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들이 공주를 둘러보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면, 그것은 아마도 공주가 백제의 옛 도읍지였다는 점을 고려했기 때문일 것이다. 즉, 신라의 도읍지였던 경주처럼 공주 또한 역사적 의미를 가진 공간과 유적들로 그득할 것이라는 기대를 가졌기 때문일 텐데, 맞다. 비록 공주가 백제의 도읍지였던 기간이 그리 길지 않아서 경주만큼 볼거리가 많지는 않지만,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유산을 가진 곳인 것만큼은 확실하다. 그리고 공산성 앞 로터리 한가운데 세워져있는 비석 또한 그런 점을 강조하고 있다.
* 백제역사유적지구(Baekje Historic Areas)*
공주와공산성을 이야기하기 전에 여기서 잠깐 유네스코가 세계유산으로 지정한 "백제역사유적지구(Baekje Historic Areas)"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다. 백제역사유적지구는 백제의 고도(古都) 중 공주시·부여군·익산시 지역의 백제시대 대표 유적지 8곳을 총칭하여 부르는 이름이다. 사실 백제는 건국초기부터 5세기에 공주로 도읍을 옮길 때까지 400여년을 오늘날의 서울지역을 도읍으로 삼아 존재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백제역사유적지구는 그런 한성백제 시대의 유적을 쏙 빼놓고 백제사 후기 200년 도읍지인 공주와 부여 그리고 익산의 문화유산들로만 만으로 구성되어 있다. 즉, 역사적 가치로 치면 공주와 부여 그리고 익산에 전혀 꿀릴 것 없는 한성백제시기의 유적들인 풍납토성, 몽촌토성, 석촌동과 방이동의 고분군 등은 '백제역사유적지구'에서 빠져 있는 것이다. 문제는 그 주된 원인이 개인 사유권 문제가 얽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인데, 더욱 심각한 문제는 그것이 계속 발목을 잡아 앞으로도 추가 등재될 전망이 불투명하다는 것에 있다.
말나온 김에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백제역사유적지구'에 포함되어 있는 곳들과 그 이유를 열거해보면 다음과 같은데, 이하의 글과 사진은 여기서 퍼왔다.
내가 공주 이야기를 고간원과 유구로부터 시작하기는 했지만, 솔직히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런곳이 행정구역상으로 공주에 속한다는 것 자체를 모를 수도 있다. 한마디로 지금까지 내가 한 공주 이야기는 다분히 공주의 주변적인 면이 있다. 그렇다면 많은 사람들이 공주라는 말을 들었을 때 떠올리는 진짜 공주는 어떤 곳일까? 글쎄, 모르긴 몰라도 백제역사유적지구인 공산성으로부터 무령왕릉 등으로 이어지는 곳 또는 제민천(濟民川)을 축으로 하는 공주 구도심이 아닐까 싶다. 지도를 가지고 이야기하면 이 정도...
그렇다면 공주 관광은 어디서부터 시작하여야 할까? 그건 의심할 여지없이 금강을 건너 (사람들이 생각하는) 공주로 들어가는 초입에 있을 뿐 아니라 웅진백제시대에 백제의 왕궁이 있기도 했던 "공산성(公山城)"이다. 다만 공산성을 이야기 하기 시작하면 할 말이 많아질 것 같아서 공산성 이야기는편의상 2부로 나누어 하려고 하는데, 오늘 이야기는 공산성 주차장으로부터 공산성 입구 - 금서루 - 공북루 - 성안마을 - 금서루로 이어지는 곳에 관한 것으로 제1부에 해당한다.
차를 가지고 공산성을 찾는 경우, 공산성 바로 밑에 있는 공산성 주차장에 주차를 하면 된다. 참고로 내가 3번이나 공산성을 찾았는데, 이곳에서 주차공간을 찾지 못한 적은 없었다.
보다시피 주차장 이용료는 무료.
공산성 주차장가에 많은 사진이 곁들여진 안내판이 있는데,
안내판의 내용은 공산성 역사문화환경 개선사업사업이 행해지던 2018년에 사업부지에서 발굴된 유적들에 관한 것인데, 이들 유적에 관한 설명은 아래사진으로 대신하도록 하겠다.
주차장에서 공산성쪽으로 걷기 시작하면 '고마열차 타는 곳'을 만나게 된다. 고마열차는 공주시 세계유산등재지구 및 주요 관광지를 왕복 운행하는 차량으로, 순환하는 데는 약 40분 정도 소요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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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고마열차의 운행시간, 이용료 등 고마열차에 관해 자세한 것은 이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공산성 앞 로터리에서 바라본 공산성의 모습인데, 매표소 옆으로 나 있는 길이 공산성으로 들어가는 진입로이다. 사진 오른쪽으로 앞서 이야기한 고마열차가 보인다.
공산성으로 오르는 길 초입. 공산성이 세계유산 백제역사유적지구에 포함되어 있음을 강조한 기념비가 보인다.
기념비 오른쪽으로 47기의 비석들이 세워져 있는데,
이들 비석에 관한 설명 또한 아래 사진으로 대신하도록 하겠다.
