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1) 아낌없이 해피엔딩

by 이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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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톤 대회 D+1


내 생애 첫 마라톤 대회. 70일 넘게 궁금해 해온 그 날을 통과한 이야기.


대회를 며칠 앞두고 목감기 증상이 왔다. 어찌나 당황스럽던지. 감기로 악화돼 대회에 나가지 못할까 무서워 재빨리 약을 사 먹고 종일 비타민과 단백질과 온갖 영양소를 섭취하고 일찍 자고 달리기를 쉬었다. 다음 날 아침, 나아지기는커녕 콧물이 끝없이 샘솟았다. 울고 싶은 심정으로 코감기 약을 다시 사 먹고 뜨끈한 콩나물국밥과 과일을 먹고 또 일찍 자고 또 달리기를 쉬었다. 호전을 기도하며 다음 날 눈을 떴는데 목이 바짝바짝 마르고 쩍쩍 갈라지는 것 같았다. 대회 날인데.


그래도 콧물 멈춘 게 어디냐. 코 먹으면서 뛰는 거 정말 싫기도 하거니와 잘 먹어지지도 않고, 아저씨들처럼 뛰면서 고개 돌려 코 푸는 거 진짜 싫기도 하지만 스킬도 없으니 그래, 이만하면 천만다행이다. 하늘이 도우셨도다. 침착하려 애쓰며 대회에 나갈 채비를 했다.


대회 티셔츠로 배송 받은 반팔티는 서랍에 고이 접어두었다. 형광 주황색이라니, 태어나서 한 번도 입어보지 않은 색깔이다. 체육회 임직원 여러분, 미안합니다. 제가 아직 그만큼 발랄해지지는 못했어요.


대회를 위해 2만 원도 넘게 주고 산 달리기용 양말을 꺼내 신었다. 쫀쫀하게 촥 발목을 감싸주는 데다 발바닥에 미끌림 방지용 땡땡이 패드가 붙어있어 풀코스도 끄떡없을 것 같았다. 좋았어.

미리 사두었던 에너지젤도 챙겼다. 어쩐지 단단한 어감의 어쩌고저쩌고 성분이 들어있어 고강도 운동을 할 때 먹으면 1시간가량 힘을 낼 수 있다고 했다. 이제 됐어. 가보자고.


집결지인 금강로하스공원은 내가 초등학생일 때 늘 소풍으로 갔던 곳이다. 잔디밭에 앉아 수건 돌리기를 하고 김밥을 먹고 노래를 부르고 보물 찾기를 했다. 참으로 오랜만에 다시 찾았다. 주차장에서 녹색 잔디밭을 내려다보니 주황색 사람들이 활기차게 몸을 풀고 걷고 뛰고 깔깔거리고 있었다. 똑같네, 예전 그때로 돌아온 것 같네. 그리고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나도 입고 싶네, 저 주황색 티. 소속감이라는 게 이렇게 사람 기를 살리고 죽이네.


달리기는 힘들었다. 새벽에 혼자 뛰는 것보다 훨씬 힘들었다. 사람이 많아 헤치고 나가는 데 에너지를 많이 써야 했고, 해가 솟아있어 뜨거웠고, 한여름 가뭄 든 흙바닥마냥 쩍쩍 갈라지는 듯한 목은 뛸수록 더 메말라 몹시 힘들었다. 그동안 뛰어본 동네 길은 거의 평지였는데 대회 코스는 확실한 오르막 내리막이 이어졌다. 땡볕 아래 오르막이라니... 감기 기운으로 가장 중요한 며칠간 컨디션 조절에 완패했다는 심리적 부담에도 많이 위축됐다. 아! 에너지젤! 그걸 안 먹었네. 지금이 가장 필요한 순간인데!


평소 정말 빨리 뛰면 6분 00초 페이스가 나오는데 초반에 5분 10초라는 오버스러운 오버페이스가 되었다. 컨디션이 많이 떨어진 상태여서 완주 자체에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페이스를 늦추었다. 일주일 전만 해도 '1시간' 골인 페이스메이커를 바짝 쫓아가는 게 목표였지만 그저 멈추지 않는 것, 뛰어서 10km를 완주하는 것으로 목표를 바꾸었다. 똑똑하니까.


종종 뒷사람이 나를 툭 치고 앞서갈 때도 있었다. 기분도 나쁘고 달리는 리듬도 깨지고 휘청이는 것도 자존심 상해서 처음엔 성질이 났는데 그들의 풀린 동공과 휘청이는 다리를 본 다음부터는 동병상련의 마음으로 그들을 응원하며 뛰었다. 그래요, 여러분의 의지와 전혀 상관없었다는 거 알아요, 우리 끝까지 힘을 내자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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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주했다. 2023년 10월 15일. 대전광역시 대덕구 대청호. 10km, 1시간 7분, 페이스 6분 43초.

급수대 봉사자분들, 모범 운전자분들, 대회 스태프분들, 구급차 안전요원분들의 힘찬 파이팅 덕분이었다. 파이팅! 힘내라! 잘하고 있어요! 많이 왔습니다! 으쌰 으쌰! 이런 무형의 말들이 사람에게 유형의 에너지를 일으킨다는 걸 체험한 달리기였다. 막무가내로 보내주는 진심은 감사를 건너뛰어 감동으로 사람을 일으킨 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6218번 임춘식 할아버지에게 고맙다고 말하지 못한 것이 아쉽다. 나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함께 뛰신 백발 성성한 춘식 할아버지. 덕분에 외롭지 않았다고, 끝까지 뛸 수 있었다고 인사하고 헤어질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할아버지, 우리 내년 봄 벚꽃 대회에서 또 만나요.


책방서륜 멤버들─MK, SK, 똘라뷔, 만두님, 바바님, 꽃주사님네 가족, JY님네 가족에게도 고맙다. 공동체 연대감이 우리를 감싸고 있는 것을 느꼈다. 뭉클했다. 사... 사... 사탕합니다!


그리고 나, 행운권 당첨됐다. 커다란 김세트 받고 사진 찰칵. 하하하. 이게 웬일일이야. 내년엔 제주도 항공권 부탁해요!

또 나, 행사장으로 꾸며진 잔디밭에 있을 수 있었다. 광장공포증인데. 그 많은 사람들 속에서 웃고 사진 찍고 묵국수와 믹스커피를 맛있게 먹었다. 사회불안증인데.


행복했다. 30년 전처럼 그 연두색 잔디밭에 둥글게 앉았고, 밥을 먹었고, 박수를 쳤으니까. 선생님이 숨겨둔 보물을 찾았을 때처럼 보일 듯 말 듯 숨어있던 '멀쩡할 수 있는' 나를 찾아냈으니까. 얼마나 반갑던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성치 못한 몸으로 한 시간 넘게 달렸는데도 자꾸만 힘이 솟구쳐 줄다리기라도 해야만 할 것 같았다. 그렇게 나의 생애 첫 마라톤 대회는, 해피엔딩.



대회 다음날인 오늘. 평소와 같이 4시 30분에 일어나 7km를 달렸다.

좋았다. 잘 달려져서, 내가 달릴 수 있어서, 실실 웃으며 새벽바람을 맞으며 뛰었다. 한 번 더, 행복하더라. 아끼지 말고 내일도 뛰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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