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Claire Kim Jul 18. 2024

Fulfilling: 내가 정의하는 삶

#영어프리젠터 #경쟁영어 PT



Fulfilling 이란 형용사를 구글에 검색하면, 거의 같이 따라 나오는 단어가 life이다.

                                                              

                                                            fulfilling life. 충만한 삶.

 

충만하다는 말로는 표현할 없는 만족감과 행복감, 성취감이 가슴속에 이상 쑤셔 넣을 없을 만큼  오르다 못해 터지기 직전인 상태, 아주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삶이 행복한가 불행한가를 결정하는 척도이자, fulfilling 한 지점에 도달하기 위해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질주하는 상태를 할 것이다.


나에게 fulfilling 이란 단어는, 미드나 영화에서 겉으로 보기엔 완벽해 보이는 중산층의 여주인공이, 가정과 일 모두를 완벽하게 잘 꾸려오면서 자신의 빛나는 커리어와 자상하고 능력 있는 남편, 사랑스럽기 그지없는 아이들을 소개하며 제일 먼저 하는 말로 연상된다. "제 삶은 더할 나위 없이 충만해요. 이 순간이 영원하지 않을 까봐 두려워요."


어떠한 균열도, 빈틈도 없이, 완벽하게 뿌듯한 상태, 무엇보다 무언가를 아주 힘들게 노력해서 마침내 얻은 보상이나 성취가 주어진 순간을 fulfilling이라고 한다면, 단어 자체에 '오랫동안 지속 될 수 없는'이란 한계가 내재되어 있는 게 아닌가 싶다. 그저 조금이라도 더 나은 상태에 다다르기 위해 무작정 열심히만 살았던 나는 이 '무결점의 충만한' 순간이 내겐 오지 않을 거란 비관적인 결말을 정해 놓고 살았다.


그래서, 누군가 내게 fulfilling 한 순간이 언제냐고 물을까 봐 두려웠다. 아직 그 순간이 오지 않았고, 앞으로도 내게는 오지 않을 것 같다고 말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지만, 왠지 그렇게 말해야 할 것 같았다. 그러면서도 나는 이 이상향의 세계에만 존재하는 fulfilling이란 단어를 몰래 꺼내 보며 어떤 색깔인지, 어떤 질감인지 특별한 향이 나는 건지, 나만의 단서를 수집하면서, 도대체 어떻게 해야 이 유니콘 같은 완벽한 성취감을 가질 수 있는 것인지 관심을 놓을 수가 없었다.


'일주일 단위로, 행사나 통역이나 성우 일이 가득가득 차 있으면 그렇게 느낄까?', 아니면 '한국 기업 임원 영어 발표 코치로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미국이나 영국에 가서 일을 완벽하게 끝내고(비슷한 상황의 일을 제안받았으나 성사되진 않았음) 애프터 파티에서 칵테일 한잔을 마시는 순간 그렇게 느낄까?' (나는 학부 때 태국에서 한 학기 교환학생으로 있었던 것 말곤, 한국에서만 혼자 영어를 익히고 훈련했다. 심지어 여행이나 출장으로도 영어권에 단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다.)


이미지출처:https://www.keypersonofinfluence.com/is-a-happy-vibrant-fulfilled-life-possible-for-2016/

아무도 나에게 너는 충만한 삶을 살고 있냐고 묻지 않았지만 나는 마치 그 질문에 완벽한 대답을 하기에는 늘 아직 나의 노력이 부족하고 흠집이 나 있는 상태라고 세뇌하는 밑밥을 깔고 살았다.  그렇게, 아슬아슬하게 커리어를 유지하면서 살다가 내가 늘 충분하지 않다고 (not good enough) 느끼던 일에서, 거의 '접신' 모드로 임하게 되고, '충만한 성취'라는 것을 처음으로 느껴본 일이 생겼다.




