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4.우리 동네 보안관의 순찰기

사라진 가게와 자라난 나무를 기억하는 일

by 봉순이


어느 날 저녁, 남편과 나란히 동네를 걷다 사거리 모퉁이에서 발걸음이 묶였다. 휘황찬란한 LED 조명이 쏟아지는 휴대폰 매장 앞이었다. 유리창에는 형광색 할인 문구가 가득했고, 최신형 액정들이 매끄러운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그가 불쑥 물었다. “당신, 여기 예전에 뭐 있었는지 기억나?”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간판 위를 더듬었다. 하지만 새하얀 조명에 가려진 이전의 풍경은 좀체 떠오르지 않았다. “글쎄, 뭐가 있었더라.” 나의 망설임이 재미있다는 듯 그가 싱긋 웃으며 답했다. “본죽이었잖아. 우리 자주 왔던.”


아, 맞다. 본죽. 그제야 뽀얀 김이 서린 유리창과 고소한 죽 냄새가 나던 자리가 선명해졌다. 5년 전 사라진 가게의 이름을 듣는 순간, 닫혀 있던 골목의 시간 한 칸이 ‘드르륵’ 열리는 기분이었다. 그의 기억은 길을 따라 아래로 흘러갔다.


“저 아래 순대국집도 참 좋았는데. 국물이 정말 진했잖아.”


그의 말을 이정표 삼아 걷자, 무심코 지나치던 콘크리트 건물이 켜켜이 쌓인 이야기를 뱉어내기 시작했다. 순대국집이 카페로 바뀌었을 때, 그는 유독 서운해했다. 뜨끈한 국물이 생각날 때면 습관처럼 향하던 곳. 그에게 그곳은 단순히 끼니를 해결하는 장소가 아니라, 삶의 허기를 달래주던 다정한 안식처였다.


남편에겐 나에게 없는 특별한 능력이 있다. 남들이 ‘쓸모없다’며 지나치는 소소한 것들을 보물 찾기 하듯 귀하게 여기는 마음이다. 출퇴근길 아파트 단지를 걸을 때도 그는 결코 허투루 걷지 않는다. 나뭇가지 끝을 유심히 바라보다 허공에 손을 대어본다. “나무가 그새 한 뼘이나 컸네.” 말해주지 않으면 누구도 알아채지 못할 성장의 기록. 그는 그런 사소한 발견 속에서 소확행의 열매를 수확하곤 한다.


지난봄, TV 속 벚꽃 명소에 가자고 조르는 내게 그는 늘 동네 공원을 권했다. “멀리 갈 것 없어. 우리 집 앞 벚꽃이 얼마나 예쁜데.” 당시엔 낭만 없다며 핀잔을 주었지만, 이제는 안다. 그의 시선을 따라 본 우리 동네의 봄은 어느 핫플레이스보다 깊고 풍성하게 피어난다는 것을.


나는 그런 남편을 ‘동네 보안관’이라 부른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동네의 변화를 살피고, 사라져 가는 것들을 기억 속에 기록하며, 매일의 안녕을 순찰하는 사람. 그의 하루는 떠들썩한 사건 대신, 소박하지만 단단한 것들로 채워져 있다.


소란스러운 세상 속에서도 자신만의 속도로 하루를 지켜내는 사람이 곁에 있다는 건 든든한 일이다. 그의 시선을 빌려, 나 또한 오늘이라는 익숙한 풍경 속에서 잊고 있던 소중함을 다시 배워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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