 백미가 바로 1933년-1947년까지의 저항과 망명의 시절을 표현하고 있는 이 말이라고 생각된다: - 아래 사진의 크고 굵은 글씨 부분 - "히틀러, 그는 곧 전쟁을 의미한다".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이어지는 두 장의 사진 역시 이 시기를 잘 설명하고 있다. 왼쪽 사진은 망명하여 이름까지 개명하고 살아갔던 노르웨이 시절에 관한 전시물인데, "노르웨이, 제2의 고향"이라는 제목이 눈에 확 들어온다.  그리고 오른쪽 사진 속의 설명의 제목은 "독일로의 귀환"이다.

자, 이제 빌리 브란트의 집에서 나의 관심을 가장 많이 잡아끌고, 한 동안 이곳에서 나를 떠나지 못하게 만들었던 공간을 소개하고자 한다. 가장 인상 깊었고 재미있던 공간인데, 우선 전체 모습이다. 어찌 보면 지극히 평범한데, 주사위 내지 스툴 정도로 보이는 것들이 무질서하게 뒹굴고 있는 것이 마치 유치원생들의 놀이방인 듯한 느낌을 준다. 

그런데 가까이 다가가보면 주사위 같은 것에 각기 다른 글씨들이 쓰여 있다. 왼쪽에는 "집회(시위)의 자유", 오른쪽에는 "인간의 존엄" 


그리고 또 왼쪽에는 "언론(신문)의 자유", 오른쪽에는 "자의(恣意)의 금지". 아, 자의란 '지멋대로'란 뜻이다.

이 주사위(?)들은 나름의 용도가 있는데, 그 용도를 알려면 주사위들을 아래 사진과 같은 홀 중앙의 불빛이 들어와 있는 곳에 올려놓아야 한다.  

그다음에는

(1) 아래 사진 속의 흰 기둥에 있는 이어폰을 쓰기를(아, 독일어를 해득하지 못하면 굳이 쓰지 않아도 좋다).(2) 그리고 시선을 전면의 대형 모니터에 고정시키기를. 그곳에 주사위에 쓰여 있던 단어와 관련된 빌리 브란트의 연설이나 행적 기타 그에 관한 설명이 영상으로 흘러가니 말이다. 영상물을 바라보다가 사진 촬영을 해야 된다는 것을 망각했다. ㅠㅠ  

여기까지 보았으면  이제 이곳을 빠져나와도 되는데, 출구 쪽에서 뤼벡시가 빌리 브란트를 얼마나 자랑스러워하는지를(연방수상을 지내고 노벨평화상도 수상했으니 자랑스러워할 만은 하다) 웅변으로 잘 보여주는 것을 보았다. 아래 사진이 그것인데, 바로 더 이상 뤼벡에 살고 있지 않던 빌리브란트에게 주어진 뤼벡시의 명예시민증(Ehrenbürgerbrief)이다.


3. 귄터 그라스의 집


앞에서 말한 것처럼 빌리 브란트의 집은 입장료가 없었다. 하여 은근히 귄터 그라스(Günter Grass)의 집 역시 그러하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를 가졌었다. 사람은 말이다. 한번 어떤 것에 길들여지면 그것이 익숙해지기 시작하고, 특히 그것이 자기에게 유리한 경우라면 은근히 그것을 바라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그 점에 관한 한 나도 예외가 아닌데... 결론만 간단히 말하자면 귄터 그라스의 집을 들어가서 구경해 보려면 아래 사진과 같은 입장권을 구입하여야만 한다. 그것도 성인의 경우 무려 (2004년 1월 현재) 8유로씩이나 하는... 아, 아래 사진 속에는 5유로라고 쓰여 있는데, 그건 옛날 이야기이다. 

귄터 그라스의 집, 더 정확히 말하면 귄터 그라스와 무언가 관련 있는 전시물들이 전시되어 있는 공간으로 접근하려면 이 집의 현관(내지 출입구)에 해당하는 곳에서 입장권을 구입한 후 아래 사진과 같은 뜰을 가로질러야 하는데,  평범하기 그지없는 뜰에 역시 평범하기 그지없는(?) 작품들이 놓여 있다. 문자 그대로 이렇다 특징이 없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어느새 내 손은 셔터 위에... 지금과 같은 상황에 직면하게 되면 아주 가끔 내 손이 자율신경계의 일부를 구축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다. 각설하고 이곳에 놓여 있는 조각들이다. 아, 조각 옆에 간단한 작품 설명이 있었던 것 같기는 한데, 내 스스로 별 관심이 없었던 관계로 작품에 대하여는 숫자로만 의미를 부여하기로 한다. 

