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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깨달음의 샘물 Feb 07. 2024

볼거리 가득한 고도(古都), 교토(京都)를 둘러봅시다

Chapter 1. 정지용, 윤동주 시인의 시비(詩碑)를 찾아서...

# 첫째 마당: 들어가며



교토(京都)는 우리에게도 너무나 익숙한 도시이니 만큼, 교토라는 도시 자체에 대해서는 내가 더 말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다만 네이버가 교토를 "일본의 그 어느 도시를 가더라도 교토만큼 오래되지는 못했고, 교토만큼 새롭지 못하다"라고 소개하고 있다는 이야기만은 해두고 싶다. 왜냐하면 이 말이야말로 교토를 잘 표현하고 있다고 생각될 뿐만 아니라, 내가 생각하는 교토의 성격과 정확히 일치하기 때문이다. 


교토이야기를 시작하면서 제일 먼저 고민했던 것은 "교토를 어디서부터 이야야기할까?"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고, 결론은 내가 너무도 좋아하는 두 시인의 시비(詩碑)와 먼저 만나야겠다는 것이었다. 그 두 명의 시인은 바로 정지용(鄭芝溶, 1902~ 1950?), 그리고 윤동주(尹東柱, 1917~1945)이다.    



## 둘째 마당: 두 시인의 시비를 만날 수 있는 곳, 도시샤(同志社) 대학



교토 서부에 도시샤(同志社)란 이름을 가진 사립대학이 있다.  1875년에 기독교 전도사이자 교육자였던 니지마 조(新島襄, 1843~1890)가 세운 도시샤에이학교(同志社英學校)가 그 전신으로, 여전히 기독교 정신에 입각한 인재를 양성하고 있는 대학이다. 도시샤대학은 아래 사진에서 보듯이 붉은 벽돌로 지어진 꽤 오래된 대학 건물들이 찾는 이를 따뜻하게 맞이해서, 처음 찾아도 왠지 모를 친숙감을 갖게 해주는 기분 좋은 대학이다. 

대학 입구. 도시샤 대학(同志社 大學)이라고 흘려 써놓은 글씨가 멋들어지다. 

일제강점기에 이곳 도시샤 대학을 찾아 학업을 이어 나갔던 우리나라의 유학생들이 엄청 많았다. 그리고 그런 유학생들 가운데에는 우리나라 문학사의 한 획을 그었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유명한 시인들이 계셨는데, 바로 정지용 시인과 윤동주 시인이 그들이다. 아마도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그누구라도 정지용과 윤동주 시인의 작품(시) 제목 정도는 떠올릴 수 있을 것이고, 나아가서 그분들 시의 몇 구절은 암송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되는데, 바로 그 두 분이 이곳 도시샤 대학에서 공부를 하셨다. 


한편 정지용과 윤동주 시인의 작품에 대해서는 (우리나라에서야 두말할 것도 없고) 일본에서도 긍정적 평가가 이어지고 있는바, 이런 사정으로 이 두 시인의 업적을 기리는 시비(詩碑)가 도시샤 대학 교정에 세워지게 되었다. 그러하니 대한 국민이라면 교토를 찾은 이상 이곳을 skip 하여서는 안된다고 생각되는데, 아래 사진 속에 내가 붉은색으로 동그라미를 쳐놓은 곳이 바로 두 분 시인의 시비가 있는 곳이다. 찾아가는 길 또한 어렵지 않은데 아래 사진을 갖고 이야기해보면...  왼쪽의 대로변에 정문이 있고, 정문을 지나 대학건물들이 서로 마주 보고 있는 길(흰색으로 되어 있다)을 따라 조금만 걸으면 길 왼쪽에서 두 시인의 시비를 만날 수 있는다.   



### 셋째 마당: 정지용 시비(詩碑)를 찾아서



교토에 있는 도시샤 대학의 졸업생으로 '한국 현대시의 아버지'라고도 까지 불리는 시인이 있다. 1902년 옥천 출신으로, 휘문고보 교사와 이화여대의 전신인 이화 여전 교수, 그리고 경향신문 주간 등을 역임한 당대 최고의 지성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그의 이름은 정지용(1902~ 1950?)이야. 6.25 동란 언저리에 행방불명되는 바람에 한때는 그가 (자진) 월북한 것으로 규정하였던 때도 있었는데, 그 시절엔 그를(그의 시를) 이야기하는 것조차 부정시되기도 했다. 그리고 그로 인해 내가 고등학교를 다니던 시절엔 그의 시를 접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1988년에 정지용 시인에 대한 재평가를 통해 그러한 제약은 사라졌고, 그의 작품 또한 햇볕을 보게 되었다. 이러한 우여곡절을 겪은 천재시인을 기리고자, 그의 모교인 도시샤 대학에 그의 시비를 건립하게 되었다. 

정지용 시비

시비 옆으론 우리글과 일본어로 정지용 시인에 대한 간략한 설명이 있는데, 일본어가 위쪽에 자리하고 있다. 한편 이 설명에도 나와 있지만, 정지용 시인의 시비에는 교토 시내를 가로지르는 가모가와(鴨川)를 노래한 시가 새겨져 있다. 

