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촌유학 이야기
큰아이의 초등학교 입학과 함께 육아휴직을 했다. 큰아이 두 돌 때 편입을 하고 네 돌 때 첫 발령을 받았으니, 공식적으로 첫 육아휴직이었다. 만 3년을 다닌 유치원을 졸업하며, 아이는 개근상을 받았다. 51명 졸업생 중 3년 개근한 아이는 셋뿐이었다. 자랑스러운 상장 앞에서 왜 나는 눈물이 났을까. 이제 아픈 날은 아파해도 괜찮아, 엄마가 휴직할 거니까.
큰아이는 1월 생답게 또래보다 뭐든 빨랐다. 유치원 재롱잔치의 센터를 차지한 것도, 공개수업에서 대표를 맡는 것도 늘 내 아이였다. 맞벌이하느라 생일파티 한번을 못 챙겼지만, 활발하고 씩씩해서 친구도 많았다. 아이의 입학을 앞두고 준비해야 할 것은 책가방과 옷, 학용품뿐이었다. 누구보다 똑똑하고 야무진 내 아이 아이니까. 올해는 내가 함께 있을 거니까.
1학년이 된 아이는 일찍 하교했다. 방과 후 수업을 하나쯤 들어도 집에 오는 시각이 두 시 언저리, 정성스레 준비한 간식을 챙기며 밀린 빚을 청산하듯 정성을 쏟았다. 엄마들의 반톡이 만들어지고 놀이터 모임이 생겼다. 축구, 인라인스케이트, 수영 등, 단체 강습 구성 기준은 매번 엄마들의 친분이었다. 달마다 돌아오는 키즈카페의 생일파티도 휴직 생활의 주요 행사 중 하나였다. 저학년 아이의 친구 관계는 엄마가 만드는 거라는 동네 언니들의 말에, 휴직 안 했으면 정말 큰일 날 뻔했다고 남몰래 안도했다.
OO이가 한번 화가 나면 폭발하듯 터뜨리는 경향이 있어요.
스트레스가 많아 보이는데, 가정에서는 괜찮나요?
키즈카페 생일파티에서 잘 어울려 놀다가도 갑자기 씩씩대며 울고 돌아오기를 몇 번. 엄마들과의 친분으로 이루어진 모임이 아이에게 맞지 않는 걸까, 아니면 정말 스트레스 받는 일이 있나? 불안한 마음을 애써 외면하던 어느 날, 담임 선생님께 처음으로 전화가 걸려왔다. 아이가 화를 잘 못 참는다고, 분노 조절에 문제가 있어 보인다고. 단 한 번도 상상해보지 않은 내 아이의 문제 앞에서 내가 찾은 것은 놀이 치료였다. 시간당 4만 원 짜리 놀이 치료를 일주일에 두 번씩 1년 동안 다녔다.
큰아이가 태어났을 때 나는 매우 불안정한 상태였다. 전공에 자신이 없었고, 무엇하나 정해진 게 없었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을까, 이대로 주저앉아 버리는 건 아닐까. 하고 싶은 일은 너무 많았고, 할 수 있는 일도 아직 많은데, 나와 나의 일 사이에, 아이가 버티고 서 있는 것 같았다. 돌쟁이 아이를 시가에 맡기고 공부를 하겠다고 서울로 갔다가, 결국 포기하고 다시 데려오기까지 걸린 시간이 9개월. 나와 아이가 떨어져 지낸 9개월의 공백이, 아이의 성장 과정 내내 마음의 빚으로 남아 있었다.
어릴 적 못다 한 시간의 공백을 휴직으로 단단히 채워 넣고 싶었다. 친구들을 초대하고 초대받아 놀러 가고, 아이의 관계를 위해서 최선을 다했다. 소방서, 미술관, 과학관 등 주말이면 온갖 체험행사들 다니고 학원도 방과 후도 열심히 알아보고 함께 따라다녔다. 학습지를 사서 매일 같이 풀어줬고 아이가 심심할 틈 없이 늘 함께했다. 학습도 놀이도 관계도, 나는 최선을 다했고 내 방식으로 아이를 조율했다. 아이는 점점 화를 참지 못했고, 우리 둘의 사이는 점점, 나빠져만 갔다.
