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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깨달음의 샘물 Apr 11. 2024

내 어머니의 고향 공주를 이제서야 찾습니다.

Chapter 1. 공주 가는 길목에서 우연히 만난 "고간원지(叩諫院址"

# 첫째 마당: 공주 이야기 연재를 시작하며



거년에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나신 내 어머님의 고향은 백제의 2번째 도읍지였으며, 교육도시로도 유명한 충청남도 공주이다. 그런데 충청남도의 다른 시와 군들을 그리도 뻔질나게 오갔건만, 막상 내 어머님의 고향 공주는 지금까지 찾아보지를 않았다. (아래 지도에서 보듯이) 내 주된 거처인 아산과 바로 인접해 있는데도 말이다. 그 이유는 정확하지 않은데, 아마도 이런저런 일로 예전에 몇 번 공주를 찾았던 것이 공주에 대한 흥미를 반감시켰던 것이 아닐까 싶다.

그러던 중 다른 일 때문에 공주를 찾았다가 공주 관광안내지도라고 적힌 팜플렛을 집어 들게 되었는데,

내가 예전에 둘러보았던 공산성, 무령왕릉, 마곡사 등등 이외에도  볼거리가 너무나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여 이번 기회에 공주를 찬찬히, 좀 더 느긋하게 살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부터  시간 날 때 틈틈이 기분전환 삼아 공주를 오가기 시작했는데(아산의 내 거처에서 공주까지는 기껏해야 자동차로 50분 정도가 소요된다), 이하의 글들은 그런 과정의 산물이다.



## 둘째 마당: 고간원지(叩諫院址)



아산에서 공주시의 경계를 넘어 들어가서 10분 정도쯤 달렸을까. 멀리 길 왼편에 고동색 바탕에 "고간원지(叩諫院址)"라 적힌 안내판이 눈에 들어왔다. 그 존재조차 전혀 몰랐던 곳이지만 잠시 차를 멈추었다. 역사책을 즐겨 읽는 관계로 마냥 낯설지만은 않은 문극겸이란 분과 관련 있고, 더욱이 이곳에서 불과 300m 거리에 있다는 고간원지를 들려보지 않을 수는 없는 일 아니겠는가? 하여 전혀 예정에도 없던 "고간원지"란 곳을 둘러보게 되었는데, 이런 것이야 말로 여행길에서 마주치는 행운이라고 할 수 있다. 내가 여행의 수단으로 자동차를 몰고 다니는 주된 이유이기도 하고.

이처럼 뜻하지 않게 마주친 안내판을 보고 방향을 잡게 되면 가끔은 도로가 끊기거나, 차를 돌릴 곳이 없다거나 하는 황당한 일을 겪게 되는 경우가 왕왕 있다. 심지어 분명히 안내판이 지시하는 대로 찾아갔겠만 첩첩산중에 주위엔 아무것도 없는 경우도 허다하다. 그런데 "고간원지"를 찾아가는 경우는 그런 걱정을 할 필요가 전혀 없다. 보다시피 "고간원지" 바로 앞까지 이렇게 포장이 잘 되어 있는 널찍한 도로가 연결되어 있으니 말이다.

위치? 고간원지는 아산과 공주를 잇는 39번 국도변에 있는데, 주변에 이렇다 할 건물이 없어 지도를 봐도 별 도움은 안된다. 굳이 지번을 이야기하자면, 충청남도 공주시 유구읍 추계리 32-1이고.

고간원(叩諫院). 정말 생소한 이름인데, 그 이름은 방탕한 생활을 하는 고려 18대 왕 의종(毅宗, 1127~1173)에게 직간(直諫)을 하였던 충숙공 문극겸(忠肅公 文克謙, 1122~1189)의 충의를 백이(白夷) 숙제(叔齊)의 ‘말의 고삐를 붙잡고 간언하던 (叩馬而諫)’ 고사에 견주어 붙여진 것이라고 한다. 그렇게 보면 결국 고간원은  고려 의종ㆍ명종 때의 충신 문극겸의 충간(忠諫)을 숭모하는 후인들이 그 마음을 담아  세운 문극겸의 사당인 셈이 되는 건가?


다만 고간원에 관해서는 건립 시기나 배경 및 건립 주체까지 뭐 하나 명확한 것이 없다. 그저 충숙공사실기(忠肅公事實記), 고간원이력(叩諫院履歷), 조선환여승람(朝鮮寰輿勝覽) 등의 기록을 통해 추정할 수 있을 뿐이다. 어쨌거나 그들 기록을 종합해 보면 고간원은 조선 3대 임금인 태종 때 왕명으로 문극겸의 묘 아래에 건립되었고, 1876년 문중에서 재실인 모선재(慕先齋)를 지었다고 한다. 그 후 홍수로 무너진 건물을 1907년에 다시 지었고, 1914년에 후손인 문정찬(文貞燦)의 주도로 고간원을 중수(重修)했다고 한다. 반면 1914년 이후의   중수 사실은 고간원 내의 현판에 기록되어 있어서 확실한데, 1957년에 후손들이 중심이 되어 중수하였고, 1978년 재실인 금강재를 건립하고, 충숙문공 신도비를 세워 오늘에 이르고 있다고.