그의 작품... 수없이 많지만 가장 대중들에게 잘 알려져 있는 것은 역시 뭐니 뭐니 해도 '향수'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은 이동원과 박인수가 함께 부른 노래 '향수'에 힘입은 바 크다고 할 수 있다. 비록 플라시도 도밍고와 존 덴버가 함께 불러 세간의 주목을 끌며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던 'Perhaps Love'에 비길 정도의 세계적 공감대를 끌어내지는 못했지만, '향수'는 적어도 우리나라에선 그에 상응하는 대접을 받아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아, 향수란 노래를 이야기할 때, 당대 최고의 작곡가 중의 한 사람인 김희갑과 그를 설득시킨 대중가수 이동원 그리고 이들의 작업에 기꺼이 참여한 박인수의 노력을 많이 거론들을 한다. 그리고 그것은 틀림없는 Fact이다. 그러나 과연 정지용의 향수가 없었다면, 과연 이동원과 박인수의 향수가 있을 수 있었을까? 각설하고.. 정지용의 향수를 만나보자. 천재시인의 귀환을 기리면서 말이다.


                                                             향수 - 정지용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즐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빼기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빈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베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란 하늘빛이 그립어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려

풀섶 이슬에 함초롬 휘적시던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전설바다에 춤추던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 벗은 아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하늘에는 성근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 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앉아 도란도란거리던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


아, 향수라는 곡의 탄생에 대해서는 따로 써놓은 글이 있는데, 관심이 있다면 아래 링크를 참조하기를 바란다. 한마디만 덧붙이자면 이 노래를 부른 이동원은 2021년 식도암으로 세상을 떠나셨다. 

정지용 시인... 내가 너무 좋아하는데, 이 때문에 당신의 고향 옥천을 세 번씩이나 찾았었다. 그리고 당신의 생가와 문학관에 대해서도 글을 써 놓은 것이 있는데, 그 또한 링크를 걸어놓기로 하겠다.  



#### 넷째 마당: 윤동주 시비(詩碑)를 찾아서



이 땅의 시인들 중에서 윤동주(1917~1945) 시인만큼 우리들의 머릿속에 깊이 각인되어 있는 시인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그도 그럴 법한 것이 사람들, 특히 젊은이들의 폐부를 찌르면서도 이율배반적으로 아름답기만 한 그의 시어(詩語)들은 참으로 남다른 면이 있다. 그리고 이것만으로도 윤동주 시인은 문단의 높은 평가를 받기에 부족함이 없어. 


여기에 그의 드라마틱한 삶의 과정...  북간도 출신이란 조금은 특이한 이력과 연희전문 - 도시샤 대학으로 이어지는 학업,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의 짧은 인생여정이 가미되면서 윤동주는 위대한 민족시인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그런데 그의 삶에 종지부를  찍게 된 이유라는 것이 한글로 시를 쓰고 있었다는 것이라니 참으로 허무하기가 그지없다. 더욱이 그의 사망시기가 광복을 불과 6개월 앞둔 1945년 2월이란 것까지 생각하면, 애통하기가 그지없다. 이러한 그의 인기도 때문인지, 그의 시비 앞에는 태극기와 꽃다발이 끊이지 않고 있다.

윤동주 시인의 시비 옆으로도 우리글과 일본어로 윤동주 시인에 대한 간략한 설명이 있는데, 설명에서 보듯이 그의 시비에는 그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서시(序詩)가 새겨져 있다. 우리네 일상생활에서도 자주 인용되는 그 유명한 서시가... 이쯤에서 서시를 한번 읊어 보자. 하늘을 우러러 부끄럼 여러 점 있는 사람이라면 더욱더..


                                                           서시 - 윤동주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 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이곳을 찾았다면 자신의 소회를 담아 한 장의 글을 남겨도 좋다. 시비 앞의 파일박스를 열어 보면 이곳을 나보다 앞서 스쳐 지나간 분들의 느낌을 엿볼 수 있는데, 어쩌면 내 뒤에 오는 사람을 위한 글을 남겨 두는 것은 이곳을 찾은 이의 매너에 해당하는 것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윤동주 시인은 생전에 자신보다 15년을 먼저 살아간 시인인 정지용을 유달리 존경하고 사랑했다고 한다. 그러니 두 분의 시비(詩碑)를 따로따로 건립하는 것은 우스꽝스러운 일이 될 수 있다. 실제로 그런 점이 고려되었는지는 몰라도 두 분의 시비는 나란히 세워져 있는데, 사진 앞의 것이 윤동주 시인의 시비이고, 뒤쪽에 보이는 또 하나의 시비가 정지용 시인의 것이다. 

나 또한 윤동주를 좋아하는데, 하여 윤동주 문학관이 부암동에 들어섰다는 이야기를 듣고 다녀왔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들로 써놓았는데, 관심있으면 아래 사이트를 참조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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