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전의 날
부라리와 나는 9개월 동안 말 한마디 없이 같이 일했다. 점심밥을 먹을 때도 단 한 마디도 안 했다. 이런 식으로 일할 수도 있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일하는 곳에서 사람때문에 힘들면 심적 스트레스가 말도 못한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런데 이렇게도 살아지더라는 것이다. 어차피 나는 직장인 MBA를 수강할 때라 내 할 일이 많았고 봐야할 책들도 쌓여있었다. 옆을 신경 쓸 틈이 없었다.
병원의 창가 화분에서 꽃잎이 하나둘 떨어지던 가을의 어느 날이었다. 두어 달에 한 번씩은 은퇴할까, 하시곤 하던 원장님이 갑자기 새 유니트(치과에 가면 눕게 되는 그 치료용 의자)를 사신다고 했다. 말씀과는 상반되게 원장님의 은퇴는 당분간 좀더 뒤로 밀려났다. 물건이 들어왔고 기회도 왔다. 원장님도 잘 들으실 수 있도록 원장님 방 바로 앞 유니트에서 나는 부라리를 불렀다.
"이제 새 유니트가 들어왔으니 청소를 해야 하는데 선생이 청소하는 방법을 몰라서 못했던 것 같아. 지금 알려줄게."
"(두 눈을 부라리고) 제가 알아서 할게요."
"알아서 못하니까 알려주려고."
"(두 눈을 부라리고) 제가 알아서 한다니까요?"
오오 걸려들었어. 나는 온갖 꼰대스러운 멘트와 그동안 하려고 모아 두었던 말들을 모조리 쏘아붙였다.
"니가 이 병원에서 걸레 한 번을 빨아본 적이 있어, 화분에 물 한 번 준 적이 있어? 환자한테 인사를 잘하길 해, 진료를 잘하길 해? 니가 여기서 하는 게 뭐가 있어? 직장이니 출근해서 아침마다 눈 까뒤집고 화장이나 하고, 거짓말하고 놀러 다니는 거 다 모를 것 같지? 그러고도 월급 따박따박 받아가니까 원장님이 호구로 보여? 행동 똑바로 해! 원장님이 알고도 모른척해주시니까 니가 기고만장한가 본데 잘 들어. 나 이 근방에서 모르는 치과 별로 없고(모르는 치과 많다.), 너 같은 애들 금방 소문나. 좁은 치과 바닥에서 니가 그렇게 행동하고도 또 치과에서 일할 수 있을 것 같아?"
근육질의 눈을 가진 부라리가 갑자기 눈물을 뚝뚝 떨어트리더니 원장실로 쫓아 들어갔다. 뭔가 얘기하는 것 같았다. 그러더니 직원방에 들어가 우당탕탕 자기 짐을 마구잡이로 챙기는 소리가 들렸다. 별 것도 아니었는데 준비를 너무 오래한 내 시간이 아까웠다. 나갈 거란다. 알았다고 했다. 내가 수개월간 열심히 걸레질하며 준비해두었던 배경인지는 전혀 모르는 눈치다.
오전에 거사(?)를 치르고 목요일이라서 점심에는 퇴근이었다. 집에 도착하여 소파에 털썩 앉았다. 키득키득 웃음이 나왔다. 키득 소리는 곧 거실이 울릴 정도의 하하 웃음으로 바뀌었다. 냉장고에서 쭈쭈바를 하나 꺼냈다. 쭈르릅 빨며 텔레비전을 켰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무한도전을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승리를 만끽하는 중에 원장님이 갑자기 전화를 하셨다.
"야. 니네 먼 일 있었냐?"
60중반을 훌쩍 넘긴 노인께서 웃음기를 가득 담고 천진난만하게 말씀하셨다. 재미난 구경을 오디오로만 들었느니 얘기 좀 자세히 해봐라, 하시는 것 같았다.
"유니트 새로 와서 청소하라고 했더니 저러네요?"
"갸 그만둔단다. 잘혔다. 허허허허허~!"
원장님께서 그동안 말씀도 못하시고 얼마나 속앓이를 하셨길래 저렇게 소리 내 웃으시며 좋아하실까 생각했다. 난 9개월이었지만 원장님은 5년이 넘는 시간이었으니.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기분이실 것 같았다. 내가 이 병원에 다니는 동안 원장님은 작은 동네 치과에서는 보통은 없는 명목을 만들어서(김장하라고, 어린이날 선물 사주라고 등) 명절 외에 월급의 반은 되는 보너스를 여러 번 주셨다. 하기 싫은 날은 갑자기 문닫고 쉬자고 하기도 하셨다. 환자들은요? 왔다가 그냥 가겠지뭐.
그 후로 원장님은 새로운 간호조무사를 채용했다. 그녀는 외모도 예뻤지만 성격도 외모만큼 좋은 사람이었다. 그 친구와 보낸 시간은 하루하루 즐거웠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어서 같이 책 이야기도 하고, 간식도 먹고, 수다도 떨었다. 9개월 간 굳은 채로 잠자고 있던 내 얼굴 근육들은 기지개를 켜며 서서히 일어났다. 일주일 간 얼굴의 근육들은 통증을 일으켜가며 다시금 낮 시간 사용에 적응해갔다.
그 일이 있었던 것이 벌써 10년 전이다. 2년 전 6월에는 후임에게서 원장님이 건강문제로 폐업을 하신다는 소식을 들었다. 식사도 잘 못하실 정도로 건강이 좋지 않으시다고 했다. 나는 당뇨인용 빵을 들고 치과에 찾아갔다. 살이 많이 빠져 작은 체구가 더욱 작아진 채로 힘없이 졸고 계셔서 마음이 썩 좋지 않았다.
"원장님, 폐업 절차가 힘드시니 꼭 사람 써서 하세요. 건강하시구요. 그동안 고생 많으셨어요."
"고맙다."
사진 출처 : 언스플래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