비석군을 지나치면 공산성 안내판이 나오는와. 공산성에 관한 전반적 이해와 공산성 전체의 구조를 쉽게 알아보기에는 이만한 것도 없으니 절대 그냥 지나치지 말기를 바란다.
단언컨대 이렇게 간결하게 공산성의 역사와 구조, 이곳을 거쳐간 이들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으니 말이다.
안내판을 지나쳐 조금만 오르면, 이제 공산성으로 들어가는 관문인 금서루(錦西樓) 앞에 이르게 된다.
금서루는 공산성의 서쪽 문루인데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우리가 보는 지금의 금서루는 1859년에 편찬된 공산지(公山誌: 공주목의 읍지)의 기록과 지형적 여건을 고려하여 1993년에 복원한 것인데, 다만 위치는 원래 있던 자리에서 조금 남쪽으로 이동했다고 한다.
금서루 위에서 바라본 성밖 풍경.
금서루부터 본격적으로 공산성 순례에 나서게 되는데, 본격적 순례에 나서기 전에 공산성 관광의 좋은 길라잡이가 되는 이런 것을 꼭 집어들기를 바란다.
위의 안내책자는 공산성 둘러보기와 관련하여 각자의 취향과 시간을 고려한 3가지 코스를 제시하고 있다. 그렇지만 공산성을 꼼꼼히, 구석구석을 다 뒤져보고 싶다면 당연히 1시간이 소요된다는 1번 코스를 택하여야 한다. 아, 여기에 '성안마을'이 있었다는 곳을 추가해야, 비로소 "공산성 순례, 끝~~"이라고 외칠 수 있다. 그리고 이렇게 둘러보려면 1시간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문루에 올라서 주변 풍광도 즐기고, 경치 좋은 곳에서 인생샷을 남겨도 보고, 유적지에 관한 설명도 자세히 읽어 보고... 어쩌고 하면 아마 그보다 곱절은 걸릴 것이다. 3번에 걸쳐 공산성을 찾은 내 경험을 바탕으로 이야기 하자면, 공산성을 꼼꼼히 보려면 약 3시간 정도쯤은 할애하여야 한다.
첫번째 공산성 탐방에 나선 날, 나는 금석루에서 왼쪽으로 방향을 잡고 성벽위로 난 길을 따라 오르는 루트를 택했다. 아, 공산성에서 성벽 위를 걸을 때는 절대 장난을 치는 일은 없어야 한다. 보다시피 길폭은 좁고, 무엇보다도 난간과 같은 보호시설이 전혀 없으니 말이다.
공산성 성벽 길에 나부끼는 깃발들은 (무심히 꽃아 놓은 것같아 보이지만) 그 나름의 의미를 갖고 있는데, 이는 깃발만 보면 자신이 어디쯤 있는지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공산성 깃발이야기' 안내판도 읽어 두는 것이 좋은데, 요약을 해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모든 깃발들의 공통점은 바탕색이 황색이라는 것인데, 황색은 백제의 나라색이다. 그리고 깃발의 나머지 부분이 갖는 의미를 이해하려면, 옛날 고분들에 그려져 있던 사신도(四神圖)를 떠올려야 한다. 동서남북의 방위를 나타내고 우주의 질서를 지키는 전설속의 신비한 동물인 사신(四神).즉, 동청룡, 서백호, 남주작, 북현무를 떠올려야 한다. 그러면 공산성에 나부끼는 깃발의 테두리색이 사신도의 각 동물들이 상징하는 색을 반영한 것이라는 것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금서루에서 성벽 위를 따라 걷다가 잠시 뒤를 돌아보았는데, 이 글의 대표사진으로 꼽을 만큼 너무도 멋진 풍경이 펼쳐진다. 아래 사진을 찍은 내가 지금 동서남북 어느 방향에 서있는 것인가를 알 수 있겠는가? 앞에서 내가 이야기한 깃발이야기를 유심히 읽었다면, 아주 쉬운데... 펄럭이는 깃발의 테두리색이 흰색이고, 깃발에 그려져 있는 그림은 호랑이이니 결론은 서백호. 그러니 서쪽이다. 따라서 저 앞에 보이는 문루는 볼것도 없이 공산성 서쪽 문루인 '금서루'가 되는 것이고.
공산성 여기저기에는 공산성, 나아가 공주에 관한 이야기나 있었던 사건들을 설명하는 안내판이 서있다. 금서루에서 성벽위를 걷다가 만난 안내판에는 정자성안에 있었다는 안무정 이야기가 적혀 있는데, 공산성 이야기가 아니니 그 이야기는 사진으로 대신하도록 하겠다.
다시 성벽길을 조금 더 걸으면 공산성 서북쪽 산마루에 누각이 하나 보이는데, 바로 공산정(公山亭)이다. 공산정이라는 명칭은 2009년에 시민들의 공모를 통해 지어졌다고 한다.
공산정에서는 유유히 흐르는 금강과 금강철교(등록문화재 제232호) 등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데, 이곳에서 볼 수 있는 금강의 낙조(落照)와 야경(夜景)은 빼어난 아름다움을 자랑한다고 한다. 이런 점을 생각해보면 공산정을 예전에 그저 전망대라고 불렀던 것이 이해가 된다.