나는 통번역, 국제행사 진행, 성우 등의 일도 하지만 기업이나 개인이, 영어로 발표해야 하는 상황이 생길 때 대신 발표를 해주는 영어 presenter이기도 하다.  영어로 발표를 한다는 것은, 영어만 잘하면 된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 누군가에게 적지 않은 비용과 시간을 지불해 가면서 해야 하는 PT는 그것보다 훨씬 살벌하다. 회사 내에서 의례적으로 하는 분기별 성과 발표나, 신사업 전략발표 같은 주제가 아니고, 대부분 고객사에서 내건 프로젝트나 대행 업무를 ‘경쟁’을 거쳐 따 와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업계에선 줄여서 ‘경쟁 PT’라고 한다.


지금까지 주로 내가 했던 분야는 IT 또는 광고대행 에이전시에서 글로벌 기업의 광고주에게 PT를 해야 하는 경우였다. 즉, 다른 업체들과 경쟁을 거쳐 사업권을 꼭 따야 하는 경우 발표를 전문가에게 맡기는 것이다.  

스타트업 기업에서 투자자들 앞에서 피칭을 하는 경우도 있었고, 구글의 파트너사가 되기 위해 사업 전략을 발표하는 한국 IT기업도 있었다. 카타르 항공의 온라인 마케팅 대행권을 따기 위해 국내 작은 광고 에이전시를 대신해서 발표를 하기도 했다.


이런 경우, 나의 신분은 내게 발표를 위임한 회사 소속의 직원이 되는데 아무래도 발표자가 외부사람이라고 소개하는 게 광고주 입장에서는 지원하는 회사의 역량이 부족하다고 느낄 수 있고, 대부분 대외비로 진행되기 때문에 보안 문제에서도 좋을 게 없다. 영어 PT의뢰를 처음 해보는 회사일 경우 (대부분이 그렇지만) 나는 내가 먼저 회사소속의 직원으로 참여하는 게 낫겠다고 제안한다.


그 덕에 글로벌 마케팅 팀장부터, 실장, 이사, 파트너까지 온갖 '애매한' 직책의 명함이 서랍에 그득그득 쌓여있다. 나이가 들수록 명함에 박혀 나오는 직함이 점점 더 묵직해지는 걸 보면서 '그래 내 얼굴이 이제 '대리'급이라고 우길 순 없지' 하고 웃고 만다.


그렇게, 어떤 회사의 대리인이 되어서 프로젝트를 따와야 하는 과업이 주어지면 사실, 그때부터 비상사태다. 내가 맡은 발표가 한 회사의 매출에 영향을 끼친단 생각만으로도 잠이 안 오는데 대부분 발표가 임박해서 나에게 연락을 하신다.  2주 전에 사전미팅하고 자료를 받아 준비하기도 벅찬데, 올해 초에 발표 일주일 전 연락을 받고 전날까지 발표자료가 수정되고, 피티 최종자료는 발표당일 새벽에 주어지는 대환장 파티가 벌어졌다.


사실 나는 작년부터 시작된 어지럼증 때문에 고도로 집중해야 하는 통역이나 영어 PT는 점점 더 감당하기가 어려워졌다. 집중 못하고, 일을 망치게 되면 뒷감당이 안 될까 봐 프리랜서 14년 만에 처음으로 일을 거절하기도 했다. 온몸의 에너지와 세포를 다 끌어다 써야 한다고 생각만 해도 이불속으로 숨고 싶었다. 그렇게 지내길 몇 달 째였는데 한 광고에이전시의 이사님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모 회사(주방기구 분야에서 이름만 대면 다 아는 그 회사, 임의로 Z로 칭함.) 광고대행 입찰 영어 PT건으로 추천받았다며 일주일 뒤 발표를 해 줄 수 있냐는 것이다.