참고: 백이숙제와 고마이간, 그리고 성삼문


여기서 잠깐 고간원이란 이름을 낳게 한 백이숙제(佰夷叔齊)의 고사를 알아보고 넘어가도록 하자. 먼저 백이숙제는 유교에서 맑은 절개를 지킨 것의 표본으로 삼아 청절지사(淸節之士)라고 칭하였던 형제의 이름이다. 백이와 숙제는 고죽국(孤竹國) 군주의 첫째와 셋째 아들인데 서로 왕의 자리를 양보하고, 주(周) 나라 문왕(文王)의 어짊을 듣고 그에게 몸을 의탁하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문왕의 아들 무왕(武王)은 문왕과는 좀 다른 성향의 인물이었다는 것이다. 심지어 부친의 상중(喪中)에도 상나라 주왕(紂王)을 정벌하려고 군사를 일으킬 정도였으니 말이다. 이에 백이와 숙제는 부자지간의 예의와 군신지간의 의리를 들어 말의 고삐를 붙잡고 무왕에게 간언했는데, 오히려 무왕의 노여움을 사 목숨을 위협받게 되는 일이 발생했고, 이로부터 고마이간(叩馬而諫)이라는 말이 생기게 된다고 한다.


한편 목숨을 잃을 위험에 처했던 백이숙제는 다행스럽게도 강태공(姜太公)의 도움으로 목숨을 구했다. 그러나 끝내 무왕이 주왕을 토멸하고 주(周) 나라를 세우자 수양산에 들어가 평생 고사리를 캐 먹고살았다고 한다(아래 그림 참조). 그런데 왕미자라는 사람이 수양산까지 찾아와서는 백이와 숙제에게 “그대들은 주나라의 녹을 받을 수 없다더니, 주나라의 산에서 주나라의 고사리를 먹는 것은 어찌 된 일인가?"라며 책망을 하자, 그마저 그만두고 그만 굶어 죽고 말았다.

그런데 말이다. 어린 조카 단종을 밀어내고 왕좌에 오른 수양대군(조선 제7대 왕 세조)에게 죽음으로 저항한 성삼문(成三問, 1418~1456)에게는 백이숙제의 일조차도 그저 우스울 뿐이었다. 성삼문은 당시 자신의 심정을 '수양산 바라보며'라는 시조를 읊어 표현했는데, 그 시조는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다. 지금도 외우고 있을 정도로 말이다. 시조의 처음에 나오는 수양산(首陽山)이 수양대군(首陽大君)을 지칭하는 중의적 의미를 갖는 것으로 유명한 시조인데, 오랜만에 기억을 떠올려 읊어 보자면...


"首陽山 바라보며 夷齊를 恨하노라

주려 죽을진들 채미(採薇)도 하난 것가

비록애 푸새엣 것인들 긔 뉘 따헤 났다니"



고간원지(叩諫院址)는 보통 고간원(叩諫院)과 고간원 뒤에 있는 문극겸의 묘소, 그리고 재실을 모두 포함하는 의미로 사용하는데, 고간원 옆으로 고간원지에 대한 설명을 담은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안내판에 따르면 고간원지는 1984년에 충청남도 기념물 제51호로 지정됐다.

고간원은 아래 사진 속의 태극 문양이 있는 문 뒤쪽에 있는데,

문 왼쪽에 충청남도 기념물 제51호로 지정된 사실을 알리는 비석이 서 있다.

고간원(叩諫院)은 원래는 영당(影堂: 영정을 모셔둔 사당)의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아래 사진에서 보듯이 정면 1칸, 측면 1칸의 정각(旌閣)으로 축소되어 있다. 아,  충숙공 영당은 뒤에 말하는 재실 뒤쪽에 독립한 건물로 별도로 축조되어 있는데, 뒤에서 보여주도록 하겠다.


고간원의 모습인데, 고간원은 맞배지붕을 갖춘 건물로 정면에 '고간원(叩諫院)’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구조적으로 말하면 팔각 고주(高柱) 위에 둥근기둥을 세우고, 사면은 홍살로 처리하고, 양 측면에는 방풍판을 달고 있다. 아, 홍살이란 붉은색이 칠해진 화살모양의 나무를 말하는데, 홍살문을 생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겠다.

