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탐닉의 힘 03화

시간여행자로의 초대

죽음의 얼굴

by Claire Kim

.,. Grief was turning me into someone new.
Grief makes us time travelers.

“애도는 나를 새로운 누군가로 바꾸어놓는다.”
“애도는 우리를 시간 여행자로 만든다.”

살면서, 죽은 이의 얼굴을 보는 경우는 몇 번이나 될까?
눈앞에서 누군가 죽는 장면을 목격하게 되는 경우가 아니라면 대부분, 장례식장에서 보게 될 것이다.

하지만, 서양의 장례식과 달리 우리나라는 가까운 가족, 친척들 외엔 장례식장에서 망자의 얼굴을 대면하고 고별을 하는 경우는 없을 것이다. 떠난 이의 자리엔 생전에 준비한 사진만이 있을 뿐. 문상을 하는 이들은 사진을 보며 울기도 하지만 죽은 육신을 만지며, 이별을 고할 기회는 잘 없다.

2024년의 12월 14일, 나는 내 인생 처음으로 죽은 이의 마지막을 오래오래 지켜보았다. 남편의 외할머니, 나에겐 시외조모가 95세를 마지막으로 요양원에서 돌아가셨다.

시외할머니의 육신은 오랜 기간 천천히 쇠약해졌지만, 정신만은 아주 또렷하셨다. 1929년생으로 일제, 6.25를 다 겪으시면서도 고등학교까지 졸업하신 그 시대엘리트답게, 시집와서 내가 처음 뵈었던 14년 전에 영어로 밥 벌어먹고 산다는 나에게 까랑까랑한 음성으로 '그래, 탄젠트 코사인 이런 거 다 소용 읎다. 요새는 외국어 잘하는 게 최고여.'라고 하셨던 게
아직도 생생히 기억난다.

80세가 넘으신 할머니가 나도 기억이 가물가물한 탄젠트, 코사인을 읊으
신 게 너무 신기해서 입이 떡 벌어졌었다.

그렇게, 마지막까지 꼿꼿하게 버티시던 할머니는 코로나 때도 요양원에 가지 않으시고 집에 계시다가
치매와 배변이 불편해지시면서 요양원에서 생을 마감하셨다.
사실 나는 시부모님의 배려로 시외할머니를 자주 찾아뵐 수 없었다. 시부모님은 자식들에게
부담 주고 싶지 않으시다며, 할머니 돌보는 일을 외삼촌들과 알아서 하시겠다고 하셨다.

전날까지 아무런 전조 증상 없이 아침 식사를 하시다 갑자기 돌아가신 시외할머니의 마지막을
보내드리려 부랴부랴 도착한 장례식장에서, 나는 어색함과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는 마음을
번잡스럽게 오가고 있었다.
차라리 몸을 쓰며 음식을 나르고 장례일을 돕는 게 나을 것 같은데, 장례식장에 고용된
분들이 있어 상복을 입고 시어머니 옆에 있는 것 외엔, 딱히 할 만한 게 없었다.

죽음을 맞이하는 자세.

그런 게 존재 하긴 하는 걸까?
장례식장에서, 익숙한 절차와 모습으로 자기 자리를 잘 찾은 사람은 상조회사 직원들밖엔 없는 듯했다.

할머니께 갖다 드릴 반찬을 챙기시다 갑자기 부고를 전해 들으신 시어머니는 마지막에 당신을 보고 싶지 않아서, 두어 시간을 못 기다리고
급히 가셨다며, 요양원으로 보낼 수밖에 없었던 자신을 탓하시며, 많이 힘들어하셨다.

늘 단정하고, 상냥한 시어머니가 저렇게 무너지기까지의 슬픔을 다 헤아릴 수 없어서, 나는 어찌해얄 바를 모른 채 어머니 손을 잡아드렸다.

그리고, '죽음에서 떨어진 채' 지내고 싶었다.

2년 전, 나의 외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도 나는 죽음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아니, 어떻게 죽음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인지 삼각함수보다 더 어려운 과제를 받아 든 기분이었다.

외할머니도 92세에 장수하시고 떠나셨는데, 외삼촌들조차 눈물을 흘리지 않고 덤덤히 받아들이셨다. 마지막까지 외할머니의 배변을 받아낸 나의 엄마만이 서글프게 울던 장례식장에서, 나의 유년 시절을 함께 보낸 외할머니와의 이별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우는 엄마 옆에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그저 최소한의 의무 같은 시간을 보내고 내 새끼들이 있는 서울로 돌아가야겠단 생각만 했다.

