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6. 공주관광은 "공산성(公山城)"으로부터, 그 2.
# 첫째 마당: 들어가며
"공산성"은 백제 이후 고려와 조선에 이르기까지 성과 군영(軍營)으로서 기능을 수행하여 왔기 때문에, 공산성 안에는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건물이나 유적이 아주 많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들만 꼽아도 아래 사진에서 볼 수 있는 정도이고, 그 밖에도 눈길을 줄만한 것들이 그득하다. 따라서 공산성을 한 바퀴 대략적으로 둘러보기만 하려고 해도 시간이 꽤 걸리는데, 이것이 내가 공산성 이야기를 두 번으로 나누어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공산성 한 바퀴 둘러보기'란 제하의 안내글을 보면, 최소한 이런 것들은 보고 다녀야 "공산성을 둘러봤다"라고 할 만하다는 것 같다. 내가 전편(Chapter 5. 공주관광은 "공산성(公山城)"으로부터, 그 1.)에서 이야기한 것들, 즉 금서루 - 공산정 - 공북루 - 성안마을 이야기는 아래 사진 속에 노란색 테두리로 둘러싸인 부분에 관한 것이었다. 하여 이번 글에서는 나머지 부분을 이야기하려고 한다. 그러니까 전편의 이야기가 아래 사진에서 서쪽(왼쪽)으로 방향을 잡고 돌아온 이야기라고 한다면, 이번의 이야기는 동쪽(오른쪽)으로 방향을 잡아 남쪽까지 훑고 돌아온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금서루를 빠져나와 동쪽으로 뻗은 길은 우거진 숲으로 뒤덮여 있어서 마치 삼림욕장에라도 들어선 듯한 느낌을 주는데, 저 아래 보이는 곳이 앞에서 이야기한 '성안마을'이다.
이런 길을 따라 옛 유적지를 찾아 걷다 쉬다하며 떠도는 것은 어쩌면 신선놀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중간중간에 나타나는 이런 안내판을 통해 역사공부까지 곁들이면 그야말로 금상첨화인데, 대표적인 것 몇 가지만 이야기해보도록 하겠다. 먼저 이것은 통일신라시대 웅진도독이었던 김헌창(金憲昌, ?~822)이 헌덕왕 14년(822년)에 일으켰던 난에 관한 것인데, 사실 김헌창의 난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적어도 다음과 같은 것들을 알고 있어야 한다. 즉,
1. 김헌창의 아버지 김주원(金周元)과 김경신(金敬信, ?~798. 신라 38대 임금 원성왕)과의 왕위계승의 문제.
2. 김헌창 당대의 왕위계승 문제와 옛 백제유민들의 여전한 반신라 정서.
3. 그리고 재미 삼아 이야기해 보는 경북 청송의 주왕산(周王山) 이야기. 주왕산은 우리나라 산이름 가운데 사람 이름이 산의 이름으로 되어버린 유일한 산이다. 물론 주왕이 누구를 말하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학설이 갈리기는 하지만, 그중에는 주왕이 바로 김주원을 뜻한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리고 이것은 고려 현종이 강조(康兆, 964~1010)의 정변을 표면상의 이유로 한 - 물론 진짜 속셈은 강동 6주의 반환 - 거란의 제2차 침입 때 나주로 피난 가는 길에서 공주절도사 김은부와 있었던 이야기에 대한 안내판이다.
## 둘째 마당: 쌍수정과 쌍수정 사적비
오늘의 첫 번째 목적지는 바로 "쌍수정(雙樹亭)"인데, 쌍수정은 1624년(인조 2년) 이괄의 난 때 인조가 잠시 공주로 피난 와서 공산성에 머물렀던 일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정자이다. 1734년(영조 10년)에 처음 세워졌고 그 후 몇 차례 개수를 했다는데, 지금 우리가 보는 쌍수정은 1970년에 전체적으로 해체하여 복원한 것이라고 한다. 보다시피 건물은 앞면 3칸·옆면 2칸에 팔작지붕을 얹고 있으며,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49호로 지정되어 있다.
