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한 공연에서 비를 맞으며 "Rain"을 부르던 호세 펠리치아노를 그리며
1. 라틴 팝? 결코 어려운 음악이 아닙니다.
팝의 새로운 흐름의 하나로 슬며시 모습을 드러내더니 어느새 팝의 메인 스트림의 한 축으로 자리 잡아 버린 음악적 장르가 있는데, 라틴 팝(Latin Pop)이 그것이다. 이처럼 '라틴 팝'은 그 실체가 엄존하고 또한 라틴 팝이라는 용어도 보편적으로 사용되고 있는데, 문제는 라틴 팝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말해주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기껏해야 "라틴 아메리카 원주민, 이베리아반도에서 온 이민자, 그리고 서아프리카에서 강제 이주당한 자들의 음악이 뒤섞인 라틴 음악에 팝적인 요소가 가미된 장르"라는 정도의 설명이 전부이다.
그런데 라틴 팝은 굳이 이런 식으로 설명을 할 필요가 별로 없다. 대표적인 곡 하나만 들으면 그 음악이 어떤 것인지를 확실히 알 수 있으니 말이다. 왜냐하면 라틴 팝은 적어도 컨트리, 소프트 록, 하드 록, 헤비메탈 등등의 음악들보다 훨씬 더 뚜렷한 음악적 특징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전 세계적으로 라틴 팝의 열풍을 몰고 온 것은 역시 푸에르토 리코 출신으로 미국 국적 또한 갖고 있는 리키 마틴(Ricky Martin, 1971~. 본명: Enrique Martin Morales)이 1999년에 발표한 "Livin' la Vida Loca"라고 해야 할 것이다. 리키 마틴이 미국 시장을 겨냥해서 발표한 이 곡은 빌보드 싱글 차트에서 5주 연속 1위를 차지했고, 유럽과 남미 기타 영어권 국가를 모두 정복해 버리는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다.
잘들 알고 있겠지만 리키 마틴은 1998년 프랑스 월드컵 공식주제가인 "La Copa De La Vida(The Cup of Life)"를 통해 이미 전 세계적 지명도를 얻고 있었는데, "La Copa De La Vi"는 비록 노래의 제목은 생소해도 모두에게 너무나 익숙한 곡이다. 아니 어쩌면 그 정도를 넘어 누구나 이를 따라 불러본 기억을 갖고 있을 수도 있다. 특히 알레 알레 알레~ 부분은. 리키 마틴을 세계적 스타로 우뚝 서게 만들었다. 여기서 라틴 팝의 존재를 세계인의 머릿속에 분명하게 각인시킨 이 두곡을 차례대로 들어본다.
먼저 "Livin' la Vida Loca"이고,
이어서 "La Copa De La Vida(The Cup of Life)"이다.
라틴 팝을 이야기하다 보니 절로 떠오르는 여가수가 있는데, 이 글을 읽고 있는 여러분들 또한 나와 마찬가지로 이 여가수를 떠올리고 있었을 것이다. "Let's Get Loud"나 람바다를 샘플링한 "On The Floor"라는 노래를 부른 제니퍼 로페즈(Jennifer Lopez, 1969~)를 말이다. 건강미 넘치는 육감적 몸매와 그에 잘 어울리는 격렬하고 화려한 춤사위를 자랑했던 제니퍼 로페즈... 이제 50줄을 훌쩍 넘겼지만 God Talent 심사위원으로 나선 그녀에게선 여전히 매력이 뚝뚝 흘러 넘난다.
한편 리키 마틴이나 제니퍼 로페즈, 그리고 그들의 음악은 우리나라에서도 선풍적 인기를 끌었다. 그리고 그로 인해 한때 우리나라에서도 라틴 팝계열로 분류될 수 있는 음악들이 탄생했고, 또 그 음악들은 대중들의 많은 사랑을 받기도 했다. 본인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홍경민의 "흔들린 우정"이나 백지영의 "Dash" 등이 라틴 팝계열로 분류되는 대표적 곡들인데, 이번에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감정에 걸맞게 옷을 갈아입은 라틴 팝을 들어보도록 하자.
"흔들린 우정"이고,
"Dash"이다.
2. 나에게 다가온 호세 펠리치아노
라틴 팝의 세계화를 이끈 가수를 이야기하는 경우 4~50대에 접어든 사람들의 입에서는 앞서 이야기한 리키 마틴, 제니퍼 로페즈, 산타나(Santana)등의 가수나 그룹 이름이 흘러나온다. 그리고 그 점에 관한 한 나도 전혀 거부감이 없다. 그러나 60세를 훌쩍 넘긴 내 관점에서 보면 정작 리키 마틴 등에 의해 라틴 팝이 꽃을 피울 수 있게끔 초석을 다져 준 가수는 따로 있는데, 호세 펠리치아노(José Feliciano, 1945~)가 바로 그 사람이다. 이런 면에서 호세 펠리치아노야말로 라틴 팝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는데, 호세 펠리치아노는 내 마음속 라틴 팝의 원픽이기도 하다.