모든 것이 엉망인 상태로 2년의 휴직 기간이 끝나갔다. 엄마들과의 관계에서 얻은 것은 피로감뿐이었고, 아이는 내 눈치를 보며 목소리를 죽였다. 폭발적으로 화를 내는 대신 점점 말수가 줄었다. 아이도 일도 이대로는 다 놓쳐버릴 것 같은 가을날, 나는 아이와 단둘이 여행을 떠났다. LA에서 라스베가스, 그랜드 캐년, 모뉴먼트 밸리, 다시 캘리포니아로 이어지는 보름의 일정이었다. 때로는 렌트를, 때로는 대중교통을 이용해 아이와 나는 여행을 했다. 걷고 또 걷고, 싸우고 또 싸웠다. 말을 하다가 수다를 떨다가 웃다가, 또 싸웠다.
그건 엄마 생각이지!
그 여행길 내내 아이가 수없이 반복한 말이었다. 집과는 다른 환경에 마음이 살짝 열린 걸까. 오랜만에 동생 없는 시간이 좋았을까. 아이는 모처럼 생각을 굽히지 않았고 나 또한 지지 않고 받아쳤다. 우리는 수없이 싸우고 또 화해하며 서로에게 말하고 있었다. 너나 나나 참, 세구나.
그 순간 내 아이에게 필요했던 건 정성을 들인 간식도, 끊임 없는 관심도 아니었다. 다양한 체험도, 엄마가 만들어주는 친구 관계도, 아이를 위한 게 아니었다. 그 순간 내 아이에게 정말 필요했던 건, 기질 그대로의 믿음, 그것뿐이었다. 어린 시절의 부재를 마음의 빚으로 짊어진 채, 나는 나의 방식으로 아이를 조율하고 깎아내고 있었다.
세상이 이렇게 넓은 줄 몰랐어!
여행의 끝자락에서 아이가 말했다. 그래, 세상이 참 넓지. 넓은 세상에서 우린 어찌 만나, 이리도 복작대며 싸우고 있었을까.
이제 더는 놀이 치료나 상담 같은 거, 받지 마세요.
어머니도 아들도, 모두 너무 정상이니까.
상담자의 선언을 끝으로, 아이는 놀이 치료를 종료했고, 나는 휴직을 종료했다.
그렇게 먼 곳에, 아이를 떼 놓고 괜찮아요?
농촌유학 이야기를 하면 꼭 덧붙는 질문이다. 대단하다는 말속에 은근한 불편함을 모를 리 없다. 그렇게 어릴 때부터 떼 놓으면 정서적으로 문제가 생길 게 분명하다, 나중에 커서도 부모랑 데면데면하다더라, 익히 들어 온 이야기에 나 또한 당연히 지나온 고민이다. 열세 살, 아직은 부모 품이 좋을 초등학생을 두 시간씩이나 떨어진 시골로 보내는 것이 쉬운 결정일 리 없으니까.
그러나 나는 그냥 아이를 믿기로 했다. 함께 지낸 시간의 절대적 양보다는 함께하는 동안 나눌 믿음의 깊이가 더 중요한 거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아이의 홀로서기 앞에서 온전히 믿고 지지하는 일, 아이가 필요로 할 때 슬그머니 어깨 한쪽을 내어주는 일, 딱 거기까지만 하기로 했다. 그리고 어릴 적 부재의 미안함은, 그냥 잊기로 했다. 나도 잘 살아보겠다고 한 결정 아닌가, 애미라고 꿈꾸지 말라는 법 있나, 내가 꿈을 찾아 노력한 시간을 아이에게 사죄할 필요는 없다. 나는 그냥 뻔뻔해지기로 했다.
물론 오늘의 결정을, 먼 훗날 후회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모든 선택의 기본 속성 아닌가. 다른 것도 아니고, 아이의 문제 앞에서 먼 훗날을 확신할 수 있는 사람이 있긴 할까. 매 순간 최선이라고 여기는 쪽을 택하는 것, 그것 말고 다른 방법은 애초에 없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아이와 나의 관계를 바로잡고 매만진 것이 절대적인 시간의 양이 아니라 믿음의 깊이였다는 점이다. 나는, 내 아이를 온전히 믿어보기로 했다. 후회하는 날이 오더라도.
사실 나는 애초부터 헌신적인 엄마가 되기 틀린 사람인지 모르겠다. 혹은 내 아이가 기질적으로 타인의 헌신을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인지도 모른다. 어느쪽이든 그냥 우리는, 양쪽의 기질을 인정하기로 했다. 우리는 둘 다 참, 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