쌍수정으로부터 오른쪽으로 약 50m 떨어진 곳에 쌍수정의 건립 과정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는 "쌍수정사적비(雙樹亭史蹟碑)"가 있는데, 이괄의 난과 관련된 각종 사건의 연혁과 관련 고사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유적으로 소중한 사료(史料)이다.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35호. 쌍수정사적비는 1708년(숙종 34년)에 세워졌으니 그로부터 벌써 300년도 넘는 세월이 흘렀다. 그렇다면 비석이 온전히 보존되기 어려운 문제가 발생하는데, 그래서 아래 사진처럼 비각(碑閣)을 짓고, 비석을 그 안에 모셔두게 된 것이다. 아, 비각은 정면 3칸, 측면 1칸이고, 지붕구조는 맞배지붕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현재 쌍수정사적비는 결국 비각안에 이렇게 모셔져 있다. 참고로 쌍수정 사적비는 귀부(龜趺)와 비개(碑蓋)를 갖추고 있는데, 비신은 그 단단하다는 오석(烏石)을 사용하였고 귀부와 비개는 화강암을 사용하였다. 특히 귀부는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고 한다. 비신의 높이는 176㎝, 너비는 80㎝, 두께는 60㎝.
쌍수정 사적비에 대하여 자세한 것은 아래 안내판을 참조하기를.
쌍수정사적비 옆에 충청도관찰사를 지낸 유근이란 분의 일기가 적힌 이런 안내판이 서있는데, 충청감영 건물을 짓게 된 배경과 건물완성에 힘쓴 이들의 노고를 치하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충청감영 이야기는 아래 안내판을 참조하기를...
한편 쌍수정 뒤쪽으로 이렇게 넓은 땅이 텅 비어있는데,
이곳에 백제시대 왕궁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 셋째 마당: 진남루(鎭南樓)
오늘의 두 번째 목적지는 공산성의 남쪽 문루이자 삼남(三南, 충청도와 경상도 그리고 전라도를 함께 부르는 말)의 관문이기도 했던 진남루이다. 진남루를 찾아가는 길에서 인솔교사와 함께 한 어린이들을 만났는데, 이 더운 날에 유적지 탐방에 나선 기특한 놈들이다.
아이들의 서 있는 곳 옆으로 공산성 전체에 대한 안내판이 보였지만, 아이들의 공산성 탐방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 비켜서 있다가 아이들이 사라진 후에 가 보았다.
위 사진 속 안내판 아래로 나있는 길을 접어들면 울창한 나무숲 사이로 진남루가 보인다.
다가가 보면 진남루는 이런 모습을 하고 있다. 진남루 위에 오르면 공주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데, 아쉽게도 사진을 남겨 놓지 못했다. 지금 우리는 공산성 안에서 진남루를 바라보는 것인데, 그러다 보니 현판은 보이지 않는다.
현판은 이렇게 문밖으로 나가서 진남루를 바라볼 때 보이는 것이고.
진남루에 대한 설명은 아래 사진으로 대신하도록 하겠다.
진남루 밖으로 나가면 성벽길이 나오는데, 성벽 오른쪽으로 걸려 있는 깃발에 주작(朱雀)이 그려져 있는 것을 보면, 지금 우리는 남쪽에 있는 것이 확실하다.
다시 성안으로 들어와 이번에는 다음 목적지인 영동루(迎東樓)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다음에 이야기할 황새바위 순교성지와 관련하여 언급하게 될 노르베르트 베버(Norbert Weber) 신부가 공산성을 찾았던 이야기인데, 당시 베버 신부는 노을 지는 공산성의 모습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고 한다. 진남루와 공북루 앞에서 공주 선비의 모습을 남기기도 하였다고.
#### 넷째 마당: 영동루(迎東樓)
영동루의 모습인데, 이름만 보아도 공산성의 동쪽에 있던 문루라는 느낌이 진하게 풍겨 나온다.
성벽길을 따라 나부끼는 깃발은 어느새 이렇게 청룡(靑龍)으로 바뀌어 있다.
