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여름이 다가오고 있었다. 엽이 할머니는 원장님 친구분의 어머님으로, 원장님이 어릴 때부터 봐오셨다고 한다. 다만 새로 하신 틀니가 적응이 힘드셔서 병원에 자주 오셨다.
"요즘 바빠. 집에 복숭아나무가 있는데 자꾸 열어."
"손주들 오면 잘 먹겠어요~"
"우리 복숭아가 맛있지. 몰랑몰랑~해지ㅁ.."
"난 물렁한 거 안 먹어! 딱복 아니면 안 먹어!!"
어르신의 말씀이 대기실 공기를 타고 원장님의 귀에 도착하자마자, 진료실 안에서 원장님이 우렁찬 목소리로 '딱복'을 외치고 계셨다.
어머님 나지막이 하시는 말씀.
"지랄허네."
며칠 후 엽이 할머니는 갓 따온 싱싱한 복숭아를 여러 봉지 들고 오셨다. 40~50개는 되어 보였다. 이것들을 가지고 자전거로 오셨다고 한다. 와우, 어르신 허벅지 클라스!
모두 딱딱한 복숭아였다.
2
서 할머니는 항상 감사와 사랑이 넘치신다. 과거 조카분이 우리 병원에 오시기 시작하면서 서 할머니도 자연스럽게 소개로 오셨다. 틀니를 완성하시고 치료비를 주시는데 흰 교회봉투에 넣어주신다.
"아이고, 감사혀. 참으로 고맙고 감사혀. 참 고생 많았어. 사랑혀~"
"어디 불편하셨어요? 오랜만에 오셨네~"
"아이고 잘 지냈어? 항상 이뻐. 아이고, 그대로 다 있어서 감~사혀. 고마워. 나? 바로 들어가? 아이고... 참 고맙네. 감사한 일이여, 감사..."
"어머님 1500원만 주세요^^"
"왜 쪼꼼 받어? 원래 그려? 아이고오.. 참 감사허네. 고마워. 이뻐. 사랑혀~~ 이뻐서 빵사다주고 싶었는데
"난 떡 좋아해! 빵 안 먹어요! 떡!"
다리가 아파서 못 샀어. 이걸로.. 엉? 떡 좋아혀? 그러믄 옆에 종로떡집에서 떡 사 먹어. 꼭 사 먹어?"
만원을 쥐어주시면서 저 멀리 들려오는 원장님의 외침에 꼭 떡 사 먹으라고 당부하시며 사랑한다고 꼭 안아주신다. 남편조차도 한 번에 이렇게나 많은 고백을 해주진 않는데.
"저도 어머님 사랑해요~ㅎㅎ"
3
"아버님, 어디 불편... 들어오시지 왜 문에 서 계세요?ㅎㅎㅎ"
"나 그냥 왔어. 안 아퍼. 이거 먹어."
감자다. 영 아버님은 평소 농담도 잘하시고 특히 우리 병원 막내 선생을 은근히 좋아하신다. 막내 선생이 어르신들과 말동무를 잘해드리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데스크에서 아버님을 보며 얘기해도 대강대강 대답하시면서 영 아버님의 눈은 막내 선생을 찾기 바쁘다. 순수하신 그 모습에 웃으며 막내 선생을 불러드렸다.
"안녕하세요~ 오늘은 부안 식당 안 가셨어요? 막걸리 드시ㄹ.."
"ㅅㅅㅅㅅ쉬이잇!!!!!!!!!! 아 나는 술을 안 먹는 사람이여~!! 감자를 뭘로 까는지 알어?"
"글쎄요. 숟가락?"
"먼 힘들게 숟가락이여. 칼로 까야지. 잘 있어~"
다 아는 비밀을 말하지 말라며 검지 손가락 입술 앞에 대시곤 띠용띠용 하신다. 지나면서 농을 툭 던지고 가시는 굽은 뒷모습, 아프신 데가 없다니 다행이다.
평균 연세가 70-80대이신 어르신들이 대부분인 이곳에서 어르신들의 소식이 뜸하면 혹시?..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남편분이 젊을 때부터 아프셔서 30년을 넘게 수발하시던 진 어머님은 시골장날 채소를 팔아 세명의 자식을 키워내셨다고 한다. 스트레스 때문인지 말씀의 양이 남다르시던 진 어머님이 오랜만에 오셨는데, 차분해지시고 얼굴도 좋아지신 것이다. 스쳐가는 생각이 있었지만 차마 묻지는 못하였다.
치과 청구프로그램(진료를 입력하면 환자가 지불할 치료비용과 환자 정보가 나온다.)에서 어르신의 성함을 입력하면 건강보험자격이 조회되는데, 싸한 기분에 한참 안 오신 어르신의 성함을 입력했을 때 빨간 글씨의 '사망자'라는 멘트가 나오면 마음이 착잡하다. 함께 나누었던 농담과 어르신의 표정, 주름들, 어쩐지 말라가시던 모습이 떠올라서 우리는 잠시 조용해진다.
치매에 걸려 하신 말씀을 수십 번이고 하시거나, 예약일도 잊고, 새 틀니를 어디엔가 숨겨 두시곤 틀니를 새로 하신 줄도 모르셔서 자제분들이 답답해하시는 경우도 있다. 한걸음 한걸음 옮기는 것 자체가 큰마음을 먹어야 할 정도로 힘에 부치시어 겨우 병원에 오셨는데 본인의 이름도, 주민번호도 모르신다. 외로우신지 말씀을 끝도 없이 하시고 싶어 하는 일은 다반사다.
작은 시골 치과, 오늘도 이곳에 오시는 나의 '시고르 멤버스' 회원분들께 최대한 편안함을 드리고자 한다. 쉽게 해결할 수 있는 가벼운 불편함만 있으셔서 내년에도 이 모습 그대로 또 뵙게 되길 바란다.
사진 출처 : 언스플래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