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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닉의 힘 4부

성과 속 (聖과 俗)

by Claire Kim Feb 18. 2025

4부

그 뒤로, 내게 남은 선택지는 딱 하나밖에 없었다. 남은 아르바이트비를 받고 그만두는 것. 차라리 이런 일이 생겨서, 그만두겠다고 말하는 게 덜 미안해져서 다행이다 싶었다. 그리고, 내 평생 다시는, 남, 여 사장님 그리고 그의 아이들까지 볼 일이 없을 줄 알았다. 아니, 보고 싶지 않았다.
20년이 지난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나는 그날의 파편 같은 이미지들이, 나의 성스러운 안식처(sanctuary)였던 피아노가 똥 밭에 구르는 구더기 취급을 받게 된 날이자, 치정의 끝이 피가 낭자한 폭력으로 귀결된, 건드리고 싶지 않은 기억이 돼 버렸다.

나는 등록금이 필요했을 뿐인데, 내가 그 주점에서 일하는 동안 겪은 모든 일들, 알고 싶지 않았던 복잡한 관계 등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이 거대한 폭력으로 느껴졌다. 알 수 없는 수치심과 참담함으로 마치 내가 그곳에 존재했던 기억과 기록이 영화처럼 한 순간에 삭제돼서 세상 그 누구도 몰랐으면 했다. 길을 가다가 우연히 알바를 했던 여자애나, M, 그리고  그 언니까지 마주치면 모른 척할 심산이었다.

그러나, 내 인생에 그렇게 산뜻한 결말이 주어지는 경우는 없었다.

꿈에 나타날까 무서웠던 그 여사장을 약 한 달 뒤 다시 만난 곳은, 너무 어이없게도 내가 다니던 교회 예배당에서였다. 그리고, 그다음 주 그녀의 아들인 M도, 공부하느라 바쁘다는 그 ‘언니’도 내가 다니던 교회로 나오기 시작했다.

이게 다 , 우리 엄마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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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맥주병 피바람 사건 직후, 집에 무슨 정신으로 걸어왔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집에 들어서니 새벽 2시쯤 되었을까, 고된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정신없이 자고 있던 친오빠를 깨워 울면서 오늘 내가 겪은 일을 얘기했다. 오빠는 내가 겨우겨우 말을 마치자, 딱 한마디 했다.

“야, 완전 개 막장, 콩가루 집안이네. 그래서 이제 알바는 안 가려고?”

주점 피아노 반주 알바를 하는 동안, 한 번도 밤늦게 뒷골목을 거쳐 걸어오는 여동생을 걱정해 본 적 없는, (사실, 오빠도 제일 힘든 시기였을 것이다.) 하루하루 버텨내기 버거운 오빠에게 하소연을 해 봤자, 별 공감을 얻지 못하리란 걸 알고 있었지만, 칼부림 난리통을 겪고 살아 돌아온 여동생에게 아르바이트비 못 받을 걱정부터 내뱉는 오빠에게 더 이상 얘기를 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때, 나의 오빠는 아르바이트를 3개씩 하면서 등록금을 벌고 있었기에, 아르바이트하는 주점에서 술주정으로 난리가 났었다 정도는 별 일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오빠는 이미, 조폭이 운영하는 노래방에서 알바를 하다 진짜 조직 패싸움을 겪었다…아,,, 우리 남매의 인생이여.)

더 기가 막힌 건, 엄마의 반응이었다.

내가 피아노 알바를 하는 가게의 구성원들이 어떤 관계인지 엄마는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 사달이 난 다음날 이제 다신 거기 안 간다, 아니 못 간다라고 얘기하자,
“아이고,,, 진짜 불쌍한 사람들이네, 그런 사람들을 전도해야 한다! 그런(?) 사람들일수록, 교회에 나와서 위로도 받고 구원을 받아야 한다 아이가….”

20년 전이라 가물가물하지만, 내 기억 어디에서도 이제 갓 스무 살을 넘긴 딸이 얼마나 놀랐을지, 얼마나 무서웠을지를  헤아리며 그런 일을 겪으며 돈 번다고 고생했다든지의 위로는 없었다. 아니, 나의 엄마가 그런 위로를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애초에 내가 주점에서 밤에 피아노 치는 아르바이트를 한다고 할 때, 말렸어야 했다.

나의 엄마가, 기가 막힌 상황을 겪은 자기 딸 앞에서 ‘전도부인’의 열망을 불태우는 동안, 내 기분이 어땠을지, 정확히 묘사할 말이 없다.

나는, 엄마에게 제발 그 주점에 가지 말라고, 엄마가 굳이 가서 전도하지 않아도 된다고, 제발 나를 끼고 그런 짓을 하지 말라고, 나는 그 장소에 두 번 다시 가고 싶지 않다고 사정했다. 부끄럽고, 황당하고, 참담했다.

그러나, 나의 엄마는 경계도 부끄럼도 없는 경상도 아줌마의 오지랖인지, 평생 꽂히면 하고 싶은 대로 밀어붙이는 성격 때문인지, 내가 마지막 아르바이트비를 받으러 가는 날 어느 오후, 기어코 나를 따라와서는 여사장의 애인이 늘 앉던 광안리 해변이 보이는 창가 자리에 앉아 사들고 온 박카스 한 박스를 내밀며, 여사장과 얘기를 나눴다.