영동루 안내판인데, 영동루는 문화재로 지정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이유는 - 앞서 이야기했던 진남루와 공산성의 북쪽 문루인 공북루(拱北樓)는 성문이 남아 있던 것과 달리 - 영동루는 터와 받침돌 정도만 확인되었을 뿐이어서 지금 우리가 보는 영동루는 1993년에 새로 지어졌기 때문이다. 결국 영동루는 사료(史料)로서의 가치가 크지 않다는 이야기인데, 사실 영동루라는 이름 자체도 시민 공모를 통해 결정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공산성의 동쪽 문루는 원래의 이름조차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고 한다.
(진남루와 마찬가지로) 조금 전에 보여준 영동루의 모습은 성안에서 바라본 것이다. 영동루의 모습을 밖에서 바라보고 싶다면, 누각 아래에 있는 문을 나가야 한다.
문을 나와 밖에서 바라본 영동루의 모습인데,
현판만 클로즈업해 보았다.
##### 다섯째 마당: 임류각, 광복루 그리고 명국삼장비 등
더운 날에 쌍수정, 진남루 그리고 영동루를 거치며 걷다 보니 조금 지치기도 하고, 누각에 대한 관심도 반감되기 시작했다. 때문에 영동루를 지나면서부터는 대충대충 보며 지나쳐서 이것들은 사진도 제대로 남기지 못하했는데, 하여 이들은 한꺼번에 이야기하도록 하겠다.
1. 임류각(臨流閣)
임류각은 500년(백제 동성왕 22년)에 왕궁의 동쪽에 지은 누각인데, 1980년의 발굴조사 과정에서 높이만도 15m에 이를 정도의 고층누각이었던 것이 확인되어 1993년 2층 누각으로 다시 세웠다. 임류각의 용도에 대해서는 명확한 기록이 없으며, 왕과 신하들의 연회장소였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임류각에 대한 버다 자세한 설명은 안내판으로 대신한다.
임류각이 처음 세워진 것은 백제 24대 동성왕(東城王)인데, 동성왕은 고구려에 한강유역을 빼앗기고 공주로 도읍을 옮긴 백제의 중흥을 이끈 인물이다. 탐라국을 백제에 복속시킨 왕으로 참으로 영민했던 인물인데, 말년에는 사치를 부려 민심을 잃게 된 것이 아쉽다. 어쨌거나 동성왕은 내가 공산성을 다시 찾은 2021년 9월, 이달의 공주 역사인물이었다.
2. 명국삼장비(明國三將碑)
명국삼장비란 정유재란 때 공주에 주둔하면서 주민을 편안하게 보호하였던 명나라의 세 장수, 즉 제독 이공(李公), 위관 임제(林濟), 유격장 남방위(藍芳威)의 업적을 기린 송덕비를 말한다. 비석의 보존을 위해 정면 3칸 측면 1칸의 비각을 세웠는데, 각 칸마다 1기씩을 안치시켜 놓았다.
명국삼장비 안내판. 일제 강점기 때 일본애들에 의해 비석에 있던 왜구(倭寇)라는 글자가 사라졌고, 공주읍 사무소 뒤뜰에 매몰되기도 했다는 이야기가 쓰여있다.
명국삼장비 옆에 보이는 건물은 앞서 이야기했던 임류각이다.
나는 위에서 보여준 사진을 찍는 것으로 명국삼장비를 지나쳤다. 그런데 비각 속의 비석을 하나씩 따로 사진을 찍고, 그들 비석의 이름과 제원을 설명해 놓은 분도 계시다. 하여 당신이 올려놓은 사진과 글을 가져왔다.
왼쪽부터 첫 번째 비석은 유격장남공송덕비(遊擊將藍公頌德碑)로 총 높이 168㎝, 비신의 높이 157㎝, 두께 15㎝, 너비 70㎝, 자경 3×4㎝에 이른다.
가운데에 있는 비석은 망일사은비(忘日思恩碑)로 총 높이 172㎝, 비신의 높이 163㎝, 너비 60㎝, 두께 32㎝, 자경 3×4㎝.
그리고 오른쪽의 비석은 위관임제비(衛官林濟碑)로 총 높이 173㎝, 비신의 높이 154㎝, 너비 48㎝, 자경 3×4㎝.
명국삼장비의 모습과 이야기에 관하여 보다 자세한 것은 아래 사이트를 참조하기를 바란다.