나에게 장례식장에서 맞닥뜨리는 죽음은, 잔인한 소리 같지만 고인을 추억하고 기억하는 자리이기보다 ‘바쁘게’, ‘최대한 효율적으로’ 애도를 포장하다 지나가는 자리였다.

시외할머니를 기억하고 애도하는 자리인 이천의 장례식장은 고령의 망자에게 얼마 남지 않은 유족들과 친지들만 조심스레 찾아올 뿐, 서럽게 쏟아지는 울음도 북적이는 조문객도 없는 고요한 빈터 같았다.

나에게 남은 소중한 가족인 시어머니의 눈물을 보면 같이 눈물이 흐르긴 했으나 더 솔직히 말하면 시외할머니가 오랜 시간 아프시면서 하나밖에 없는 딸(시어머니)에게 가장 많은 부담과 괴로움을 주다 가셨으니 어머니는 오랜 숙제를 다 끝내신 것이 아닌가 싶어, 나 혼자 홀가분한 마음을 미리 챙겼다.

그리고, 장례 2일 차, 입관절차가 시작되었다.
그동안 내가 겪은 장례식에선 듣도 보도 못한 일이었다.

생각해 보니, 나의 외할머니는 코로나 때 장례를 치르느라 가족들에겐 얼굴만 살짝 확인해 주고 바로 화장에 들어갔다. 내 기억 속 입관은 고 1 때 아주 가깝게 지낸 교회 동생의 모친상 때 얼결에 같이 옆에 있다 망자의 얼굴을 보고 너무 놀라 며칠을 악몽을 꾸었던 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걷다가 곧 쓰러지실 것 같은 시어머니를 부축해서 들어간 곳엔 시외할머니가 고운 수의를 입고 누워계셨다. 할머니의 피부색은 과한 장례 화장으로 마치 밀랍인형 같았고, 생전에도 39kg이셨던 할머니의 얼굴은 곧 소멸할 듯이 작게 줄어들어 있었다. ‘고인의 얼굴을 보겠습니다.’란 장례 지도사의 말에 할머니의 얼굴을 본 외삼촌들과 시어머니는 ‘엄마’라 부르며 눈물을 쏟아 내셨다.

3명의 외삼촌과, 6명의 손주, 손부 그리고 나의 시부모님 두 분, 이렇게 남은 가족인 우리는 꽃으로 둘러 쌓인 시외할머니 주변에 둥그렇게 서서, 한 사람 한 사람씩 나와서 할머니와 아주 오랫동안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엄마… 잘 가.. 가서는 아프지 말고… 엄마.. 잘 가… 미안해… 사랑해… 엄마 잘 가요.’

나에게, 건네시던 사근사근하고 우아한 시어머니의 음성을 통해 마지막 인사말을 들으니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 평생을 어머니의 그늘에서 사랑도 기대도, 부담도, 어려움도, 괴로움도 다 독차지하셨던 고명딸의 한과 아픔, 아쉬움이 울음을 가득 머금은 ‘잘 가요’에 꾹꾹 담겨 있었다. 시어머니는 나의 딸들, 당신의 꽃 같은 손녀들인 지아와 지유의 이마를 쓸어주던 그 다정한 손길로 망자가 된 자신의 어머니의 이마를 쓸어드리며 우셨다. 어머니의 손끝에서 나오는 온기가 망자의 차가운 몸을 데우는 듯했다. 자신을 낳고 기른 어머니의 주검을 그의 딸이 마치 자신의 여린 아기를 대하듯 쓰다듬는 그 순간, 어미와 자식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온전히 사무치는 사랑의 기운만이 흘렀다. 나는 그 사랑이 너무 애달파서 시어머니의 손길을 따라 울었다.

장례 지도사는 고인의 몸을 주물러 드리고, 마지막으로 안아 드리라고 권했다.

20년 가까이 아프셨던 어머니와 같이 사셨던 시외삼촌은 할머니를 안고 한참을 일어나질 못하셨다. 할머니가 가장 아끼고 사랑하셨던 남편의 형, 아주버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할머니를 안은 등에서 깊은 슬픔이 묻어 나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시아버지의 차례가 되었다. 보수적이고 무뚝뚝한 경상도 출신이시지만, 늘 다정하고 예의 바르신 시아버지께서 할머니를 안아드리며 말씀하셨다.

“장모님, 존경하고 사랑했습니다. 감사해요. 편히 가세요… 사랑합니다.”

아버님의 낮고 중후한 음성에서, 굵직한 존경과 사랑이 흘러나왔다. 70대의 노인인 아버님의 손길과 태도는 자신이 갖고 있는 모든 존경과 예우를 갖춰, 가장 묵직하게, 그리고 가장 아름다운 말로 망자인 장모님을 보내드리고 있었다.