정각 안에는 1914년 이후의 중수사실이 적혀있는 6개의 현판들이 걸려 있다.

고간원 뒤쪽으로 문극겸의 묘소가 보이는데, 밑쪽에서 바라보아서 그런지 석물은 한쌍의 망주석이 전부인 것처럼 보인다. 묘소 뒤쪽으로 보이는 산은 금계산(574.8m).

고간원 왼쪽으로 단청(?)을 새로 한듯한 구조물이 보이는데,

중앙에 충숙공 유적 보존위원회 위원장인 문동호란 분이 찬하신 '충숙공 문극겸전(忠肅公 文克謙傳)'이란 글이 있다. 이 글을 읽으면 문극겸이란 사람에 대해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문극겸전 양옆에는 충숙공사지의 현황을 사진과 함께 보여주는 내용이 들어 있다.    

고간원지를 돌아보면 상당히 보존이 잘 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는데, 그것은 남평 문씨 문중을 중심으로 한 일련의 보존사업이 잘 되어 왔기 때문이다. 한편 단청을 새롭게 하고, 담장을 쌓는 등의 이러한 보존사업을 행하려면 많은 꽤 많은 재원이 필요하기 마련인데, 그러한 재원 마련에 힘써 준 분들의 이름은 성금록이란 비석에 새겨져 있다. 그리고 그 비석 좌우에 남평 문씨 문중사람들로 보이는 사람들의 공덕비(功德碑)가 세워져 있는데,   

그들 비석 가장 왼쪽에  충숙공 문극겸 송덕비(頌德碑)가 있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들을 충숙공 문극겸 송덕비 쪽에서 바라보면 이런 모습이 된다.  

결국 아래 사진을 갖고 이야기하자면 단청을 새로이 한 구조물(왼쪽)과 고간원(오른쪽) 사이로 문극겸의 묘가 보이는 셈이 되는 것이다.

한편 고간원 오른쪽으론 충숙문공 신도비(忠肅文公 神道碑)가 서 있다. 아, 신도비는 왕이나 고관의 무덤 앞 또는 무덤으로 가는 길목에 세워 죽은 이의 사적(事蹟)을 기리는 비석을 말하는데, 여기서 신도(神道)란 죽은 이의 묘로(墓路)를 뜻한다.

문극겸의 신도비 쪽으로 다가가 찍은 사진인데, 비문을 보니 이 신도비는 세워진 지 50년이 채 못되었다(1978년 건립).  

신도비와 고간원을 한컷에 담으면 이런 모습...

고간원의 재실은 충숙문공 신도비의 오른쪽에 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외관으로만 치면 고간원 보다도 오히려 훨씬 크다. 때문에 처음 이곳을 찾았을 때 난 이곳을 고간원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마 누구라도 이곳을 처음 찾는다면 나랑 비슷한 생각을 하게 도지 않을까 싶다는...

고간원 재실의 외문인 모선문(慕先齋)인데, 재실의 담장 위로 높이 솟아있는 솟을대문 형태를 취하고 있다. 고간원 재실과 관련된 글 중에 고간원 재실의 외문을 태선문(泰先門)으로 소개한 것들이 많던데, 그건 잘못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 같다. 물론 현판의 글씨는 '태(泰)'자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고간원의 재실이 1876년에 처음 지어졌을 때 그 이름이 모선재(慕先齋)였던 것을 생각하면, 역시 모선문이 맞다고 생각한다. 아,  모선(慕先)이란 단어는 선조를 추모한다는 의미를 갖는 것으로 보통명사화 되어 있고, 전국 각지에 있는 재실들의 이름이 하나같이 모선재(慕先齋)인 것을 생각하면 더욱더. 다만 어찌 된 연유인지는 내 알지 못하나 1978년에 지어진 지금의 재실은 금강재(金岡齋)라는 이름을 갖고 있다.

고간원을 세 번씩이나 찾았는데, 모선문은 모두 굳게 닫혀 있었다. 내가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재실을 포함한 고간원지 전체를 관리하는 곳이 '남평문씨 충숙공 문화재유적 보존위원회'라는 것이 전부이다.

모선문의 오른쪽 담장 밑으로 두 개의 비석과 나무 한그루가 보이는데.   

두 개의 비석 중 커다란 비석은 문극겸의 후손들이 세운 '충숙 선조유덕 추모비(忠肅 先祖 遺德 追慕碑)'이고,

작은 비석은 이곳을 찾았던 남평 문 씨 후손들이 참배 기념으로 세워 놓은 비석이다.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세 번에 걸쳐 이곳을 찾았지만 고간원의 재실은 들어가 보지를 못했다. 사진이라도 남기고 싶었지만 담장이 워낙 높고, 또한 모선문이 시야를 가로 먹아서 내가 얻을 수 있었던 유일한 사진은 이것이 전부였다. 금강재는 얼핏 보기에도 정면이 5칸쯤 되어 보이고, 팔작지붕을 얹은 상당히 규모가 큰 건물이었어. 금강재 전체의 모습은 못 보여주지만, 어쨌거나 금강재(金岡齋)란 현판은 보인다.  