이처럼 내가 호세 페리치아노를 마음속 깊이 담아 두게 된 것은 1990년대 후반으로 기억되는 내한공연에서 보여준 그의 연주모습 때문이다. 음악에 대한 열정과 진지함이 뚝뚝 묻어 나오는 그의 연주모습은 정말이지 보기 좋았다.
그리고 그날을 기억하게 만들었던 특별한 사건이 있었다. 올림픽 공원 야외무대에서 호세 펠리치아노의 내한 공연이 있던 날, 비록 날씨가 흐리고 비가 온다는 예보는 있었지만 막상 공연 시작 전까지는 비가 내리지 않았다. 그런데 호세 펠리치아노가 "Rain"을 부르기 시작하는 순간 거짓말같이 비가 내리기 시작하더니, 급기야는 노래 가사 그대로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쏟아지는 비가 그렇게 고마울 수 없을 만큼 감동적인 순간이었는데, 그날의 감동을 다시금 떠올리며 그가 부르는 "Rain"을 들어본다. 1969년에 발표되었지만, 지금까지도 여전히 비라도 내리는 날이면 방송에서 워낙 자주 흘러나와 모르는 이 없는 그 곡, "Rain"이다. 아, "Rain"은 1969년에 발표된 노래로, 영국 런던의 팔라디움에서 있었던 공연실황을 두 장의 레코드에 담은 LP에 실려있다.
3. 호세 펠리치아노, 그는 누구인가?
호세 펠리치아노는 1945년에 푸에르토 리코에서 태어났다. 그를 생각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은 검은 뿔테 안경과 기타인데(아래 사진 참조), 검은 뿔테 안경은 그가 시각장애를 갖고 있다는 것을 웅변으로 말해준다. 다만 선천적으로 시각장애를 안고 태어났다는 이야기도 있고, 어릴 적에 후천성 소아 녹내장에 걸려 시력을 잃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어느 것이 맞는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아주 어릴 때부터 앞을 못 보았던 것만은 확실하다.
호세 펠리치아노는 그런 시각적 장애를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9살 때 잡은 기타의 매력에 푹 빠져들어 하루 14시간씩 기타에 매달렸다고 하는데, 이런 그의 노력은 1962년에 17살의 어린 나이로 L.A에서 가수로 데뷔하게 되는 결과를 낳게 된다. 그리고 1964년에 1집 앨범 'The Voice and Guitar of José Feliciano'를 시작으로, 2015년 그의 마지막 앨범인 The Genius of José Feliciano'를 발표할 때까지 무려 50장의 앨범을 발표할 만큼 일생동안 기타와 함께 하면서 기타리스트 겸 싱어 송 라이터로서의 삶을 살아갔다.
이런 그의 엄청난 활동은 자연스레 수차례에 걸쳐 그래미 어워드 수상으로 이어졌는데, 1968년에는 최우수 남성 신인가수상과 최우수 남성 가수상을 동시에 수상하는 영예를 누리기도 한다. 그리고 그 이후에도 특히 라틴 팝 최우수 앨범상은 (노미네이트 된 것까지 합치면) 늘상 그의 몫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그의 업적 때문에 호세 펠리치아노는 스티비 원더(Stevie Wonder, 1950~), 레이 찰스(Ray Charles, 1930~2004)와 함께 세계 3대 시각장애 팝 아티스트로 불리고 있다.
4. 다시 듣고 싶은 호세 펠리치아노의 노래들
첫 앨범을 낸 이후 50년에 걸쳐 50장의 앨범을 발매한 위대한 가수의 음악과 그의 앨범에 대해 내가 이야기한다는 것은 정말 불경스러운 일이다. 해서 여기서는 그저 호세 펠리치아노라고 하면 내 머릿속에 자연스레 떠오르는 음악, 그래서 꼭 다시 한번 듣고 싶다는 생각을 들게 하는 그의 노래 몇 곡을 소개하는 선에서 이야기를 맺을까 한다
(1) Once There Was A Love
"Once There Was A Love"는 1968년에 호세 펠라치아노에게 최우수 남성 신인가수상과 최우수 남성 가수상을 동시에 안겨 주었던 노래로, 그의 대표곡이라고 할 수 있다(혹자는 내가 알고 있는 것과 달리 이 곡을 1970년에 발표된 곡으로 소개하고 있기도 한다). 가사의 내용도 또 멜로디도 애잔하고, 그에 더하여 호세 펠라치아노의 소울 성의 목소리가 더해진 "Once There Was A Love". 언제 들어보아도 가슴 한편에 자리하고 있던 떠나간 사랑을 떠올리게 만드는 노래이다.