강하게 거부감을 보일 거라는 내 예상과 달리, 그 일 이후 기가 죽은 탓인지, 여사장은 엄마가 얘길 하는 동안, 조용히 듣고 만 있었다. 햇살이 비친 그녀의 얼굴에는 어두운 조명 아래에 감춰져 있던 삶의 거친 무게와 곤란함이 잔뜩 묻어났다.   

그 둘을 쳐다보며 기다리던 나는, 마지막 아르바이트비 봉투를 남자 사장님에게 받으며 아마도 세상에서 제일 기괴하고 어색한 미소를 띠고 있었을 것이다.

어찌 됐든, 나는 이후 가을 학기가 시작하기 전까지 이 기괴하고 어색한 관계의 인물들을 가장 어울리지 않는 공간에서 마주해야 했다. 여사장님은 정말로, ‘신’과의 만남이 절실했던 것인지, 교회사람들의 호의와 친절이 좋았던 것인지, 술집 손님들을 대할 때의 모습과 상상도 되지 않을 차분함과 진지한 자세로 예배에 참여했다. 그리고 그녀의 ‘속 없는’ 아들과 딸도 교회 청년부의 일원이 되었다.

내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나는 왜 이들을 교회에서 또 만나야 하는 것인지 이해가 되기도 전에 내가 제일 부대꼈던 감정은 내 엄마의 ‘태도’때문이었을 것이다.

 여사장의 아들과 딸이 전적으로 이해와 사랑이 필요한 존재였다 할지라도, 나는 ‘폭풍이 몰아치는 한가운데 나도 그 둘도 똑같이 벌거벗고 있는데 내 친엄마란 사람은 자기 딸을 내치고 왜 피 한 방울 안 섞인 남의 자식에게 담요를 둘러주고 있는가?’란 의문을 떨칠 수가 없었다.

20년이 지난 지금, 봉인했던 기억을 해제하면서 그때의 엄마를 이해해 보자면, 엄마에게 현실의 ‘어려움과 고통을 호소하는 딸’보다, 당장 행동에 옮길 수 있는 ‘도덕적’ 만족감을 주는 대상을 찾아 자신이 옳다고 믿는 일을 하는 것이 훨씬 쉬웠을 것이다.

나는 평생, 세심한 보살핌 따윈 기대할 수 없는 엄마 밑에 살면서 기대와 실망을 반복하다 서서히 마음의 벽을 쌓았고, 그 서운함과 애증의 감정은 엄마에게 ‘까탈스럽고 예민한 딸’이 되게 했을 것이다.

그렇게 엄마가 선택한 ‘좀 더 쉬운’ 보상심리와 행동은 그 이후 지금까지 내가 가족들에게 그 어떤 것도 기대거나 의지하지 않게 하는 사건이 되었다.

22살 교회에서 예배 반주를 하던 나는, 내가 치는 피아노 반주에 맞춰서 고분고분 찬송가를 따라 부르는 여사장과 M, 그리고 그의 누나의 얼굴을 살피곤 했다.

여사장은 교회에선 나름 점잖게 차려입고 왔지만, 커다란 금색 링 귀걸이와 새빨간 핏빛 루즈는 잊지 않았다. 그녀의 피곤에 절은 눈 밑을 보며, 나는 ‘구원’이 이렇게 쉬이 주어지는 것인가를 생각했다.

‘모든 죄인에게 열려있다’는 그 천국의 문이, 막상 내가 진흙탕이라 생각했던 공간에서 만난 이들에게 열려 있는 걸 보니, 그들이 괴로운 현실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를 경험하길 바라는 마음과, 나에게는 열리지 않는 천국의 문 사이에서 나는 괴로웠다.

이 글을 쓰기 며칠 전 꿈을 꾸었다.

그 꿈에서 나의 늙은 엄마는, 머리카락이 다 빠졌는데 얼마 남지 않은 머리카락을 테이프에 심어서 그 듬성듬성 머리카락이 심긴 테이프를 조악한 스테이플러 심으로 두피에 고정해 놓고 있었다. 다행히 피가 나진 않았다. 엄마는 아무렇지 않다고 했다. 나는 엄마의 두피를 보며 어찌해야 할 바를 몰랐다.

그리고 나의 왼쪽 다리에 통증이 느껴졌다. 심하게 아프진 않지만, 뭔가 성가시게 아팠다. 나의 왼쪽 종아리 전체에 커다란 스테이플러 심이 몇 백개 박혀 있었다. 손가락 두 마디쯤 되는 크기에 말발굽 모양으로 박힌 스테이플러는 바늘처럼 일직선이 아니라, 피부를 뚜껑처럼 들어야 빠지는 모양새였다. 다행히, 꿈속에서도 피가 낭자하진 않았다.

나는 엄마의 두피보다 더 답이 안 나오는 내 다리를 보며, 이걸 어떡해야 하나, 이걸 언제 다 빼지, 고민을 하다 잠이 깼다.

그 일이 있은 후, 20년이 지났고 강산이 두 번 바뀌는 동안 내 영혼에 스테이플러처럼 박힌 상처와 아픔이 아직도 다 뽑히지 않았다는 걸 느낀다. 가장 성스러운 시공간과, 가장 세속적인 시공간이 혼재했던 그 시절의 나는 여전히 영원에 잇닿은 삶을 갈망한다.

다시 치기 시작한 예배당에서의 피아노, 그 시공간 속에서 나는 다른 차원의 세계로 옮겨가 신에게 끝없이 묻는다. 聖과 俗의 경계는 어디인지… 당신의 구원은 여전히 모두에게 열려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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