그런데 그 Z브랜드는 내가 23년 1월에 이미 2023년 IMC마케팅 수주건으로 영어 PT를 했었던 곳인데 내가 대행해서 PT를 했던 광고 대행사가 아닌, 다른 대행사에서 연락이 온 것이다. 머릿속이 철수세미 모양으로 꼬일 때쯤, 이사님은 자기 회사가 한국어로 이미 1차 PT를 했고, 이 회사의 광고 전략이 맘에 들었던 '고객사'인 Z회사에서 2차 영어 PT에 나를 추천했다는 것이다.


 나를 고용한 광고 에이전시가 아니고, 입찰을 내건 회사에서 나를 추천했다는 사실에 나는 이번 발표를 거절할 수가 없었다. 일요일 밤늦게 연락을 해 온, 에이전시의 사정도 딱했지만 매번 진심과 최선이었던 나의 커리어가 어디선가 인정받았다는 생각에 진통제를 털어 넣고서라도 해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2023년 시작과 끝에, 같은 회사의 같은 프로젝트를 놓고 나는 다른 회사의 신분이 되어서 Z회사의 선릉 본사 건물에 들어섰다.




발표는 4시, 광고 에이전시 관계자들을 만나는 시간은 3시이고 나는 2시 반부터 약속장소인 근처 스타벅스에서 아이스바닐라라테 투샷을 주문하고 앉았다. 평소에 나는 달달한 음료를 안 마시지만, 영어 PT나 행사 전에 긴장이 극에 달할 때, 텐션을 극도로 올려야 할 때 전쟁터 나가기 전에 갑옷을 입듯이 달달한 커피 음료를 마신다. 마이크를 타고 나가는 목소리는 조금만 처져도 장례식 분위기가 되기 때문에 톤이 안 떨어지려면 초콜릿도 상비약으로 갖고 다닌다. 어지러움도 여전히 남아 있고, 바뀐 자료로 새벽 4시에 일어나서 준비하고 연습하느라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이럴 때도 고이고이 챙겨 온 타이레놀을 털어 넣는다.


드디어 3시 50분, 광고대행사의 ‘전우’ 같은 이사님, 실장님, 부장님과 함께 사무실에 들어섰다. 딱 1년 만에 ‘돌아온’ Z사의 본사 사무실은 낯이 익었고, 나를 추천했던 당사자가 틀림없어 보이는 미소를 띤 담당부장님이 ‘그동안 안녕하셨냐’며 나에게 인사를 먼저 건네셨다.


그리곤 오늘 발표와 평가에 참여하기로 한 아시아태평양 대표 CEO가 갑자기 병원에 가게 되었다며, 괜찮다면 발표를 녹화해서 진행해도 되겠냐고 물어보셨다. 사실, 이 아시아태평양 대표 때문에 영어 발표를 하게 되는 건데 이 분이 안 계신다면, 1월에 있었던 날카롭고 까다로운 질문 세례는 안 받아도 된단 생각에 난 속으로 만세를 불렀다. 계속 이렇게 어지럽다면, 이번이 나에겐 마지막 PT가 될 수 있단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더 잘하고 싶었지만, 연습한 대로만 후회 없이 해보자고 속으로 외쳤다. 안 신던 힐을 신고 약간은 휘청거리면서 나의 영어 발표는 시작되었다.


가끔 그런 순간이 있다. 무언가에 완전히 몰입해서 시간이 멈춰 버리는 순간. 나는 발표하는 동안 Z브랜드의 제품을 매일 쓰는 40대 워킹맘의 페르소나가 되어서 왜 Z브랜드의 접시가 나의 혼수가 되었는지, 왜 이 회사의 그릇을 들고 청담거리를 힙하게 걷는 광고 모델이 되고 싶은지를 얘기했다. 14년 차의 깜이 쌓여서 폭발한 것인지, 이젠 이 일을 다신 못할지도 못한단 생각이 날 더 자유롭게 했는지 알 수 없지만, 영어로 쉴 새 없이 무언가를 말하고 있는 동시에 난 다른 사람이 된 듯했다. 접신을 한 것처럼, 이상하게 말을 할수록 나는 자유로움과 희열을 느꼈다.