(2) Que Sera, Sera
호세 펠라치아노가 1971년에 산레모 (Sanremo) 가요제에 참가하여 2위를 수상했던 곡인데, 우리나라에선 역시 시각장애를 안고 있었던 이용복이 번안하여 부르기도 했다. 케세라 세라는 스페인어로 '될 대로 돼라'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는데, 우리나라에서 당시에 이런 제목의 노래가 발표되었다면 어쩌면 제목을 바꾸어야 했을지도 모른다. 1970년대에는 멀쩡한 노래를 별 이상한 이유를 붙여 금지시키는 경우가 허다했는데, 그 시절을 살아보지 않은 젊은 세대들은 아마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한 번도 들어보지 않은 사람은 없다고 생각되는 노래, 호세 펠라치아노가 부르는 "Que Sera, Sera"이다.
아, "Que Sera Sera"라는 제목으로 유튜브를 검색하면 또 하나의 "Que Sera Sera"를 만날 수 있다. 도리스 데이(Doris Day, 1922~2019)가 1956년에 발표한 "Que Sera Sera가 그것인데, 이 곡 또한 모르는 사람이 없을 만큼 유명하다. 거의 70년 전에 발표된 곡이 이렇게까지 롱런하는 경우는 흔치 않은 데 말이다. 마치 교과서라도 읽고 있는 것 같은 생각을 갖게 할 만큼 정확한 발음과 아름다운 목소리가 조화를 이루고 있는 도리스 데이의 "Que Sera Sera"이다.
(3) Feliz Navidad
어린 시절 내가 가졌던 황당한 생각 중 하나는 "하얀 눈이 없는 곳에서는 크리스마스도 없다"라는 것이었다. 그도 그럴만한 것이 내가 듣던 크리스마스 캐롤이나 내가 주고받은 카드는 온통 눈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크리스마스가 갖는 의미를 알게 되면서 그런 생각은 눈 녹듯 녹아버렸다.
그런가 하면 크리스마스 언간에 부르는 노래들 가운데 "울면 안 돼"나 "루돌프 사슴코" 등은 너무 유아틱 했고, 교회에서 부르는 노래들은 반대로 너무 엄숙하기만 해서, 이런 노래들은 크리스마스 앞에 자연스레 달라붙는 merry라는 단어와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런 상황에서 노래만 들어도 즐거움이 샘솟는 크리스마스 노래를 만났으니, 그것이 호세 펠리치아노가 1970년에 발표한 "Feliz Navidad"이다. 앨범 재킷 속의 젊은 호세 페리치아노는 훈남의 필이 가득하다.
"Feliz Navidad"는 훗날 보니 엠(Boney M)이 리메이크해 발표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이를 보니 엠의 노래로 알고 있는 사람도 있는데, 다시 한번 말하거니와 그 노래의 원곡은 호세 펠리치아노의 것이다. 노래만으로도 충분히 즐거운 "Feliz Navidad"와 함께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느껴보도록 하자.
5. 라틴 팝의 선구자, 호세 펠리치아노
라틴 팝은 한마디로 흥겹다. 너무나도 흥겹다. 때문에 사회 전체를 짓누르는 어두운 분위기가 형성되면, 라틴 팝의 인기는 조금은 가라앉는 것이 보통이다. 9.11 테러 직후가 그랬고, 코로나 사태 하에서 또한 라틴 팝의 인기는 예전만 못한 면이 있었다. 그런데 호세 펠리치아노의 노래는 그런 시절에도 이상할 정도로 꾸준하게 인기를 유지했는데, 솔직히 그 이유는 잘 모르겠다. 다만 호세 펠리치아노의 음악은 다른 라틴 팝 계열의 뮤지션들의 그것처럼 무작정 흥겹지만 않고, 절제된 미가 있는 것이 그 이유라고 생각할 뿐이다. 인간에 대한 성찰이 깔려있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아, 호세 펠리치아노가 라틴 팝, 특히 그의 세계화에 공헌한 점 또한 언급되어야 마땅하다. 사실 초기의 라틴 팝은 에스파니아어나 포르투갈어로 된 가사 때문에 그 소비 계층이 한정되어 있었고, 그로 인해 팝의 변방에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푸에르토 리코 출신의 라틴 아메리칸으로는 영어권 음악 시장에 처음으로 진출하여 그 후 수많은 라틴 아메리칸들이 영어권 음악 시장(특히 미국)에 진입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준 것 또한 호세 펠리치아노였다. 이 정도면 호세 펠리치아노, 라틴 팝의 선구자라는 이름으로 불릴만하지 아니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