3. 광복루(光復樓)
광복루는 공산성 동쪽 가장 높은 곳에 세워진 2층 누각으로, 원래는 공산성 안에 주둔하는 군대를 지휘하는 중군영(中軍營)의 문루였다고 한다. 그런데 일본애들이 이름을 웅심각(雄心閣)으로 고치고 지금의 자리로 옮겼는데, 광복 후 공주시민들이 힘을 모아 보수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1946년 4월 김구, 이시영 등이 공주를 방문한 후 광복을 기념하기 위해 '光復樓'로 이름을 고쳤다고.
광복루에 대하여는 아래 안내판을 참조하기를...
4. 공산성 백제 토성 외
영동루, 임류각 및 광복루 근처에는 나름대로 가치 있는 공간들이 많은데, 여기선 그런 것들을 모아서 이야기해보도록 하겠다. 공산성은 백제 22대 임금인 문주왕(文周王)이 공주로 도읍을 옮길 때 그 근거가 되었던 곳인데, 재미있는 사실은 지금 우리가 보는 공산성은 조선시대에 축조된 석성(石城)이라는 것이다. 백제의 도읍지를 들어섰는데... 지금까지 본 것이 조선시대의 것이라니 조금 황당하다.
아, 백제시대에 지어진 성의 흔적은 근래에 영동루 근처에서 백제시대 때의 토성(土城)이 발굴되면서 확인되었다. 현재 드러난 토성은 700m에 이른다고 하는데,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그 이유는 백제시대의 토성은 조선시대의 석성밑에 깔려있기 때문인데, 아래 두 장의 사진은 이런 내용을 담고 있는 안내판이다.
한편 공산성 안에는 예로부터 많은 건물이 들어서 있었다. 그러나 건물이 있던 자리라는 것이 확인되었을 뿐, 그 모습을 추단할 수 있는 그 무엇이 없어 아예 복원사업이 시작도 못한 곳들이 많다. 때문에 예전에 있던 건물 이름 뒤에 '터'를 뜻하는 '지(址)'자를 붙여서 그곳을 부르고 있다. 예를 들면, 만아루지(挽阿樓址)... 이런 식으로 말이다.
만아루지에 대한 안내판인데, 언제 그 존재가 확인되고 또 어디에 위치하고 있다는 설명이 전부이다. 건물의 용도가 무엇이었는지에 대한 설명조차 보이지 않는다.
이곳은 군대를 지휘하던 장대(將臺)가 있던 곳인 장대지(將臺址)인데,
장대지에 대한 설명은 안내판을 참조하기를...
이곳은 그 공간이 만아루지나 장대지에 비해 상당히 넓다. 통일신라시대에 공주에 웅천주(熊川州)가 설치되었을 때에 관청건물로 사용되었던 건물이 있던 곳이라는데, 그 건물이 28칸의 규모였다고 해서 이곳을 부르는 이름은 '28칸 건물지'이다.
28칸지에 대한 설명 또한 아래 사진으로 대신한다.
마지막으로 이곳은 12각으로 지은 둥근 건물 2채가 있었다는 '12각 건물지'인데,
이런 12각의 둥근 건물은 '하늘'을 상징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12각 건물은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곳이었을 것이라는 것이 정설이라고 한다.
###### 여섯째 마당: 영은사(靈隱寺) 가는 길
이제 연지(蓮池)와 만하루(挽河樓)를 거쳐 공산성 일주의 마지막 목적지인 영은사(靈隱寺)로 가야 한다. 이들은 전부 연이어져 있는데, 이제 공산성 일주도 그럭저럭 끝이 보이기 시작하는 셈이다. 이런 생각을 하며 성벽을 걷는 내 눈에 공산성에서 금강을 바라보기에 딱 좋은 곳, 그래 공산성의 뷰 포인트로 삼을만한 곳이 들어왔다. 왼쪽을 바라 보아도,
또 오른쪽을 돌아보아도 그림 같은 풍경이 눈앞으로 달려온다.
왼쪽 오른쪽보다는 좀 못하다고 생각될 수 있지만, 똑바로 앞을 바라보아도 괜찮은 풍경이 펼쳐진다.