발표가 진행되면서 팔짱을 끼고, 노트북에서 눈을 떼지 않던 사람들이 점점 나를 쳐다볼 때, 나의 필살기인 농담에 같이 웃어줄 때, 나는 지금 나와 이 사람들이 나누고 있는 에너지가 나를 점점 구름 위로 올리고 있단 기분이 들었다. 준비하는 내내 매 시간 분초가 괴로웠지만, 발표를 하는 순간만큼은 정말 흥미로웠다. 내 이야기에 집중하고 웃어주는 사람들이 뿜어내는 기운이 어지러움을 잊게 하고 발표의 끝을 향해 달려갈 수 있는 연료가 되었다. 드디어 200페이지의 영어 광고제안서 발표가 끝이 났다.가장 어려운 예산 문제 질문을 쏟아 내시던 한 팀장님이, 발표가 끝나자 나에게 오셔서, 


 “저, 정말 감동받았습니다. PT에서 감동을 받은 건 처음이에요.”라고 하셨다.


이미 한국어 PT에서 점수를 얻은 회사에, 내가 한 영어 피티로 구정물을 뿌릴까 봐 터질 것 같았던 부담이 다 녹아버렸다. 아직 결과는 나오지 않았지만, 한국어 PT를 하셨던 베테랑 부장님으로부터 ‘한 편의 영화 같았다’는 피드백을 남기고 프리랜서 14년 차 가장 치열했던 경쟁영어 PT가 끝이 났다.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던 영어 PT에서, 나에게 늘 '아직 오지 않았고, 앞으로도 오지 않을 것'이라 말하던 순간이 찾아왔다. 이번 일 전에도 나는 늘 내게 일을 맡겨준 고객들에게 진심이고 최선이었지만, 이렇게 긍정적이고 드라마틱하기까지 한 피드백을 받아 본 적은 없었다. 아마도 운이 따라주지 않았거나 아니면 내 실력이 그만큼 농익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날 PT이후,  Z브랜드의 광고대행 에이전시로 선정 됐다는 고객사의 전화를 받고 나는 내가 'fulfilling life'를 살고 있다고 나 자신에게 대답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내가, '충만하다'라고 느껴야 하는 지점이 이동했단 걸 깨달았다. 어지러운 머리를 붙들고, 온몸의 물과 기름을 다 쏟아내며 회의실의 좌중을 휘어잡아야 하는 부담, 최악의 시나리오를 예상하며 온몸의 세포가 스트레스에 절어 있는 느낌, 이 모든 과정 속에서 나는 이제야 내가 '충만하다'라고 느낀다.


오랜 시간, 부족한 부분을 메우기에만 급급해서 일의 결과가 생각만큼 좋지 않을 때에는 내가 했던 모든 노력과 애씀이 헛수고이자 '등급 미달의 재주'라고 깎아내리기만 했었다. 그러나 지난 수십 년간 그 모든 나노 단위의 애씀이 쌓이고 쌓여서 나는 내가 사람들과 교감하고 진심을 나누는 충만한 순간에 도달했단 것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 나에게 충만한 삶은, 분에 넘치는 엄청난 성공보수도 아니고, 남들이 우러러보는 타이틀의 직함도 아니다.


나의 모든 애씀과 노력의 시간들이 용광로에서 들끓다가 폭발하는 순간이다. 내 열정 화산의 마그마가 폭발해서 어디로 흘러갈지 모르겠지만, 늘 조바심 내며 애쓰고 또 애쓴 시간들을 고집스럽게 흠집을 내며 평가 절하하던 버릇을 치우고 나만이 정의할 수 있는 fulfilling 한 삶과 시간을 인정해보려고 한다.


걷고 있는 길의 끝에서 느끼는 성취감이 아니라, 걸으면서 느끼는 성취감이라니... 이보다 더 완전할 수 없다.


Brava! My Fulfilling Life!






이전 02화 Vulnerability(취약성):모든 것의 시작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