망자를 대하는 남은 자의 실루엣이란 게 이런 것일까…

나는 누워있는 할머니를 향해 구부정해진 아버님의 허리와, 세월에 주름졌지만 하얗고 청결한 손으로 시외할머니의 손을 꼭 붙들고 계신 아버님의 모습을 오랫동안 눈에 담았다. 내가 헤아릴 수 도, 기억할 수 도 없는 시간을 같이 지내 온 피붙이들의 오래고 정성스러운 작별 인사.

할머니와의 인사가 끝나고, 관으로 시신을 같이 옮기고, 꽃을 넣어드리고, 관을 옮기고 하는 과정이 이어졌다. 시신을 꽁꽁 결박하고, 꽃 한지로 장식하는 ‘대례’ 과정이 길게 지나가는 동안 그곳에 모인 가족들은 오래오래 할머니를 지켜보았다.

나는 내 평생 처음으로 망자를 가장 오래, 그리고 정성스레 보내드렸다. 우리나라의 장례 문화가 어떤 것인지, 코로나 때문에 삭제되고 생략해 버린 애도의 과정을 공식적으로 경험했다.

시외할머니를 보내드리기 전까지 나에게 ‘죽음의 얼굴'은, 애도의 대상이 아니었다. 피하고 싶은 것, 가능하면 빨리 끝내고 싶은 것, 어떻게 대해얄 지 도무지 모르겠으나 그 방법을 알고 싶지 않은 것에 가까웠다.

가게일하느라 늘 집에 없던 엄마를 대신해 나와 오빠를 먹이고 씻기고 달래시던 외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도 나는 내게 닥친 이 숙제를 어찌해야 할 바를 몰라 부정하고 괜찮은 척하기 바빴다. 제대로 된 애도도 슬픔도 표현하지 못한 채 그냥 묻어버렸다. 나는 그 뒤로 설거지를 하다 불쑥 외할머니의 목소리가 들리고, 내 아이들이 까르르 부서지는 웃음소릴 낼 때마다 할머니의 표정이 생각난다. 나의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건 문서에만 존재할 뿐, 나의 가슴과 삶엔 여전히 꿈쩍도 하지 않은 상실의 모순이었다. 나는 이 이성과 감정의 괴리가 어디서 비롯한 것인가 늘 궁금했다. 시외할머니를 보내드리며 나는 비로소 그것이, 최소한의 슬픔조차 드러내 표현하지 않은 애도의 생략 때문이란 것을 알았다.


슬픔은, 표현해야 하는 것이라고 했다.
애도의 과정은 어디가 시작인지, 어디가 끝인지 알 길이 없다.
오래 예견한 죽음이었든, 갑작스러운 죽음이었든지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낸 상실과 ‘효율’이 어떻게 같은 자리에 있을 수 있을까.
그런데 나는 몇 번의 죽음을 옆에서 지켜보며 밀어내기만 했지, 그것이 나의 삶에 반드시 존재하는 무엇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즐겨보던 영어잡지에, 자신의 어머니를 떠나보낸 글쓴이가 애도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정의했다.
Grief was turning me into someone new.
Grief makes us time travelers.
사랑하는 이를 애도하는 것은 우리를 '시간 여행자'로 만든다고... 애도하는 동안 우리는 이전의 나와 다른 새로운 사람으로 변한다고...

시외할머니의 장례를 치르는 동안 나의 시어머니의 슬픔이 덜해졌을까.. 남은 생을 사는 동안 찾아올 자신의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줄어들었을까?

아마도 그렇지 않을 것이다.
아무리 더 이상 나올 눈물이 없을 만큼 슬퍼한다 해도 애도의 강은 마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망자와의 시간을 공유하는 이들과 나눈 깊은 애도의 시간은 남은 이들이 살아갈 시간의 무게를 덜어준다.
우리는 망자를 기억하며 어린아이가 되기도, 그가 없는 십 년 후를 상상하기도 하며 '시간 여행자'가 된다.

애도를 깊이 경험한 나는, 죽음의 얼굴을 마냥 무서워하지 않은 '새로운 나'를 찾았다.

2024년의 12월은, 더더군다나 상실과 애도를 빼고 얘기할 수 없을 것이다.

179명. 비행기사고로 황망히 떠난 이들 옆에 얼마나 많은 가족과 지인들이 시간여행자가 되었을까?

죽음은 멀리 있지 않다. 바로 나의 옆에, 내가 아끼는 이들 옆에, 어쩌면 너무 가까이에 있어서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인지도 모른다. 무참히 찢기는 심정으로, 남은 자가 되어 살아갈 이들의 시간여행에 내가 가진 가정 다정한 손길로 그들의 이마를 쓸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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