바로 그 지점에 마치 책처럼 펼쳐진 안내판이 있어 읽어 보았는데, 옛 시와 멋진 글을 엮어 "동문선(東文選)"을 편찬한 서거정(徐居正, 1420~1488)이 집현전 시절 공주에 왔다가 아름다운 공주에 매료되어 "공주 10경"이란 시를 지었다는 이야기가 쓰여 있다.
안내판과 경치를 한컷에...
이곳의 경치에 매료된 나머지 성벽가에 걸터앉아 이런 사진을 남기는 젊은 친구들이 있던데, 글쎄 좀 자제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싶다. 성벽 밑은 바로 낭떠러지이니까 말이다.
영은사 쪽으로 이어지는 성벽길인데, 보다시피 폭도 좁고 경사 또한 심하다. 그러니 이곳을 걸을 때는 장난은 절대 금물이다.
이처럼 위험한 곳의 안전시설(?)은 이런 경고판이 유일하다.
####### 마지막 마당: 영은사, 연지, 만하루
1. 연지(蓮池)와 만하루(挽河樓)
성벽길을 따라 걸음을 옮기는 내 눈에 금강을 굽어보고 있는 멋들어진 누각이 들어왔다. 무언가 공사가 진행되고 있어 어지러운 분위기이기는 하지만, 정면 3칸 측면 2칸에 팔작지붕을 얹고 있는 당당한 모습을 하고 있는 만하루(挽河樓)이다.
만하루(挽河樓)는 보다시피 연지와 금강 사이에 세워진 누각인데, 주된 기능은 군사적 기능이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공사 중이지 않으면 이런 모습을 하고 있고,
물론 접근도 가능하여 누각 위에서 금강이 빚어내는 경치도 즐길 수 있다고 한다. 아, 이 두 장의 사진의 출처는 사진 속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곳은 공산성 안에서 사용하는 물을 저장하던 연못인 연지(蓮池)이다. 백제 때부터 계속해서 이용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전체적인 모습은 석축을 단이 지게 조금씩 좁혀 쌓아 마치 석탑을 거꾸로 세워 놓은 모양을 하고 있다.
연지의 규모는 위쪽은 22m(길이) x 11.5m(너비)이고, 아래는 9m(길이) x 4m(너비). 깊이는 10.2m. 동·서벽쪽에는 너비 40㎝의 배수로를 설치하여 물의 흐름을 쉽게 하였다고 하는데, 이들 설명에 관하여는 아래 사진을 참조하기를...
뒤에 이야기하는 영은사에서 연지로 통하는 암문(暗門)인데, 암문이란 성곽 등에 일부러 문루를 세우지 않고 뚫은 문을 말한다. 암문은 주로 일반인이나 적들이 알지 못하게 후미진 곳이나 깊숙한 곳에 만들어지는데, 유사시에 적이 모르게 비밀스럽게 물자를 이송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만든다
2. 영은사(靈隱寺)
연지를 지나쳐 조금만 걸으면 멀리 영은사(靈隱寺, 전통사찰 제2호)가 보인다. 1458년(세조 4년)에 세운 사찰로 임진왜란 때에는 승병의 합숙소로 사용됐다고 하는데, 1616년(광해군 8)년에는 승장을 두어 전국의 사찰을 관리하도록 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영은사에 관하여는 아래 사진을 참조하기를...
영은사에 들어서면서 제일 먼저 만나는 건물인 관일루(觀一樓)인데, 조선 후기의 사찰에서 많이 보이는 대방건축(강당과 대중방을 겸하는 건축물)의 예로 설명되고 있다.
관일루 뒤쪽으로 대웅전이 있는데, 현판에는 원통전(圓通殿)이라고 적혀 있다. 대웅전은 금강을 바라보게 세워져 있는 북향의 건물이라는 점이 특징적이다.
대웅전 안에는 보다시피 많은 유형문화재와 문화재자료가 있다고 하는데, 내 원래 법당 안은 잘 살펴보지 않아서 보여주지 못한다.
이제 돌아가는 길만 남았다. 현재 공산성의 주출입문인 금서루로 발길을 재촉하다 돌아서서 영은사 전경을 한 장 남겼다. 오른쪽에 따로 떨어져 있는 작은 건물이 대웅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