작품 2는 들어가며 한 번, 나오며 또 한 번...이렇게 2번을 찍었다. 그림자의 있고 없음, 그리고 손바닥이 보이는지 아니면 손등이 보이는지에 주목하면, 두 사진의 차이를 극명하게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작품 2, 들어가며(왼쪽 사진)  그리고  작품 2, 나오며(오른쪽 사진)

자, 이제부터는 귄터 그라스의 집 내부의 모습(및 전시물)을 들여다보기로 하겠다. 이렇게 말하면 여러분들 가운데에는 지금부터 내가 이야기하는 것과 사진들을 통하여 아주 짧은 시간에 귄터 그라스에 대하여 평균적 수준을 넘어서는 이해를 갖게 될 것이라고 기대하시는 분들이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귄터 그라스에 대한 나의 식견(이라는 말조차 부끄러운 수준)이 '양철북' 한 단어 이상의 것이 되지 않으니, 원컨대 그런 기대는 하지 말기를 바란다. 


먼저 귄터 그라스의 생애를 요약정리하여 놓은 전시물인데, 제목만 이야기하자면 "단찌히(Danzig)로부터 뤼벡까지"까지이다 되겠다. 작은 글씨로 쓰여 있는 것 중에서 관심을 끄는 것은 귄터 그라스가 자기 자신도 인정했듯이 나치의 무장친위대 출신이라는 것이다.    

다음으로, 이 사진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모르겠다만 귄터 그라스의 집 입구의 계산대 옆 한 벽면에 떡하니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가격은 6유로였는데, 지금은 얼마나 할지 모르겠다. 

1층 전시실로 들어가는 우편에 그가 쓰던 타자기, 조각이나 판화를 만들 때 쓰던 도구, 그리고 펜이 한 세트를 이루어 전시되고 있다. 유리관 속에 들어 있는 것을 찍다 보니 본의 아니게 아니게 사진 속에 나의 모습이..

위의 사진 한 장으로도 충분하지만 여러분들에게 조금 더 자세히 보여주고픈 열망 하나로 각각의 것을 따로 촬영하여 두었는데, 이하의 사진들이 그것이다. 먼저 타자기, 그리고 펜이고...

그다음에 이것들은 조각이나 판화를 만들 때 쓰던 도구들이다. 

1층 전시실의 입구정면에는 아래 사진과 같은 작품이..

위의 작품을 지나게 되면 전시실 1층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이곳을 둘러보게 되면 "하나님은 어느 누구도 특별히 사랑하지 않는다"라는 말이 반드시 진리는 아니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귄터 그라스에게는 너무도 많은 탈렌트를 주었기 때문이다. 즉, 전시실 1층의 각종 전시물들을 보게 되면 귄터 그라스가 글쓰기 이외에도 미술(그것도 다양하게 그림, 판화, 조각 등등)에도 조예가 깊은, 그러니까 종합예술가쯤에 해당한다는 생각을 가질 수밖에 없게 된다. 그 가운데 그의 미술적 소양을 맛볼 수 있는 2장의 사진을 남긴다.


특히 왼쪽의 사진은 우리에게도 너무나 익숙한데, 바로 그라스 자신이 그려본 양철북 표지이다. 그러니까 그라스 이 사람은 책도 쓰고 표지디자인까지 스스로 했다는 이야기인데, 실제로 각국의 여러 출판사에서 출판된 양찰북의 표지를 보면 어떤 것이든 예외 없이 이 그림이 그대로 또는 약간 변형되어 책표지로 사용되고 있다.

그리고 2층으로 올라가게 되면 아래 사진과 같은 공간이 나오는데, 보시다시피 특별한 전시물 없이 넓은 소파에 서적, 단말기... 등을 널널하게 배치시켜 놓아서 앉아서 책 읽으며 잠시 쉬어가기에 적당하다. 이런 공간을 마련해 놓을 수 있는 것이 부럽기도 하고, 어찌 보면 날로 먹는 것 같기도 하고... 이곳에 앉아 있을 때 이런 복합적 감정에 휩싸였던 것이 기억난다. 


4. 부덴부르크 하우스


부덴부르크하우스(Buddenbrookshaus)는 토마스 만의 소설 '부덴부르크가의 사람들'의 무대가 되었던 곳으로, 마리엔 교회(Marienkirche)의 건너편에 위치하고 있다. 그리고 현재 내부는 토마스 만/하인리히 만 형제의 기념관으로 공개되고 있는데, 그런 연유에서인지 오늘날 뤼벡을 찾는 관광객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곳 중의 하나라고 한다. 아쉽게도 다음 여정상 빨리 뤼벡을 떠나야 했기에 이곳을 찬찬히 들여다보지는 못했다. 

토마스 만에 대한 예의표시는 건물 외관 사진을 한 장 찍어두는 선에서 하기로 한다. 

아, 2024년 여름에 난 다시금 독일 북부를 돌아보려는 계획을 갖고 있는데, 그 계획 속에 뤼벡을 다시 찾아 이곳을 찬찬히 살펴보려는 것이 포함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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