공산정에서 바라본 금강...
공산정에서 내려와 성벽길을 다시 걷기 시작할 때, 배다리와 금강철교에 관한 안내판이 눈에 들어왔다. 배다리란 말그대로 2,30여척의 나룻배를 잇고, 그위에 널판지를 깔아 만든 폭 3m 길이 150m 가량의 다리를 말한다. 그러나 배다리는 안정성, 특히 홍수에의 대비에는 미약하기 그지 없었기 때문에 1932년에 금강철교를 건설하게 되었다고.
금강철교는 1932년부터 오늘날까지 공주의 관문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는데, 오늘도 내가 저 다리를 건너왔음을 떠올리며 금강철교를 사진에 담아봤다.
공산정이 공산성 서북쪽 제일 높은 곳에 있으니, 이제 내려가는 일만 남은 셈이다. 내려가는 방향을 향해 지인이 직접 만들어 주신 쥘 부채를 활짝펴고, 당신께 보내드릴 인증샷을 한 장 남겼다.
쥘부채를 잠시 접고 금강을 바라보며 또 한장의 사진을 남겼는데, 사진 오른쪽으로 공산성의 북쪽 문루인 공북루(供北樓)가 보인다.
이쯤에 내가 보는 것과 비슷한 풍경이 담겨있는 안내판을 만났다. '비단강을 사랑한 선비들'이란 제목을 가진 글인데, 여기서 비단강은 물론 금강을 말한다 - 금강(錦江)의 錦자가 비단이란 뜻이다 -. 그러니까 예로부터 금강은 비단을 깔아놓은 듯 아름다웠고, 많은 선비들이 그 아름다움을 노래했다는 이야기가 되는건가?
그리고 조금 더 내려와서 또 한 장의 사진을 남기고 문득 문득 뒤를 돌아다 보았더니
내가 공산정에서부터 걸어내려 온 성벽 길의 모습이 보이는데, 다시 봐도 많이 위험해 보인다.
이제 다 내려왔다. 깃발의 테두리 색이 검은 색으로 바뀌었고, 거북과 뱀이 뭉친 모습으로 형상화되곤 하는 상상속의 동물이 깃발에 그려져 있다. 북현무... 그렇다면 눈앞에 보이는 문루는 볼 것도 없이 공산성의 북쪽 문루인 공북루(供北樓)이다.
공북루는 공산성의 4개 문루 가운데 금강변의 가장 낮은 곳에 있다. 때문에 공북루 뒤로 보이는 금강이 거의 같은 높이에 있다.
공북루를 지나서 내가 걸어온 길을 바라보며 한장. 저 멀리 공산정이 보인다.
얕으막한 성벽을 내려와서 공북루를 바라보았다. 공북루는 남쪽의 진남루(鎭南樓)와 함께 옛 문루가 그대로 남아 있는 문루로,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37호로 지정되어 있다. 보다시피 정면 5칸, 측면 2칸의 규모로 팔작지붕을 얹고 있는 2층의 문루로 아래층은 통로로 사용하고, 2층에 누마루를 깔아 놓았다.
공북루에 관한 것은 아래 사진을 참조하기를...
공북루 옆쪽으로 공산성 왕궁관련 유적지에 대한 안내판이 세워져 있는데, 왕궁유적지에 대한 설명과 위치 그리고 출토유물에 대해서까지 상세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위 안내판의 글씨가 안보여서, 우리글로 된 설명 부분만 확대해서 보여주니 관심 있다면 한 번 읽어 보기를...
위의 설명을 토대로 하면 사진속의 평탄한 부분이 왕궁관련 건물이 있었던 자리라는 얘기인 것 같다.
위 사진만 보면 안내판 속에 왕궁터가 30,000제곱미터가 된다는 것이 이해가 안되겠지만, 이렇게 멀리서 바라보면 충분히 이해가 된다. 특히 숲에 가려 왼쪽부분은 사진에 나오지 않았음을 고려해 본다면 말이다.
이 넓은 땅 위 곳곳에 아래 사진같은 안내판이 만들어져 있기는 한데, 실제로 눈에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구한말에 공산성이 군영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하면서 공북루 앞의 이 넓은 공간에 (성안)마을이 형성되기도 했다는데, 일제 강점기에 성안마을의 토지는 공주 갑부에게 팔렸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이곳에 쌀 창고를 지었고, 쌀을 시내로 운반하기 위해 길을 만들었는데, 그 고개가 바로 서문고개라는 이야기가 적혀 있다.
그렇다면 서쪽 문루인 금성루로 이어지는 이 가파른 길이 서문고개라는 얘기가 되는건가?
이 고개길에 고려시대 공주에서 일어났던 망이/ 망소이의 난에 관한 안내판도 설치되어 있고,
나당연합군에 사비성이 함락된 후 의자왕이 이곳으로 피해 다시 항전태세를 갖추었지만, 5일만에 항복을 하게 된 사정에 대한 안내판도 설치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