재실의 오른쪽 담장을 돌아 오르니 금강재 뒤로 고간정사(叩諫精舍)라는 현판이 붙어 있는 건물이 보인다. 오른쪽 담장은 상대적으로 담장이 얕아서 까치발을 하고 찍으면 이런 사진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고간정사에 대한 설명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었고, 때문에 이 건물의 성격에 대해서는 내가 뭐라고 할 말이 없다. 다만 원래 정사(精舍)라는 말이 학문을 가르치기 위하여 마련한 집이나 정신을 수양하는 곳을 일컫는 말이었으나, 대충 그 정도의 기능을 하는 곳일 것이라고 추측할 뿐이다.  

그리고 고간정사 뒤쪽으로 '충숙공영당(忠肅公影堂)'이 보인다. 앞에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예전에는 고간원이 영당의 형태를 취하고 있었는데, 언젠가부터 지금처럼 정각(旌閣)으로 축소되면서 별도로 영당이 만들어진 것이라고 생각된다.

당연한 얘기지만 저 건물이 충숙공 영당이니 그 안에 충숙공 문극겸의 영정이 있다는 이야기가 되는데, 영당 자체의 접근이 불가능하니 영정 사진을 얻을 수가 없었다. 다만 인터넷을 뒤져 보니 충숙공의 영정이 떠 다니기는 하는데, 하나같이 선명하지 못하다.  

충숙공영당 뒤에서 모선문 안에 감추어져 있는 3개의 건물(뒤로부터 충숙공 영당, 고간정사, 금강재)을 사진에 담아 보았다.  


참고: 간신거국도(諫臣去國圖)


고간원과 관련하여서는 또 하나의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는데, 간신거국도(諫臣去國圖)에 얽힌 이야기가 바로 그것이다. 문극겸이 의종에게 직언을 하다 의종의 노여움을 사게 됐다는 이야기는 앞에서 이미 한 바 있는데, 이로 인하여 문극겸은 진주로 좌천되는 운명을 맞이하게 된다. 하여 진주로 내려가던 문극겸이 유구역(維鳩驛) 객사에 머물게 되었는데, 이때 자신의 심정을 담은 다음과 같은 시 한 수를 벽에 써 놓았다고 한다.


" 주운절함비간예 (朱雲析檻非干譽): 주운이 난간 분지름은 명예 구함이 아니었고,

   원앙당차개위신 (遠盎當車豈爲身): 원앙이 수레 막아섬은 어찌 자신을 위해서랴.

   일편단성천미조 (一片丹誠天未照):  한 조각 붉은 정성 임금이 몰라주니,

   강편영마퇴준순 (强鞭嬴馬退逡巡)":  여윈 말 채찍질하며 머뭇머뭇 물러가네”


그런데 그 이후로 유구역을 지나는 조사(朝士: 조정에 몸담고 있는 신하)와 묵객(墨客)들마다 이 시에서 차운(次韻)하여 시를 짓곤 했고 한다(아, 차운이란 다른 사람의 시에 화답하면서 운자(韻字)를 그 차례대로 두며 시를 짓는 것을 말한다).


고려 고종 때의 문신 최자(崔滋, 1188~1260)의 보한집(補閑集)에 이와 관련된 그림에 관한 내용이 담겨있는데, 그에 의하면 1173년(명종 3년)에 유구역 공관(公館)을 수리하고, 화공을 불러 벽에 채색을 하도록 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화공이 이 시의 내용에 착안하여 한쪽 벽에 흰옷을 입은 사람이 삿갓을 쓰고 말 위에 올라타 산길을 따라 천천히 가고, 하인들이 힘없이 따라가는 모습을 그렸다. 그리고 그로부터 50여 년이 지난 뒤 송광사의 무의자(無衣子)라는 승려가 승병을 인솔하여 서경(西京)으로 가는 길에 유구역에 머물렀는데, 무의자가 이 그림을 응시하더니 “이것이 바로 간언하던 신하가 서울을 떠나는 그림이로구나”라고 하며, 이 그림을 간신거국도(諫臣去國圖)라고 불렀다고 하는데, 다만 아쉽게도 이 그림은 오늘날 남아있지 않다. 아, 여기서의 간신을 나쁜 꾀를 일삼는 사악한 신하를 의미하는 간신(奸臣)과 혼동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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